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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 (56)화 (56/256)

51화

짧은 비행 끝에 착지한 곳은 두 사람이 사는 주택 마당이었다. 첫날 풀을 뜯은 이후로 방치한 덕에 아직도 엉망이었다.

수혁은 망할 놈을 옆구리에 낀 채로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원래 신발을 신은 채로 실내에 들어서는 걸 지극히 혐오한다. 하지만 홀인원인 전투복을 벗고 들어갈 순 없었다.

사실 수혁은 날아오는 내내 분기를 감추지 못했다. 불쾌한 건 확실한데 어떤 종류의 불쾌감인지 스스로 감을 잡기 힘들었다. 배신감? 그런 거창하고 화려한 감정은 아니다. 좀 더 개인적이고 사소한 감정이다. 그렇기에 수혁에겐 새로웠고 그만큼 영향력이 거셌다.

놈을 거실 한가운데 반쯤 던지듯 내려놓은 후, 수혁은 손을 공중으로 뻗었다.

냉장고 문이 알아서 열리면서 차갑게 식은 맥주 캔이 하나 날아왔다. 그 자리에 일단 한 캔을 비웠다. 불타는 속이 약간 진정되었다.

“왜 화를 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미적미적 일어난 놈이 수혁을 향했다.

“이 정도는 항상 있는 일이지 않습니까. 소령님은 항상 연락을 무시하니까요.”

그랬다. 수혁은 군의 지시를 무시했다. 군의 첩보 없이도 스스로 감지할 만큼 대형 게이트가 발생하거나, 다량의 외계인이 출몰했을 때만 나섰다. 인류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때려 부수면서 기분 전환을 하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개인적인 목적으로만 움직였기에, 군의 대응 작전 개요는 물론이거니와 실제로 뼈와 살이 튀는 현장에서도 아군의 전술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어떻게 할 건지만 같은 인류, 그리고 의식주를 제공하는 군에 대한 최소한의 의리로 통보했다. 수혁이 발휘하는 능력 범위 내에서 제때 피하지 못해 아군이 얼마나 다치고 뒤지건, 자산이 몽땅 고철덩이가 되건 말건, 수혁이 알 바가 아니다.

군인이되 군인답지 않은 강수혁이라는 막강한 에스퍼를 어떻게든 활용하기 위해 군 수뇌부가 얼마나 많은 거짓말, 속임수, 은폐 작전을 펼쳤던가. 개미 따위가 호랑이를 이겨 보겠다고 술수를 쓰는 격이라 하찮기 이를 때가 그들이 어떤 짓을 하든 수혁은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은 만큼 별로 화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김윤조가 그러는 건 매우 불쾌했다.

‘우리가 이런 사이였나? 같은 움직여야 하는 작전마저 공유하지 못하는, 서로 소, 닭 보는 것처럼? 할 거 다 한 사이에 진짜 섭섭하게 구네.’

속으로 구시렁대던 중에 수혁은 낯선 감정의 정체를 밝혀냈다.

그렇다. 이건 진한 섭섭함이었다.

32살.

길다면 좆 같이 길고 짧다면 개같이 짧은 삶 동안 이렇게 일상을 공유해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고, 같이 사는 식구가 처음 생긴 것이다.

아침에 양치하면서 새 휴지 어디 있냐고 묻고, 샤워젤 냄새는 시원한 것과 은은한 것 중에 어느 게 더 낫다고 우겼다. 된장찌개와 김치찌개 중 어느 쪽이 최고의 존엄인지, 수건은 접어 개는지, 말아 개는지 열띤 토론을 벌였다.

베개는 높은 것보다 낫은 게 낫다는 놈을 위해 새 베개를 채집하러 마트에 가면서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지 의논했다. 이제 수혁은 망할 새끼의 팬티 치수 및 개수까지 알고 있다.

그런데 이중 작전인 걸 자신에게 숨겨? 어쩐지 심 박사와 내기를 하더라니.

이제 생각하니 내기 자체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망할 두부 새끼에겐 이 관계가 장난인 건가?

아무리 장선욱 그 새끼가 떠밀어서 시작한 동거라지만. 그래도 같이 사는 사람들끼리 지켜야 할 의리와 신뢰가 있지 않나. 우린, 식구가 아니냔 말이다.

“시발.”

서운함의 정체를 알아챈 수혁이 들끓는 속을 달래기 위해 두 번째 맥주 캔을 비울 때였다.

“에스퍼-가이드 페어링 훈련임을 사전에 통보하지 않은 건 소령님의 협조성을, 오염 없이 테스트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평소에 작전에 관심이 없으셔서 그렇게까지 불쾌해하실 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역시나. 망할 가이드님께서는 수혁이 화난 포인트를 영 잡지 못했다. 수혁 본인도 뒤늦게 깨달았으니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잡히는 대로 다 때려 부수면서 성질을 부려 봤자, 저 인형 같은 새끼에겐 전혀 통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목 아래로 모든 뼈가 부서지고 피떡이 후에도 저렇게 멀뚱한 낯으로 저를 대하고 있지 않은가. 어떤 의미로는 정말로 기계 같은 놈이었다.

“우리 동거하는 사이야.”

“그런데요?”

놈이 반문했다.

“볼 장 다 본 사이라고. 너는 시발, 내가 네 실력 알아보자고 다른 놈들이랑 몰래 짬짜미하면 기분 좋겠냐? 24시간 얼굴 맞대고 밥 같이 먹고 같이 자는 사이에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그게 왜요? 소령님은 개인 파일조차 저한테 숨기고 계시잖아요.”

엉뚱한 반격이 날아들었다.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와? 그건 너를 만나기 전 과거잖아. 그리고 열람 불가가 내 의지냐? 장선욱 그 새끼 의지지.”

“소령님이 언제부터 장 중장님 뜻대로 했다고요. 또 파일 열람 아니라도 개인적으로 따로 설명하실 수도 있는데 안 했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꼬워서 나도 당해 보라고 다른 놈들이랑 짬짜미했다 이거야?”

“그건 아니고요.”

“시발. 말해 줄게. 말하면 되잖아.”

맥주 캔을 구겨 버린 수혁은 바로 목 뒤에 있는 전투복 잠금장치를 풀었다. 흡기(吸氣)음과 함께 전투복 텐션이 나갔다. 전자식 노크 단추를 쫙 벌리면서 상체를 전투복에서 빼냈다. 안에 입은 검은색 내피를 훌렁 벗어 버린 후에 등을 돌렸다.

“8년 전 장선욱 주도로 심은 에스퍼 제어 장치. 내 대가리 중심부에서 꼬리뼈까지 연결되어 있고. 믿거나 말거나지만 원래 탈착도 가능하게 설계되었다고는 하는데, 전투 중에 부상으로 재생을 반복하다 보니 뇌와 척수에 완전히 들러붙어서 이젠 제거 불가능. 평소에는 잘 안 보이다가 가끔 거부 반응 일어나면 빨갛게 부어올라. 됐냐?”

“무슨 에스퍼 제어 장치가 이렇게 살벌합니까? 보통은 전극 약간 붙이는 정도가 다인데요.”

실컷 설명해 줘도 곱게 들어 처먹질 않는다.

“트리플 S급에 대한 제어가 무슨 뜻인지 감이 안 와?”

“예?”

“내가 미쳐 날뛴다고 하자. 무슨 수로 제어할 건데?

반문하자 놈은 입을 연 채로 아무 말도 못 했다.

“이거 자폭 장치야. 그것도 재생 못 하게 원자 단위로 분해하는 일종의 마이크로 핵폭탄.”

놈이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눈을 두 번 깜빡였다.

무슨 새끼 꽃사슴도 아니고 매번 눈을 왜 깜빡이는지 모르겠다. 다 큰 남자 새끼가 깜찍해 봤자 무슨 소용 있다고. 수혁의 가랑이나 부풀릴 뿐.

“이런 장치가 있는데 왜?”

“왜 가이드를 만들었냐고?”

놈의 멍청한 의문에 수혁은 조소했다.

“괜히 시간 질질 끌지 말고 화끈하게 터트려서 죽이는 편이 좋을 거라고 경고했거든.”

수혁은 입술을 비틀었다.

“만에 하나라도 내가 이 장치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말이야. 그때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새끼들은 모조리 증발하는 거야.”

그러는 김에 지구도 반절쯤 작살내고.

8년 전 그날.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 전투 의지를 반쯤 잃었다.

“그런데 소령님의 동의 없이 달기는 힘들었을 텐데요.”

“의식을 잃은 사이에.”

“그건 인권 침해인데요.”

“이름 석 자보다 트리플 S라는 말이 먼저 붙는 놈에게 인권이란 게 있겠냐? 군 소속도 내 의지가 아닌데.”

수혁이 냉소하자 놈은 입을 다물었다.

“군부 지시에 왜 항상 삐딱하게 나오는지 좀 알 것 같네요. 제가 소령님이라도 군부라면 다 좆같을 것 같습니다.”

“이해해 줘서 고맙습니다?”

빈정거렸는데 돌아오는 가시가 없었다. 김윤조는 수혁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심각하고 진지하게 나왔다.

“단순히 뒤통수친 점보다 함께 짠 상대가 군 상부라는 점이 특히 기분 나쁘신 듯합니다.”

“정확해. 그리고 너, 이제 내 가이드잖아. 다른 놈보다는 내 기분을 더 신경 써. 그게 네 임무잖아.”

수혁의 음성이 한결 누그러졌다.

“이유야 어떻든 너는 네 의지로 가이드가 되었지만 나는 아니야. 태어나 보니 그냥 에스퍼였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정신 차려 보니 군의 개가 되었고. 내 맘대로 살려고 했더니 좆 같은 새끼들이 자폭 장치를 달지 않나, 그도 모자라 가이드까지 만들었어.”

수혁은 김윤조에게 점점 다가갔다. 가만히 서 있는 그의 어깨에 팔을 둘러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상대는 순순히 끌려와 수혁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나는 네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벅차. 머리고 가슴이고 너무 복잡해서 툭 건드리면 터질 지경이라고. 그러니까 괜한 잔머리 쓰지 말고 좀 심플하게 가자.”

“심플하게…… 말씀입니까?”

“그래.”

놈이 갑자기 잠잠해졌다. 뭔가 불편한 눈치였다.

싫은가? 뭐 수혁의 지랄 맞은 과거는 수혁의 과거다. 그것이 김윤조에게 저지른 각종 악행에 대한 변명은 되지 못한다.

“나 싫어하지 말라고 안 할게. 앞으로 이런 뒤통수만 치지 말자.”

“미움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심플한 거 편해서 좋긴 한데.”

느낌이 딱 뭔가 켕기는 게 있는 투였다. 여태껏 놈과 다방면으로 부딪치면서 축적한 경험이 ‘이건 놈의 개인적 사안’이라고 외쳤다.

‘심나연 같은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피실험체가 되겠다고 목숨 걸고 나선 놈도 평범한 새끼는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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