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그랑주 포인트 (54)화 (54/256)

49화

모든 장비가 준비되는 동안 김윤조는 심 박사의 코칭과 함께 전투복을 점검했다. 수혁에게는 다른 연구원이 붙었다. 그들은 둘의 전투복에 훈련을 위한 프로그램을 입력하고 조정했다.

헬멧을 장착하자 훈련 시나리오가 바로 스크린에 떴다.

김윤조가 수혁의 곁으로 왔다.

“항상 이쪽.”

수혁은 그를 제 왼쪽으로 보냈다. 경기 시작을 앞둔 선수처럼 무심하게 오른팔을 풀 때 김윤조가 전투복 케이블을 수혁에게 연결하고 오른쪽 팔을 수혁의 어깨에 올렸다. 뒤이어 수혁이 왼팔을 김윤조 허리에 둘렀다. 김윤조의 오른발이 수혁의 왼발 위에 올라왔다. 각각 어깨와 허리를 잡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통신 상태를 점검한 후에 ‘고’ 사인이 떨어졌다.

수혁이 떠올랐다. 혼자 이동할 때만큼 고속 비행은 아니었다. 헬멧 없이는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속도였다.

-위치 확인.

“위치 확인.”

최정의 통신은 두 사람 모두에게 전달되었으나 응답을 하는 사람은 김윤조뿐이었다. 애초에 수혁은 통신을 제대로 수신하지도 않는다. 그런 수혁과의 작전 성공률을 높이기 위한 가이드이기에, 최정은 윤조의 응답만으로도 안심했다.

훈련 목적지는 인근 야산에 있는 포격 훈련장이었다.

강수혁의 훈련이 잡힌 순간부터 포격 훈련장 반경 30km 내 모든 인원이 소개했다. 잘못해서 유탄이라도 맞으면 그대로 가는 것이다. 대신에 충분한 거리를 두고 각종 레이더와 광학 관측 장비들이 총동원되었다.

시나리오에 따라 지정된 위치에 김윤조를 내려놓고 수혁은 10m 상공으로 떠올랐다.

“김윤조, 들려?”

-네. 들립니다.

지상에 있는 김윤조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수혁의 헬멧 스크린에 김윤조의 위치가 형광 파란색 삼각형으로 표시되었다.

-훈련은 이미 시작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훈련 중에는 어떤 본부 지원은 없다. 다치지 않도록 주의하기 바란다.

“알았으니까 꺼져.”

수혁이 짜증 내자 최정은 냉큼 통신에서 사라졌다.

-미확인 비행 물체 3기, 아니 5기. 4시 방향에서 접근 중.

“4시.”

김윤조의 보고를 듣자마자 수혁의 몸이 우측 후방으로 돌아갔다. 헬멧 스크린에 붉은 삼각형이 좌르륵 떴다. 시야에도 보이지 않는 물체를 감지한 통신 위성의 정보가 김윤조를 통해 전달된 것이다.

-한계 거리 접근 중. 접선.

시야에 들어왔을 때 수혁은 주변 공기압을 이용해 비행 물체를 터트렸다.

콰쾅.

-4개 격추, 1기 계속 진입.

주변에 널린 돌덩이 수십 개를 들어 날렸다. 초고속으로 날아간 돌은 기관총과 맞먹는 효과를 지녔다.

쾅.

-1기 격추. 11시. 방향 3기 출현.

쾅!

사방에서 물체가 날아들었다. 크기와 속도가 다양했다. 어떤 것은 복잡한 회피 기동을 보이기도 했다.

-경로 추적 중. 포착. 방향 5시 2시 4시 1시 7시 9시, 전부 날아옵니다.

전방 일부를 제외한 사방에서 물체가 날아왔다. 수혁은 개별 요격을 포기하고 바로 김윤조에게 돌아갔다. 그러자 물체들이 일제히 방향을 틀어 그들에게 쏟아졌다.

“김윤조, 숙여.”

상대가 몸을 낮추자마자 수혁은 공기를 모조리 압축하여 발사했다. 마이크로 토네이도가 다발적으로 생성되면서 자갈과 모래를 빨아들였다. 그것들은 수혁의 의지에 따라 사방에서 날아드는 비행체를 향해 돌진했다.

콰콰쾅!

첫 충돌을 시작으로 목표물은 차례로 폭파되었다. 흙먼지와 함께 시커먼 연기가 수혁을 중심으로 반구형으로 형성되었다. 이후로 날아오는 물체는 없었다.

-목표 제거 완료.

먼지를 뒤집어쓴 김윤조가 일어서면서 보고했다.

-훈련 종료입니다.

“이게 다야?”

-1단계는요. 바로 2단계 갑시다.

수혁의 물음에 김윤조가 출발할 때처럼 다가와 팔로 어깨를 감싸고 한 발로 수혁의 발등에 올라섰다.

아직 자욱한 흙먼지를 뚫고 날아오른 수혁은 다음 지점으로 이동했다.

제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까치집 머리를 하고 돌아다니는 김윤조도 귀엽지만, 흰색 가이드 전투복을 입고 진지한 낯을 한 김윤조는 또 색달랐다.

역사적으로 군복이 맹활약하는 건 진작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긋지긋한 군이 곧 삶이었던 수혁에게는 특별히 멋져 보일 리가 만무했다.

견장에 멋진 별이나 가슴에 휘황찬란한 데코레이션이 있어도 역겨운 늙다리 꼰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요즘 들어 각광받는 에스퍼용 전투 슈트는 알량한 능력을 믿고 날뛰는 머저리의 상징이어서 낌새만 보여도 시야 밖으로 날려 버렸다.

그런데 김윤조는 달랐다. 백조처럼 하얀, 그래서 스텔스 기능이 과연 있기나 한가 의심스러운 전신 슈트가 오늘따라 눈에 밟혔다.

‘전에는 몰랐는데…… 흰색 전투복이 은근히 예쁘긴 하네.’

전투복 디자인 자체가 예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얼굴 말끔한 연두부 새끼가 걸치고 있어서 더 빛나 보였다.

‘가이드 전투복을 입히고서 해도 색다를 것 같은데. 하체가 분리되진 않나?’

평소에 통짜로 입고 벗긴 한다. 응급 상황을 대비한 상하 분리 장치가 있을 수도 있다. 보기보다 튼튼한 허리를 붙잡은 팔에 괜히 힘이 들어갔다.

-뇌파가 흐트러졌습니다. 집중하십시오.

안긴 놈이 기민하게 낌새를 알아챘다. 감정을 배제한 사무적인 어조마저 오늘따라 괜히 매력적이었다.

이대로 김윤조를 데리고 임의 이탈을 하는 방법도 있다.

만약 그랬다가는 연두부 새끼의 불꽃 주둥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청각이 지나치게 좋은 덕에 김윤조의 끊임없는 잔소리는 숫제 고문이었다.

당장 훈련 중에 별다른 짓을 할 생각은 없다.

“훈련 끝나고 보자.”

-…….

놈이 제 헬멧을 수혁의 헬멧에 툭 부딪혔다.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니 반투명한 헬멧 쉴드 건너편에 짜증스럽게 구겨진 얼굴이 보였다.

훈련 중에 무슨 지저분한 생각을 하는 거냐며 화를 내고 싶은 걸 간신히 참는 눈치였다. 비행 중임을 감안했다기보다는, 현재 최정을 비롯한 훈련 오퍼레이터들이 오픈 채널을 통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기 때문일 터.

둘이 있을 때는 겁대가리를 상실한 채로 수시로 다다다 쏘아붙이는 놈이 타인을 한껏 의식하고 얌전을 떠는 태도가 같잖으면서도 한편으로 귀여웠다.

‘다른 새끼들과는 되도록 내외하는 게 좋지.’

수혁의 입이 긴 호를 그렸다.

이번에는 게이트 발생으로 크게 피해를 입은 이후로, 군사 훈련지로 사용하는 소규모 시가지였다. 민간인은 당연히 떠난 지 오래였다. 평소 자주 이루어지던 시가전 훈련도 오늘은 없다.

-목표를 수색, 제거한다. 목표 개수는 불명. 위치도 불명.

최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색 제거하기는 개뿔.”

최정은 각개 격파를 유도하였으나 수혁은 그런 귀찮은 짓을 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반구형 폭파를 일으키면서 능력을 썼더니 성욕이 일었다. 충분히 참을 수 있는 아주 미세한 충동이었으나 굳이 참을 필요를 못 느꼈다.

훈련을 최대한 빨리 종료하고 귀가하고 싶었다. 물론 김윤조를 옆에 끼고.

“반경 5km 전부 진공 폭파한다.”

어차피 할 거, 화끈하게 힘을 쓰고 화끈하게 한 판 아니, 한 세 판 할 생각이었다.

-잠깐만요,

김윤조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러곤 반경 5km 이내 모든 구조물을 몽땅 무너뜨리려고 능력을 끌어올리는 수혁의 팔을 강하게 잡았다.

-이건 소령님 훈련이 아니라 제 훈련입니다. 망치지 마십시오.

“훈련 빨리 끝낼 수 있게 도와준다고.”

-이렇게 힘으로 밀어붙이기만 해선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제 가이드 시스템은 아주 아주 섬세하거든요. 저는 훈련 시나리오대로 모의 시가지 수색 완료하고 싶습니다.

상대는 ‘섬세’라는 말에 특히 강세를 주었다. 수혁의 행동을 무식하다고 비난하려는 목적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어느 새끼가 뭐라고 하든 수혁은 마음대로 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김윤조가 반대를 표명하자 이상하게도 고집을 부리기 힘들었다. 사실 강수혁에게 대놓고 맞서는 놈도 김윤조가 유일했다. 화가 날 법도 한데 도리어 끌어 올렸던 힘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수혁의 팔목을 강하게 잡았던 손이 풀어졌다.

-협조, 감사합니다.

무심하게 감사 인사를 한 김윤조는 진지한 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고맙다는 인사도 받고. 협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수혁은 놈의 손목을 슬그머니 잡았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상대는 왜 그러냐는 듯이 곁눈질을 흘끔 보기만 하고 손을 떨치지는 않았다. 이제 공개적으로 손목을 잡을 수 있는 사이가 된 것이다.

‘보고 있나, 임성준? 장세인? 너희 순번은 없어.’

수혁의 입꼬리가 둥그런 선을 그렸다.

싱글벙글하는 자신과 반대로 위성 AI와 교신하는 놈의 안면은 너무 기계 같았다. 집에서는 속옷도 제대로 챙겨 입을 줄을 모르는, 줄줄 새는 바가지가 작전 현장에서는 공사가 완벽하게 끝난 다목적 댐처럼 빈틈없었다.

사람 같지 않은 태도를 전에는 혐오스럽고 역겹게 여겼다. 이제는 작전에 열중하는 놈의 자세가 꽤 멋져 보였다. 군인답다고 해야 하나.

-맵핑 완료했습니다. 1시 방향부터 진입합니다.

“그래.”

대답하면서 수혁은 손목에 걸었던 손을 아래로 내려 손가락을 얽었다.

-손은 왜 잡으십니까?

“너 잃어버릴까 봐서.”

-진심이세요?

“응.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곳이잖아.”

수혁은 김윤조의 손을 꽉 잡았다.

“너는 내 곁에 딱 붙어 있어. 자칫하다가 귀한 두부 모서리 깨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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