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그랑주 포인트 (41)화 (41/256)

37화

엄밀히 말해 엇나간 관계의 시작은 강수혁이었다. 가이드 시스템을 단순히 거부하기만 해도 됐다. 무려 트리플 S급 아닌가. 그를 강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순하게 ‘NO’라는 한마디로 김윤조와의 페어링은 무산되었을 것이다.

군 상부는 강수혁이 순순히 가이드 시스템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예상했다. 혹시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1순위에 두었을 뿐, 사실상 성공적인 페어링은 2순위 후보였던 임성준, 혹은 3순위 장세인이 이룰 줄 알았다. 김윤조는 처음부터 최강인 강수혁을 원했지만.

하지만 강수혁은 말로 거절하는 대신에 폭력을 휘둘렀다. 윤조를 죽음 직전에 몰아넣었다. 그 때문에 생존 욕구에 반응한 AI가 긴급 프로토콜을 동원하여 강수혁을 강제로 동조시켰다.

정상적인 절차를 생략하고 둘이 가이드 시스템으로 강하게 묶인 원인은 결국 강수혁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정상인인 척 왜 가이드가 되었냐느니, 자기랑 이러는 게 좋냐느니 하는. 페어링을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전에 밟아야 하는 심리 검사 단계를 거론하냔 말이다.

미친 새끼가 멀쩡한 소를 패 죽여 놓고 외양간 주춧돌을 놓고 자빠졌다. 성질이 안 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제가 싫다고 하면 소령님이 저 안 건드릴 겁니까?”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되묻는 투가 유달리 까칠했다.

“아니, 그게.”

“그게 뭐요?”

코웃음과 함께 따지고 들었다.

“……네가 정말로 싫다고 한다면.”

그에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처음에는 망나니가 자신을 상대로 장난치나 했다.

“장난하지 마십시오. 재미 하나도 없습니다.”

“진짜야. 왜 이렇게 사람을 못 믿어.”

상대는 자못 진지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아주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믿을 근거가 있어야 믿죠. 여태껏 쌓아 온 악업이 몇 개인데. 소령님이 저 때려죽이려고 했던 건만 어디 보자…… 한나절 정리해서 등록 연락처로 보내 드릴게요.”

빈정거리자 강수혁의 눈빛이 자못 험악해졌다. 그는 윤조를 감싸던 손을 슬그머니 군복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슬슬 열받는다는 신호다.

처음부터 이렇게 나올 것이지. 강수혁은 분노하고 김윤조는 조롱한다. 아주 편안하고 일상적인 관계로 돌아왔다.

“오늘 아침 네가 내 말을 전혀 믿지 않고 화부터 냈을 때 말이야.”

하지만 이어지는 강수혁의 음성은 여전히 차분했다. 주머니에 있는 양손 외에는 어떤 분노의 징후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분노-반발-구타-패널티로 이어지는 과정을 무수히 반복한 만큼 매너리즘과도 같은 인내심이 쌓였으리라.

강수혁과 인간적인 교류를 전혀 하고 싶지 않은 윤조는 거기서 한 발짝 더 나갔다.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숙이고 들어온 사람을 상대로 이렇게 치사하게 나오실 겁니까?”

“너야말로 사람 말 좀 끝까지 들어. 성급하게 결론 내리지 좀 말고.”

이쪽을 타박하는 강수혁의 음성에 짜증이 깃들었다. 어디 무슨 개소리를 짖나 두고 보자 했다.

“예전 같으면 너 나한테 죽었어. 그런데 안 건드렸잖아. 근처 언덕이 좀 뭉그러지긴 했어도 다른 사람이 다치는 일도 없고.”

안 때리고 안 죽였다고 칭찬해 달라는 건가.

이게 사람이 할 말이야? 입으로 뀐다고 다 말은 아니랄 때는 언제고 강수혁 본인이 입으로 방귀를 북북 뀌고 있다.

“그래서요?”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고. 그게 가이드 시스템 때문이든 뭐든.”

변화를 어필하려고 그러는 모양이었다. 그래. 변하긴 했다. 하지만 순순히 칭찬하기에는 너무 열받는다.

“감탄했습니다. 장족의 발전이네요. 골절 상해를 관두시다니. 너무 고마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표창하라고 상부에 건의해야겠어요. ‘우리 부대 망나니가 여러 차례 뇌 튀김형을 겪은 끝에 드디어 인간 될 마음을 먹었다. 이에 표창한다.’ 이렇게요.”

제가 듣기에도 짜증 날 빈정거림에 망나니가 제 본 성질을 낼 때가 되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강수혁은 고집스럽게 침착함을 유지했다.

“왜 빈정거려. 백 프로 자의는 아니라도 어쨌거나 바뀌고 있잖아. 긍정적으로.”

“가이드 시스템이 굴복한 거긴 하지만. 네. 바뀌긴 했죠.”

“그러니까 너도 좀 바꾸라고.”

“제가요? 뭐를요.”

윤조는 저도 모르게 정색했다. 자신이 바꿀 게 뭐가 있나?

“그 태도 말이야.”

“태도요?”

“그래.”

이젠 어안이 벙벙했다. 태도가 뭐 어떻다고. 이 정도면 갖은 살해, 상해, 강간 피해자 치곤 너무 착하고 순순한 태도 아닌가.

“저더러 이 이상으로 얌전하고 착하게 굴라고요? 양심이 있으세요? 아니면 뇌를 너무 고문해서 지능에 영구 손상이 생겼어요? 아무리 그래도 저한테 바랄 걸 바라셔야죠. 소령님이 나한테 저지른 짓이 얼만데.”

“그런 말은 안 했어.”

강수혁의 대답이 어쩐지 의기소침했다. 안 어울리게 왜 이러실까. 망나니 양반.

“그럼 정확하게 무슨 태도인지 설명 좀 해 주시겠습니까?”

“너, 나를 너무 싫어해.”

뭐야. 윤조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당연한 소릴 하십니까. 소령님도 저 싫어하잖아요.”

“아닌데.”

괜히 시선을 피하던 강수혁이 갑자기 고개를 꼿꼿하게 들었다. 은은한 진줏빛이 감도는 눈동자가 윤조를 응시했다.

“아니라고요?”

“그래.”

“생면부지의 저를 죽이려고 들 때는 언제고요?”

“그때랑 지금이랑 같냐?”

“뭐가 그렇게 다른데요?”

윤조가 막 따질 때였다.

갑자기 강수혁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뭔가를 감지한 짐승처럼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윤조의 시선 또한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향했다. 한적한 산동네의 풍경은 아까와 똑같았다. 3초 가량 경계 태세를 유지하다가 긴장을 풀었다.

“누가 오는데.”

“누가 와요? 괜히 할 말 없으니까 딴소리하는 거죠? 갑자기 말 돌리지 마십시오.”

“정말 온다니까. 진짜 사람 말을 안 들어, 개새끼가.”

그러면서 강수혁은 창가로 다가가 창틀에 발을 하나 턱 걸쳤다. 멀쩡한 문을 놔두고 왜 저리 다니는 걸까. 하여간 별종이다.

날아가려다 말고 강수혁은 뒤를 휙 돌아봤다.

“너 빨리 바지 입어.”

“갑자기요?”

“빨리.”

바닥에 떨어져 있던 바지가 저절로 둥실 떴다. 덩달아 윤조의 몸도 부양했다. 강수혁의 짓이었다.

“내려놓으십시오.”

윤조의 말을 들은 위인이라면 애초에 능력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섬세한 조작 능력을 자랑하는 트리플 S급 에스퍼님답게 그는 손을 대지도 않고 바지를 윤조에게 입혔다. 얼마나 세게 끌어올리는지 가랑이에 바지 솔기가 꽉 꼈다.

“어디까지 끌어올릴 셈입니까?”

윤조가 바지를 밑으로 끌어당기면서 화를 내고서야 강수혁은 윤조는 바닥에 내려 두면서 바지에서도 능력을 거두었다. 하지만 오팔 빛이 감도는 눈빛은 여전히 매서웠다.

“팬티도 안 입고 문밖으로 한 발짝이라도 나오기만 해 봐라. 가만 안 둔다.”

“그렇게 협박 안 해도 안 나갑니다. 미친놈도 아니고.”

“네가 미친놈이니까 하는 말이야.”

창으로 날아간 강수혁의 모습은 금방 사라졌다.

“미친놈은 너지. 망나니 새끼야.”

사라진 방향을 향해 윤조는 쌍 중지를 날렸다. 그리고 당연한 듯이 현관으로 향했다. 애초에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

현관문의 고리가 뻥 뚫려 있었다. 도어록이 강제로 뜯겨나간 흔적이었다. 집주인이 카드키를 분실했거나 혹은 비밀번호를 까먹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애초에 창문으로 다니는 미친놈이기도 하고.

어쨌거나 잠기지 않았으므로 그저 슬쩍 밀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윤조는 힘차게 문을 밀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날아오는 인영을 발견했다. 한 발짝 내딛다가 반동을 이용해 그대로 몸을 180도 돌리는 동시에 밀친 문을 도로 닫았다.

마치 나가려고 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윤조는 거실 한중간에 섰다. 직후 강수혁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방금 문이 열린 것 같았는데.”

“착각입니다. 착각. 산바람 때문이겠죠.”

“그래?”

강수혁은 대형 플라스틱 박스를 하나 안고 있었다.

“네 물건.”

“아.”

누가 온다더니 헌병대였나 보다.

윤조는 건네받은 상자 속을 확인했다. 옷가지나 군용 물품은 중요하지 않다. 다른 물건은 없어져도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지만 한 가지는 불가능했다.

남의 물건이라도 정리도 없이 아무렇게나 담아 놓은 물건을 헤집다가 상자 구석에서 찾던 걸 발견했다.

이젠 모서리가 헤지려고 하는 손바닥 크기의 종이백. 그 안에 담긴 물건이 무사함을 확인한 후에야 윤조는 작게 안도했다. 종이백을 도로 상자에 두고 상자째로 안아 들었다.

“그게 뭔데?”

윤조를 지켜보던 강수혁이 물었다.

“남의 물건에 신경 끄십시오.”

“그 안에 팬티는 없냐?”

“아, 진짜 시도 때도 없이 변태 인증 좀 그만하세요. 무슨 남자가 다른 남자 빤스에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

윤조가 버럭 화를 냈다. 그러자 당황한 듯 머뭇거리던 강수혁이 이내 얼굴을 확 붉혔다.

“얼씨구?”

감탄사를 내뱉자 한 박자 늦게 강수혁이 고함쳤다.

“아니. 이 미친놈아! 노팬티로 설치지 말고 있으면 찾아 입으라고!”

“알아서 할게요.”

괜히 화를 내는 강수혁을 무시한 윤조는 계단 쪽으로 향했다.

“방은 2층에 있는 거 쓰면 되죠?”

“야! 내 집은 노팬티 금지야!”

“이젠 같이 사는 집이니까요. 반바지도 입었는데. 남자끼리 대충 삽시다.”

계단을 오르는 윤조의 등 뒤로 변태 놈이 쉬지도 않고 삿대질했다.

“야, 김윤조! 이 답도 팬티도 없는 노출증 새끼야!”

“본인이 사 줄 거 아니면 삽소리 금지.”

할 말을 잊은 수혁을 향해 윤조가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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