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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 (40)화 (40/256)

36화

생존을 위해 사회성을 발달시킨 보통의 인류와는 달리, 에스퍼들은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꼭 좁은 우리 안에 있는, 성질 더러운 맹수 무리 같다고나 할까. 신생 출현인 만큼 존재가 안정되지 않아서 그런 건지 뭔지. 짐승처럼 저들끼리 서열을 정리하느라 유혈 사태가 빈번했다. 박병관이 윤조에게 지저분한 시비를 걸던 것도 그와 일맥상통했다.

강수혁은 어떤 경우도 아니었다. 일반인과는 서로 소 닭 보듯 하는 사이고, 겨루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압도적인 화력을 보유하였기에 에스퍼 사이에서도 열외다. 좋게 말해 초월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왕따였다. 중립적으로 칭하자면 깍두기다. 치졸한 방식의 괴롭힘을 누구에게도 받아 본 일도 없고 또 할 일도 없다는 얘기였다.

강수혁이 사는 집 앞에 도착했을 때 김윤조는 그가 격노하여 윤조를 반쯤 죽이거나 지독하게 강간하거나 혹은 싸늘한 눈초리와 함께 아예 투명 인간 취급을 하며 은근히 목줄을 조일 줄 알았다.

차라리 척추를 똑 분질러 놓는 편이 강수혁답다. 화나서 산을 무너뜨린 주제에. 그래서 특작부 전체를 발칵 뒤집고도 모자라 그 바쁜 장 중장까지도 한달음에 달려오게 했으면서. 고작 하는 짓이 녹슨 농기구로 웃자란 풀이나 뜯으라고? 그걸 또 즐겁게 감상해?

‘세상에. 잔디깎이가 웬 말이냐고.’

유치하고 쪼잔하기가 트리플 S급이었다.

강수혁이라는 인간을 장르로 분류하자면 보통은 절망 가득한 아포칼립스, 꿈도 희망도 없는 SF, 혹은 괴수 공포물 그 자체이다. 굳이 좋게 분류해도 지구를 구한다는 핑계로 지구를 반쯤 태워 버리는 안티히어로물 정도?

‘그러니까 장르에 맞게 전쟁 범죄물로 가자고요. 왜 전원힐링물 같은 저언혀 안 어울리는 장르를 택하는지. 당하는 사람 혼란스럽게.’

덧붙여 로맨스물도 사양이다. 차라리 블랙코미디가 낫지. 그런데 미친 개새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할 거면 얼른 하지 왜 비비적대고 난리인지 모르겠다. 하기 싫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왜 냄새를 킁킁 맡고 할짝할짝 핥고 지랄이신지. 뭔 개도 아니고.

“저 방금 샤워하고 나왔습니다.”

“알아.”

“그렇게 코 박고 맡아도 정수리 냄새 안 난다고요. 두피 박박 문질러 씻었습니다.”

“제발 아가리 좀 싸물어. 이 무드 없는 새끼야.”

무, 뭐? 무드으?

윤조의 안구가 눈꺼풀을 비집고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더불어 귓구멍도 턱 막혔다. 충격에 목 근육이 뻣뻣하게 굳으면서 뇌로 향하는 동맥 순환에 차질이 생긴 덕분이었다.

‘내……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야?’

아가리를 싸물라는, 상대의 저급한 윽박지름이 아니라도 입이 저절로 턱 막혔다. 기도 꽉 막혔다. 코도 막히기 직전이다. 이러다가 피부로 호흡해야 할 듯하다.

원래 찢어지든 말든 그냥 엎어 놓고 박고 보는 게 위대하신 강수혁 아니었나? 한 번 할 때마다 남의 척추가 내려앉도록 거칠게 해댄 인간이. 뭐 무드으?

아! 장선욱 중장이 말하던 것이 혹시 이건가? 넘어갈 것 같다는 그 느낌이 윤조에게 넘어간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이성의 저편으로, 눈 뜨고 저세상으로 넘어간다는 신호였나? 그럴 가능성이 크다.

‘미, 미쳤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강 망나니가 완전히 돌아 버렸다. 568도쯤? 똑 떨어지지도 않는 더러운 각도로 돌았다.’

윤조의 전신이 뻣뻣하게 굳었다. 손짓 하나로 산사태를 일으키는 자연재해의 핵이 완전히 돌아버린 와중에 그와 포옹 중인데 안 굳을 수가 없다.

곰곰이 따져 보니 조금 전 스파크도 심상찮았다. 여차하면 아주 가루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느긋하게 만지는 손길로부터 공포가 번졌고, 피부를 달구는 뜨거운 숨으로부턴 소름이 돋았다.

윤조는 입을 꾹 다물고 강수혁이 하자는 대로 몸을 맡겼다. 하지만 몸은 계속 뻣뻣했고, 미친개가 이쪽의 긴장을 금방 감지했다.

“왜 이렇게 긴장해? 막상 하려니까 싫어?”

“아, 아니 그게 아니라……그게……어……저.”

솔직히 말해 할 마음이 방금 싹 가셨다. 그런데도 윤조는 뺄 수가 없다. 여기서 못하겠다고 했다가 돌아 버린 망나니 새끼가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이게 말도 더듬네.”

“어, 음.”

할 말이 없어서 윤조는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그걸 좋지 않게 해석한 상대가 눈살을 구겼다.

“정말 싫어?”

“아, 아뇨! 전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화들짝 놀란 윤조는 고개부터 휘저었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반쯤 마른 앞머리가 이마 옆을 철썩철썩 쳤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먼저 하자고 했는데요. 하하하하하하.”

“근데 반응이 왜 이렇게 수상해?”

침착해진 망나니는 쓸데없이 의심이 많았다.

“뭐가 이상해요. 같이 살게 되니까 뭔가 새삼스럽고 그래서 그런 거지.”

“그래? 그렇다면 그런 줄로 알지.”

돌아온 대답과 달리, 미친개의 눈빛에는 여전히 의심이 가득했다. 더불어 몸을 더듬던 손도 끈적함을 잃었다. 담백하게 등을 쓸더니 이제는 떨어져 나가려고 했다.

“못 참을 정도는 아니니 이참에 욕구 조절을 좀 해 보지 뭐. 너랑 매번 싸우기도 지겨우니까 말이야.”

아니. 저는 안 지칩니다. 싸웁시다. 그냥 화끈하게 박고 박히고 서로 중지 날리는 사이로 남자고요.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선생님. 무섭게 친절하고 다정하고 그런 거 하지 맙시다. 무섭습니다. 그냥 주어진 상황에 몸을 맡기고 짐승처럼 떡이나 치면서 깊은 생각 같은 건 하지 말자고요, 네?

코너에 몰린 윤조는 무의식적으로 상대의 허리를 꽉 잡았다.

“왜 이래?”

망나니가 제 허리를 단단히 붙잡은 윤조의 팔을 떼어 내려고 했다. 약간 힘만 줘도 뼈를 뚝 부러뜨리고도 남는 완력의 소유자이면서 이상하게 힘을 쓰지 못했다. 역시나 괜히 말로만 하기 싫다고 어쩌고 하면서 사실은 하고 싶은 거다.

덩달아 하체를 밀착하고 국부를 맞댔다. 잠잠한 윤조의 것과는 달리 망나니 쪽은 정말로 망나니답게 펄펄 살아 숨 쉬었다. 얼마나 우렁찬지 질긴 군복 바지를 뚫을 기세였다.

역시 답도 없는 짐승이 맞다. 그런 주제에 괜히 사양하고 지랄인지. 사람 심장 떨리게.

“저 풀베기는 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남자답게 그냥 한번 하고 화해합시다.”

“미친놈이. 입으로 뀐다고 다 말은 아니야.”

“왜요?”

“남자다울 거면 나한테 떡을 치자고 하지 말아야지. 이런 짓은 하기 싫다고 주먹이라도 휘두르든가. 이 앞뒤 안 맞는 개새끼야.”

“주먹 휘두르면 맞아는 주실 거고요?”

“아니.”

순간 윤조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이 유치한 망나니가 뭘 어쩌고 싶은지 갈피가 안 잡힌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러면서 왜 자꾸 싫어하라고 그러십니까? 당사자가 좋다잖아요. 소령님은 제가 싫어하고 막 거부하길 원하십니까? 전처럼 피 튀기게 싸우고 저 내장 다 터지고 소령님은 최상급 패널티 받고 24시간 동안 침을 질질 흘리면서 뒹구는 그림을 원하는 줄 몰랐습니다.”

“…….”

강수혁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분위기도 한층 가라앉았다.

‘이놈의 주둥이.’

윤조는 즉시 후회했다. 하지만 쏟아낸 말을 주워 담을 순 없지 않은가.

“너는 말이야. 김윤조.”

“네, 소령님.”

‘죄송합니다. 당장 대가리부터 박겠습니다.’라는 말이 윤조의 입 밖으로 튀어 나가기 직전이었다.

“도대체 가이드가 왜 된 거야?”

강수혁은 다시 엉뚱한 말을 꺼냈다.

“아까 말씀드렸습니다만.”

“아무렇게나 둘러댄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등신이지.”

“…….”

이번에는 윤조가 입을 다물었다. 강수혁의 미간은 아까보다 훨씬 딱딱해졌다.

“무슨 목적과 결심으로 가이드가 된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아. 실상 따지고 보면 내가 상관할 바도 아니긴 한데.”

상대방은 이상하게 침착한 어조로 나왔다.

“일방적으로 전혀 친분도 없었고 첫인상도 최악이었고. 평생 원수지간으로 여기고 틈만 나면 뒤통수에 총알을 먹이고 칼을 꽂으려 들어도 모자란 판에 도리어 매번 처맞고 매번 당하는 것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그게 아무리 가이드의 역할이라지만. 이런 걸 임무라고 받는 상황 자체가 허탈하고 괴로워야 정상이라고.”

아, 진짜. 이렇게 나오기야?

가이드가 된 이유? 차고 넘친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에서 시작하여 사회적인 이유를 더하고, 미시적인 상황과 거시적인 상황까지 두루 고려한 끝에 목숨 걸고 가이드가 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피눈물을 흘리게 했던 후회.

그것에 뒤따르는 맹세.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윤조는 목숨을 걸고 가이드 시스템이라는 도박에 임했다. 무수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강수혁의 분노라는 히든 스테이지까지 통과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김윤조에게는 강력한 동기가 있다. 가이드 시스템을 통해 트리플 S급 에스퍼를 완벽하게 조종하게 되는 순간 이루고 싶은 목적이, 지금도 가슴 속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누가 강수혁, 당신이랑 그런 얘기를 하고 싶다고 했냐고. 차라리 박병관을 붙잡고 한탄을 하지. 다른 누구도 아닌 강 망나니, 너와는 싫다고.

윤조의 낯 또한 덩달아 딱딱하게 굳었다.

“괴로워한다고 뭐가 달라지는데요?”

“뭐?”

“그러니까요. 소령님 말씀대로 제 처지를 비관하고 절망해서 뭘 어쩌냐고요. 그래서 뭐가 바뀌기라도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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