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그랑주 포인트 (39)화 (39/256)

35화

“한 번이라도 덜 하고 싶은 게 정상 아냐?”

“지금 누가 누구에게 정상을 논합니까? 내 말은…… 참았다가 나중에 몰아서 하고 그러면 더 힘들다는 얘깁니다.”

그러면서 놈은 아까부터 들고 있던 바지를 입지는 않고 손으로 구겼다. 눈알이 놈 기준 좌측 하향으로 기울어지는 걸 보니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희멀건 뺨이 점점 잘 익은 복숭아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저 새끼, 부끄러워할 줄도 아네.’

예상치 못한 모습에 수혁의 입 안이 바짝 말랐다. 가랑이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민망한 듯 시선을 피한 김윤조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요즘엔 덜 아파서 그럭저럭 할 만하기도 하고.”

“할…… 만해?”

대단히 좋은 평가라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당사자들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또한 가이드 시스템을 만든 장본인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으로 인해 양측 모두에게 일방적이면서 동시에 가학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관계의 근본을 생각할 때, ‘할 만하다’는 천지가 개벽할 수준의 변화였다.

가이드 시스템이 에스퍼인 수혁의 정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건 자명했다. 애초에 그러려고 만든 시스템이니. 수혁의 개인적 의견은 둘째 치고 시스템을 구축한 목적대로 잘 되고 있다.

그러나 가이드인 김윤조의 변화도 사전에 계산된 결과일까. 뇌에 칩을 덕지덕지 처바르고 AI의 보조를 받으며, 수시로 파괴와 재생을 거듭하는 사이에 미치기라도 한 걸까?

“너, 그거 위험한 발언인 건 알고 있지?”

“……예.”

점점 가관이었다. 수혁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스톡홀롬 증후군이면 아서라. 시발. 정서적으로 불안한 새끼의 알량한 동정심을 붙잡고 좆질 할 만큼 한심한 쓰레기는 아니니까.”

아니 하자고 달려들어도 모자라는 판에 수혁이 도리어 결정의 재고를 요구하고 있다니. 뭔가 잘못 돌아가는 중이다.

“말을 왜 그렇게 하십니까? 아니 누구는 시발,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요? 아침에 알아보지도 않고 멋대로 화내서 미안하니까 한 번 하고 시원하게 없는 일 치자는 거지. 군 전체 예산의 15퍼센트 이상이 들어간 최고급 자산을 상대로 쪼잔하게 풀베기가 뭐야, 풀베기가.”

미친 새끼가 이상한 포인트에서 화를 냈다.

“그럼 나한테 가랑이 벌리는 건 최고급 자산에게 어울리는 일이고?”

“아무래도 트리플 S급 에스퍼니까? 비싼 자산끼리의 도킹이니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습니다.”

“도…… 도킹?”

수혁은 숫제 말을 더듬었다.

놈은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이 빤히 이쪽을 봤다. 아까 잠시 보였던 인간적인 부끄러움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 두고 보면 볼수록 망할 가이드 시스템에 심각한 하자가 있어 보인다. 저 가이드의 뇌에 각종 칩을 이식하던 중에 분명히 뭘 잘못 건드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새끼가 이렇게 나올 리가 없다.

“미친놈.”

탄식하자 놈이 낯짝을 구겼다.

뭘 잘했다고. 여러 방면으로 황당무계한 새끼.

뒤이어 퉁명스러운 질문이 날아들었다.

“그래서 안 할 겁니까? 바지, 지금 입을까요?”

얼토당토않은 최후의 통첩이 내려지자 수혁의 고민은 단박에 날아갔다.

“아니.”

대답과 동시에 김윤조의 손에 들린 바지부터 패대기쳤다. 예보 없이 거리를 좁힐 때마다 놈의 동공이 급격하게 커졌다. 새카만 점이 점점 확대되면서 그 안에 수혁 자신이 비쳤다. 제가 보기에도 흥분과 욕망이 철철 넘치는 상판을 하고 있었다.

수혁은 오감이 일반인보다 대단히 뛰어났다. 후각도 워낙 예민하기에 화학 성분을 최대한 배제한, 순수한 형태의 비누를 선호했다. 샴푸도, 린스도 없다. 오로지 비누뿐. 갓 씻은 놈에게선 제 내음이나 다름없는 비누 냄새와 깨끗한 살냄새가 동시에 났다. 아주 맛있는 냄새.

침샘이 열렬하게 일하기 시작했다. 황당함에 열을 내느라 말랐던 입 안이 금세 축축해졌다.

팔을 뻗어 얇은 티셔츠만 걸친 몸을 느긋하게 휘어잡았다. 먼저 하자고 달려든 놈답게 저항 없이 끌려왔다. 뻣뻣한 군복 바지 위로 탄력적인 허벅다리가 붙었다. 시커먼 속과 다르게 말랑말랑한 얼굴을 노려보면서 허리를 휘어잡았다.

손을 내려 놈의 엉덩이를 만졌다. 속옷도 없이 티셔츠만 달랑 입은 터라 감촉이 더 생생했다. 아까 놈이 말한 대로 할 것 다 하고 볼 장 다 본 사이인데. 만지면 만질수록, 느끼면 느낄수록 새롭고 궁금했다. 해괴한 일이었다.

“후우.”

이죽대는 입술 사이로 더운 한숨이 샜다.

목에서 힘을 빼자 수혁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앞으로 기울었다. 정수리까지 모자라는 머리 부분에 코끝이 닿았다. 내쉰 숨을 채우기 위해 들이마신 공기 속에 부드러운 살냄새가 섞였다. 그것은 수혁의 비강 깊숙이 들어와 후각 세포를 자극했다.

까만 머리카락이 수혁의 뺨을 지나 턱까지 내려갔다. 수혁의 한쪽 어깨에 이마를 기댄 놈이 양손을 꼼지락댔다. 허리에 두르는가 싶었다. 내심 그러기를 바랐다. 하지만 갈피를 못 잡던 놈의 손은 이내 가지런하게 아래로 떨어졌다.

이상하게 명치가 꼬였다. 성감이 올랐나?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살짝 떨어진 쪽에 가까웠다.

이건 실망감이다. 허리 좀 안 붙잡는다고 낙심할 것까진 없잖아. 멍청이처럼 일일이 휘둘리는 걸, 놈은 알까? 아니다. 도리어 알까 봐서 무섭다.

“시발.”

괜히 욕이 튀어나왔다.

이런 상황이 싫다. 수혁은 망할 놈을 밀쳐내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놈의 엉덩이 위를 배회하던 손을 내려 티셔츠 자락을 들었다. 찬물 샤워를 한 건지, 손바닥에 닿은 피부가 시원했다. 살살 건드리다가 이내 움켜잡았다. 쫀득한 탄력이 중독적이었다.

가만히 안겨 있던 놈이 갑자기 어깨를 움찔 떨었다. 꾸물거리더니 수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기.”

숨이 많이 섞인 음성이 수혁의 고막을 간지럽혔다. 고막의 옅은 떨림은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음파에 자극받아 발생한 미약한 전기 신호가 청신경을 타고 가 뇌 속에서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전신의 신경이 짜르르 떨렸다. 손끝과 발끝이 자글자글했다. 말단에서 일어난 반동은 이내 국부에 쏠렸다. 그렇지 않아도 단단하던 성기가 단숨에 벌떡 일어났다.

수혁은 저도 모르게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대답은 숨을 고른 후에야 간신히 나왔다.

“……왜?”

“능력 활성 상태 아니죠?”

“왜?”

“손이 너무 뜨거워서 말입니다. 그리고 거기 상태도 지금 좀…… 심각한데요?”

“네가 차가운 거고. 내 거기 상태의 원인은 전적으로 너야.”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네요.”

몸을 밀착한 채로 일어선 성기의 선단을 놈의 앞섶에 문질렀다. 수혁이 느끼는 만큼 놈도 야릇한 자극을 받았는지, 상대의 등이 뻣뻣해졌다.

격렬한 관계도 좋지만,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 누군가를 이렇게 만지는 일은 좀처럼 없으니까. 사실상 김윤조라는 가이드가 생기기 전까지, 수혁은 소위 말하는 정겨운 살붙이가 없었다.

‘정겨운 살붙이라.’

김윤조라는 존재는 수혁에게 낯선 개념을 선사했다.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한 번도 접한 적이 없고 접해 볼 마음도 없었던, 추상적이면서 아득한 타인의 이야기를. 아이가 무심결에 돌멩이를 던지듯, 김윤조는 치밀한 계획 없이 아무렇게나 수혁을 향해 그 새로운 관념을 무심하게 던졌다.

이렇다 할 가족도 없고, 형제 같은 끈끈한 전우도 없는 수혁에게 김윤조야말로 미지의 세상에서 게이트를 열고 나타난 신비한 외계인이었다.

끌어안고 살을 만지고 냄새를 맡으며 달아오른 열감을 즐기고 있을 때, 할 말이 없다는 놈이 또 망할 주둥이를 놀렸다.

“계속 이러고 있을 겁니까? 아니면 침대도 제가 찾아야 합니까?”

손에 잡힌 게 돌멩이였으면 삐끗하다가 폭발시킬 뻔했다. 실제로 상대의 허리에 두른 손끝에 스파크가 튀었는지 안긴 몸이 갓 잡은 잉어처럼 펄떡 튀었다.

“앗. 따가워!”

“이것도 네 잘못이야. 가만히 있어도 폭발하기 직전이니까 제발 입 좀 다물어.”

“……예.”

기어이 따끔한 맛을 보고서야 놈은 입을 다물었다.

‘왜 이렇게 뜸을 들여.’

윤조는 따가운 허리께를 문지르며 불평했다.

“밀당을 해 봐.”

“강수혁이 그놈이 김 준위한테 넘어갈 것 같으니까 말이야.”

장 중장이 한 토 나오는 명령이 다시 리바이벌되었다. 하지만 윤조가 육탄 전술을 택한 건 장 중장의 명령 때문만은 아니었다.

윤조는 게이트 출현에 항상 긴장하고 있는 특수작전부대 소속이다. 전쟁 중에 다른 병사를 사소한 이유로 괴롭히는 일은 금물이다. 군법을 떠나서 군 생활에 불이익이 크다.

실탄 접근이 쉬울뿐더러 괜한 일로 악감정이 쌓인 관계가 많아지면 작전 중 결정적 상황에서 뒤통수에 아군의 총을 맞을 수 있다. 시체는 슬라임에게 던져 주면 녹아 버리니 유야무야 넘어가기도 쉽고. 그래서 병사들 사이에서도 웬만해선 서로 건드리지 않는 분위기였다.

물론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재수 없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에스퍼는 제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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