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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 (38)화 (38/256)

34화

못 들은 척 수혁은 바로 지하 식품관으로 내려가 필요한 물건을 멋대로 꺼냈다.

카트를 끌거나 물건을 집기 위해 손을 쓸 필요가 없다. 그저 눈길만 주어도, 혹은 애용하는 물건은 이미 위치를 파악하고 있기에 의식을 하는 것만으로도 물건이 알아서 수혁의 주변으로 우르르 날아왔다.

부대 내에서 능력 사용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질서 유지가 우선 목적이며, 또 에스퍼에게 사회성을 기르기 위해, 혹은 일반인의 삶을 경험시키기 위해 그렇게 정했다.

그러나 강수혁만은 예외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수혁은 그러고 싶었고, 또 헌병대를 비롯한 특작부의 군 감찰 기관은 수혁의 결정을 무마할 효과적인 수단이 없다. 그런 연유로 강수혁의 편안한 쇼핑 습관은 십 년째 이어졌다.

필요한 물건을 고른 수혁은 아까 날아왔던 방식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김윤조는 여전히 샤워 중이었다. 시간을 보니 놈이 욕실로 들어간 지 벌써 10분이 지났다.

남자 샤워는 5분 컷, 그중에서도 군인은 3분 컷이 기본 아닌가?

“피부도 약한 주제에. 무슨 샤워를 10분 넘게 해. 비누 안 써도 냄새도 안 나게 생긴 놈이.”

땀 냄새가 그렇게 불쾌하진 않았는데. 비누 냄새도 좋지만. 탁 까놓자면 옅은 땀 냄새가 더 섹시하달까……까지 떠올린 수혁은 즉시 제 뺨을 한 대 쳤다.

철썩.

트리플 S급으로서, 군부에 의해 양육된 에스퍼로서, 썩은 엿 같은 삶을 살아오면서 자해에는 일가견이 있는지라 타격감이 제법 있었다.

하지만 더 제법인 건 재생력이었다. 죽여도 죽지 않는 바퀴벌레 같은 재생력 덕분에 남들이면 턱이 박살 났을 타격에도 살짝 욱씬거리고 말았다. 심지어 고통은 0.5초도 지속하지 않았다.

연거푸 세 번 더 쳤다. 그러고 나자 등신 같은 뇌가 메스꺼운 발상을 지웠다.

“정신 차려, 미친 새끼야. 땀 냄새가 불쾌하지 왜 안 불쾌해?”

자신을 향한 깊은 혐오감이 물씬 솟았다. 수치스럽다. 어마어마한 방사능과 열을 발산하는 게이트를 코앞에 두고서도 땀 한 방울 안 흘리던 얼굴 가죽이 화끈거렸다.

“개새끼가 될지언정 답 없는 변태 새끼는 되지 말자. 왜 그런 망상을 해? 응?”

자아비판 모드가 된 수혁은 깊은 수치감을 감당하지 못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평소처럼 능력을 사용하는 대신 손으로 일일이 물건을 냉장고에 속에 정리했다.

탁.

냉장고 문을 거칠게 닫았다가 벌컥 열었다. 두유까지 다 넣은 탓이었다.

두유만 다시 꺼내다가 멈칫했다.

“아니 나오면 알아서 꺼내 먹으라고 하면 되지. 뭘 대령까지.”

수혁은 금세 후회하면서 다시 냉장고를 열고 그 안에 두유를 던져 넣었다. 보지도 않고 냉장고 문을 밀어 버리면서 몸을 돌렸다. 무심코 바라본 주방 입구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놈이 있었다.

“헉!”

예상하지 못한 조우에 기겁한 나머지 수혁은 곁에 있던 식탁을 건드렸다. 제멋대로 튀어 나간 능력이 식탁을 가격했다.

꽈당.

정확하게 반이 갈라진 식탁이 양옆으로 자빠졌다. 그 광경을 부순 당사자인 수혁, 그리고 목에 수건만 척 걸친 노출증 환자가 지켜봤다.

“멀쩡한 식탁은 왜 부수고 그러세요? 저게 다 자원 낭비입니다. 게이트가 발생하고 외계 괴물이 쳐들어오면서 지구 자원은 아주 급격하게 고갈되고 있어요. 하나라도 아껴야죠. 다 같이 사는 지군데.”

“아니 시발. 너는 왜 이 대낮에 홀딱 벗고 설쳐? 다 같이 사는 지구를 위해서 무슨 빤스까지 안 입고 다니냐? 이 정신 나간 놈아?”

수혁은 고개를 홱 돌렸다. 갑자기 목과 턱 언저리에 열이 훅 끼쳤다. 맥박이 평소보다 속도를 살짝 더했다.

“빨리 빤스 껴입으라고. 개새끼야. 어디서 덜렁거리고 있어.”

“같은 남자끼리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요.”

“아니 같은 남자라도. 그전에 같은 남자니까 보기 싫은 건 생각 안 해?”

수혁은 괜한 소리를 늘어놨다. 그러자 저 수치를 모르는 연두부 새끼가 계속 나불댔다. 수건으로 가랑이나 가리지. 아니 젖꼭지부터 가려 줬으면.

“상처 주네. 할 것도 다 한 사이에 호들갑 떨 필요 없잖아요.”

“아직 훤한 낮이야.”

“낮에는 뭐 안 했나. 처음부터 다른 사람 있는 데서 달려들어 놓고는. 갑자기 왜 내외하세요? 변태답지 않게.”

수혁의 바지춤이 뻐근해졌다. 미친.

“일부러 거칠게 대한 것도 아닌데, 툭하면 어디 고장 나고 나자빠지는 주제에 자꾸 이렇게 사람을 자극하지? 곱게 대해 줘도 무턱대고 변태 어쩌고 하면서 지랄 발광하질 않나. 인간답게 대해 주면 정도를 모르고 설치지 않나. 시발, 어디 그래 발가벗고 다녀 봐. 옷 벗길 필요도 없이 필요할 때마다 잡아서 박으면 나는 뭐 좋지.”

험악한 욕지거리를 듣고서야 얄팍한 입이 다물렸다. 보란 듯이 양다리 쩍 벌리고 서서 머리만 닦던 녀석이 수건을 슬그머니 허리 아래로 내렸다.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요. 티셔츠랑 운동복 바지 좀 빌려주세요.”

“그런 건 벗기 전에 미리 좀 얘기해!”

수혁은 미간을 구기면서 손을 휘둘렀다.

욕실에 차곡차곡 개어 놓은 수건이 우르르 날아와서 허연 나체에 후루룩 감겼다. 목에서부터 발목까지. 모든 드러난 살을 수건으로 다 가렸다.

“옷을 달라니까요. 불편하게 이게 뭡니까. 무슨 미라도 아니고.”

벗고 설친 놈이 뭘 잘했다고 덩달아 성질을 냈다.

“알아서 찾아 입어.”

“이 꼴로요? 강시처럼 뛸까요?”

또라이 놈이 온갖 주접을 다 떨고 있다. 수혁은 어이가 없어서 놈을 멍하게 봤다.

쿵. 쿵.

놈은 보란 듯이 양발을 모아 뛰었다. 제자리멀리뛰기 자세를 잡기 위해 엉덩이를 뒤로 불쑥 내밀 때면 수건 틈이 갈라져 토실토실한 궁둥이가 볼록 튀어나왔다.

옷방을 찾겠다고 폴짝폴짝 뛰는 놈을 보고 머리가 멍해졌다.

외계 괴물보다 저것이 더한 미지였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걸까. 가이드로 만들면서 인간의 일반적 사고방식을 아득히 벗어난 뭔가를 만들어 낸 게 아닐까. 혹은 보조를 담당하는 AI 프로그램을 개그맨이 짠 걸까. 과연 원래부터 군인이긴 한 걸까.

어쨌든 저거랑 진지하게 다투는 사람이 등신인 건 분명했다.

“기다려.”

모든 전의를 상실한 수혁은 순순히 위층 옷방으로 올라갔다. 놈의 연약한 피부를 생각해서 서너 번 입어 부드러워진 티셔츠에 실내용 반바지를 골랐다. 거실로 다시 내려온 수혁은 옷 뭉치를 놈의 면상에 휙 던졌다.

“얼른 처입어.”

“감사합니다.

또, 또!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 놈을 한 대 치지 않으면 화병에 걸릴 것 같았다. 주먹을 꾹 쥐고 돌아선 순간, 놈이 수건을 툭 던졌다.

”그런데 어차피 줄 거 곱게 주면 되지, 왜 화를 내고 그러십니까. 피곤하게.”

수혁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주먹은 허벅지 옆에서 얌전히 떨고만 있었다. 타이밍 노려서 수건을 버린 게 분명했다. 개새끼.

“가이드 시스템이 나한테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가장 잘 알고 있는 놈이 왜 그래? 가만히 있어도 신경 쓰이는데 벗고 설치면 어떻겠어? 재생 끝난 지 하루도 안 되었다 어쩌고 하면서 손도 못 대게 할 거면서.”

사실은 못 박게 해도 강제로 엎어 놓고 박을까 살짝 고민 중이었다. 하지만 인큐베이터가 고장이 났다고 하니. 또 힘 조절에 실패해 허리가 나가기라도 하면?

적어도 반나절 이상은 놈이 끙끙 앓는 광경을 봐야 하는데 그건 극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해서 싫다. 재생 지연에 따른 패널티도 물론 사양이었다.

“아, 신경 쓰이셨구나.”

놈이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척하기는. 얄미운 새끼.’

수혁은 그쪽을 보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식탁에 집중했다. 능력으로 이미 망가진 식탁을 들어 맞추긴 했으나 접착시킬 방도가 없었다. 부술 줄은 알아도 수리할 줄은 모르는 탓이었다.

티셔츠 소매에 양팔을 끼워 넣고 티셔츠 자락을 내리던 김윤조가 갑자기 물었다.

“그런데 누가 그래요?”

“뭘?”

옷을 다 입고도 남을 시점이기에 수혁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김윤조 새끼는 위에만 티셔츠를 입었을 뿐, 바지는 손에 들고 있었다. 쭉 뻗은 맨다리에 저절로 눈이 갔다.

그때 놈이 의아한 듯 고개를 살짝 기울었다.

“못 박게 할 거라고 누가 그랬냐고요.”

24시간 같은 3초가 지나는 동안 수혁는 그저 눈만 두 번 깜빡였다. 저 새끼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스턴 걸렸던 뇌가 뒤늦게 천천히 내용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박지 못하게 누가 시켰냐고? 지금 그게 할 말인가?

“……넌 뭐 먹고 그렇게 간땡이가 부었어?”

“뜨신 밥 먹고요.”

긴장감이 전혀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황당했다.

수혁이 기억하기로는, 김윤조는 ‘페어 에스퍼의 능력 발휘 후 신체적 긴장 완화를 위한 후처리’라는 공식 명명 아래 쉽게 ‘위계질서에 의한 성폭행’이라고 부르는 행위를 지독히 혐오했다.

솔직히 그런 욕구를 느낀 수혁 본인도 가이드를 향한 성적 충동이 가져온 충격에서 헤어나기 쉽지 않았다.

쉬운 게 뭔가? 벗어난 적도 없다. 여러 번 행위를 반복하면서 지속적으로 신체적 긴장을 누그러뜨려서 참을 여유가 있는 거다.

몸을 겹치면 겹칠수록 관계에 대한 의존도가 커졌다. 그건 수혁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처음에는 지칠 만큼 능력을 쓴 후에 김윤조를 향한 욕구불만이 생겼다. 강도는 무척이나 강했고 김윤조는 그런 수혁의 욕구를 받아내느라 말 그대로 넝마가 되었다.

지금은 이전과 비교해서 가벼운 부상으로 그칠 정도로 성적 충동의 강도 자체는 약해졌으나 대신에 그만큼 빈도가 잦아졌다. 무슨 파블로프의 개라도 된 건지 이젠 김윤조의 맨살을 보기만 해도 은근히 힘이 몰린다.

그런데 김윤조 새끼가 도움이 안 된다. 수혁에게 다리 벌리기 누구보다 싫어했던 주제에 갑자기 누가 못 박게 했냐며 따지고 든다.

“너, 박히는 게 좋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놈이 떨떠름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누가 박히는 게 좋댔습니까? 하고 싶으면 굳이 참지 말고 하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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