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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 (36)화 (36/256)

32화

“어?”

등의 가려움이고 뭐고 강수혁은 즉시 정원으로 이동했다.

수혁이 준 낫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옆에는 벗어 놓은 군복 상의도 있었다. 하지만 군복 주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수혁은 아까 김윤조가 그랬던 것과 똑같이 사방을 둘러봤다.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황당함과 분노가 머리꼭지를 두드리기 직전, 주택 안에서 뭐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덜컹.

수혁은 즉시 주택 안으로 들어갔다. 장성급 공관으로 사용하던 주택인 만큼 현관도 넓고 거실도 넓었다. 그러나 김윤조를 찾는 일은 쉬웠다. 그는 통로만으로 이어진 주방에 있었다.

이마를 막 훔친 김윤조는 냉장고에 있던 물통을 꺼낸 참이었다. 수혁의 모습을 보고서도 아무렇지도 따른 물을 마셨다. 시원하게 한 잔 비운 놈은 멀뚱히 선 수혁에게 빈 잔을 내밀었다.

“소령님도 물 드릴까요?”

도망이나 납치가 아니어서 내심 안심했다. 뒤이어 불쾌감이 들었다.

‘이 새끼가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잠시 안 보인 것뿐인데 식겁해서 찾아 대다니.’

강수혁은 제풀에 놀란 덕에 더욱 짜증이 솟구쳤다. 원래부터 살가운 말씨와는 거리가 있었으나, 지금은 유독 냉랭하게 튀어 나갔다.

“이 새끼가 시킨 일을 다 하지도 않고 물이나 처먹고 있네. 완전 빠져 가지고.”

“휴식 시간입니다. 휴식 시간.”

물잔을 내려놓은 김윤조가 뻔뻔하게 대답했다.

“누가 멋대로 휴식하래?”

“군인 복지법에 정해져 있습니다. 1시간 노동 5분 휴식.”

너무 당당하게 나와서 저도 모르게 넘어갈 뻔했다.

“그래?……는 무슨! 1시간 안 지났잖아, 새끼야. 10분도 안 되었어.”

수혁이 눈을 부라리자 연두부 새끼가 가증스럽게 웃었다.

“체감 1시간이었습니다.”

“사람을 아주 물로 보내, 이 빌어먹을 새끼가.”

멱살을 잡으려다가 실패했다. 검은 쫄쫄이가 손끝에 안 걸리기도 했고 또 망할 새끼가 참기름 두른 두부처럼 미끄덩하게 빠져나갔다. 수혁의 손은 어정쩡하게 공중만을 휘저었다.

그걸 본 놈이 설핏 웃었다. 이 얄미운 새끼.

수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자 하얀 낯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주먹을 날릴까 말까. 잠시 망설이는 사이 놈이 황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늘이 없어서 너무 더워서 그랬습니다.”

“뭐가 더워?”

“에스퍼인 소령님은 잘 모르겠지만, 금방 재생을 끝낸 연약한 저에겐 레이저로 직접 지져지는 수준의 햇빛입니다. 이거 보십시오, 10분 사이에 얼굴이 익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놈이 제 뺨을 살짝 내밀었다. 하얀 낯짝에 어째 옅은 홍기가 돌긴 했다.

“얼굴도 뜨겁고. 이러다가 일사병 걸리면 어떻게 합니까? 아직 인큐베이터 다 고치지도 못했는데.”

또, 또.

툭하면 인큐베이터 핑계를 댄다. 잠금장치 좀 고장 냈다고 십 년은 더 우려먹을 기세다.

앞으로 수족관 두 번 다시 건드리나 봐라. 안에서 발작해서 양수에 제풀에 익사하든지 말든지 신경 안 쓰리라.

수혁이 속으로 다짐을 두 번, 세 번 하는 사이, 김윤조가 괜히 손바닥 부채질을 했다.

“아아~ 덥다 더워. 진짜 찜통이네.”

실내라서 햇빛도 들어오지 않고 선선한 산바람도 부는데 놈은 마치 벗고 없는 상의 깃을 잡고 펄럭펄럭 터는 시늉까지 했다.

‘하. 이것 봐라. 요게 진짜 사람을 호구로 아나.’

너무 하찮고 뻔한 짓을 하니까 도리어 헛웃음이 터졌다.

빌어먹게도. 저 새끼가 하는 짓이 깜찍하긴 했다.

놀아나는 자신에게 짜증이 솟구치는 한편 은근히 즐거웠다. 이런 감정이 드는 자체가 가이드 시스템 때문이라는 점이 몹시 열받지만.

인류가 발명한 그 어떤 마약보다 강력한 진통 효과와 안정 효과를 가져오는 호르몬인 아드레날린과 세로토닌에 대한 저항력은, 트리플 S급을 자랑하면서도 애석하게 갖추지 못했다.

안면 근육이 움찔움찔 풀리려고 들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목구멍으로 밀어 넣은 후, 강수혁은 천진난만한 척하는 가증스러운 여우 새끼에게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주방 가까이에 메인 욕실이 있었다. 거기서 넉넉한 크기를 자랑하는 수건을 한 장 꺼내 왔다.

“뒤돌아 서.”

“예?”

의도를 알아듣지 못한 놈의 머리 위로 검지를 빙글빙글 돌리며 돌아서라고 재차 요구했다. 그러자 놈이 미적미적 돌아섰다.

수건을 탈탈 털어 돌아선 놈의 머리에 얹었다. 그러곤 양쪽 끝을 모아 목 뒷덜미 위에서 매듭을 지었다.

“자, 됐지?”

농번기 논밭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할머니들 사이에 앉혀 놓으면 웬만한 사람은 구별할 수 없을, 완벽한 스타일링이었다.

수건으로 만든 쓰개 아래 그늘진 얼굴이 보였다. 가이드님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서 씰룩거렸다. 가증스러운 연기를 천연덕스럽게 잘도 해내는 총총한 두 눈에선 무언의 쌍욕이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수혁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도 모자라 자기 차례를 맞은 골프 선수가 공을 가져다 두는 것처럼, 염력으로 놈을 가뿐히 들어 아까 있던 그 자리에 가져다 뒀다. 기왕 친절한 김에 낫까지 손수 들어 아까처럼 손에 쥐여 주었다.

“이제 일이 잘되겠다. 그렇지? 김윤조?”

“예에에에.”

놈의 대답이 엿가락처럼 쭉쭉 늘어졌다. 모르긴 몰라도 내심 엄청나게 욕을 퍼부을 거다. 하지만 뭐 안 들리니 신경 쓸 거 없다.

수혁은 염력으로 3인용 소파를 끌어와 창가에 놓았다. 아까 옥상에서 그랬던 것처럼 느긋하게 누워서 창밖을 내다봤다.

뒤를 흘끔 살핀 놈과 눈이 마주쳤다. 수혁은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수건 쓰개 아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쭈그려 앉은 다시 낫질을 시작했다. 뻔히 보고 있는 걸 알면서 구시렁거렸다. 혹은 보고 있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러는 건지도 모른다.

“낫도 거지 같은 걸 줘 가지고. 날이 잘 드는 걸 줘도 모자라는 마당에. 아니 소령 월급이 적나? 에스퍼 등급 수당도 상당할 텐데. 예초기라도 하나 사지. 병사들 불러서 시켜도 되잖아. 어차피 성질 더럽다고 온 부대에 소문도 났는데.”

하여간 시끄러운 놈이었다. 수혁의 입꼬리가 계속 올라갔다.

“그래서 아주아주 비싼 인공지능 예초기 쓰고 있잖아.”

“아, 예. 사람을 예초기 취급하고 멋지십니다.”

“그거 끝나면 식기세척기도 되어야 하니까. 얼른 해라.”

“아, 정말!”

제대로 열 받은 김윤조가 뒤를 홱 돌아봤다.

“용서받겠다며? 너한텐 내 용서가 쉽냐?”

“…….”

할 말을 잃은 놈은 거친 손길로 잔디만 쥐어뜯었다.

김윤조와의 거리는 일반인도 정면에서 본다면 표정은 분간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독수리와 맞먹는 시력을 가진 수혁에게는 표정과 움직임뿐만 아니라 김윤조가 입은 검은 내피 아래 있는 근육의 섬세한 움직임까지 10X 줌인으로 보였다.

검은 쫄쫄이 덕분에 유달리 말라 보이긴 해도 볼품이 없진 않다. 모델 체형이랄까. 딱 보기 좋다. 딴에는 군인 출신이라고 등 근육도 제법 있다.

산바람이 부는 지역이라도 땡볕에서 몸을 움직이다 보면 덥다. 수건을 쓰고 있어도 땀이 나는지 김윤조는 손등으로 이마를 쓸었다.

지켜보다 보니 괜히 입이 들썩거렸다. 눈앞에서 빨빨거리는 희고 검은 강아지에 괜히 손을 대는 심정이랄까.

“낫질 잘하네.”

툭 던진 말에 김윤조는 이쪽을 돌아봤다. 먹물색 눈에 분기(憤氣)가 가득했다. 수혁은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상대의 얼굴이 한층 일그러졌다.

“하다못해 목장갑이라도 주시죠. 손에 물집 생기겠습니다.”

“물집? 그런 게 왜 생겨?”

수혁은 말도 안 되는 항의에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김윤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맨손으로 낫질을 하니까 생기겠죠?”

“네가 무슨 애냐? 총도 잡는 군인이 손에 물집이 왜 생겨? 네가 아무리 연두부라도 그 말에 넘어갈 것 같냐?”

넘어갈 생각이 없는데도 김윤조는 포기하지 않았다.

“총질할 땐 장갑을 끼고요. 또 낫질은 총질이랑 다르죠. 해 보셨으면 알 거 아닙니까?”

“안 해 봤는데.”

정말로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렇게 대답했다. 조롱이 아닌 진심임을 눈치챈 김윤조는 잠시 멈칫했다.

“설마요. 그럼 곡괭이 질은요? 아니 그 전에 군인이니까 삽질은 해 보셨겠죠?”

따지고 드는 놈의 어투에는 꼭 그래야만 한다는 절실함마저 있었다. 삽질이 무슨 대수라고 대단한 하자라도 찾은 듯이 저러는지 참.

“전혀?”

“…….”

순간 상대는 할 말을 잃은 듯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왜요?”

“내가 왜 해야 하는데?”

“군인이니까?”

삽질을 안 한 것이 그렇게 이상한가.

“군법에 삽질 필수라는 항목도 있나?”

“장난치지 말고요. 진짜 안 해 본 건 아니죠?”

김윤조는 도통 믿을 기세가 아니었다.

“이게 속고만 살았나. 정말 안 해 봤다니까.”

“어떻게 안 했을 수가 있죠? 군인이 되면 무조건 신병 훈련을 받고 자대 배치 후에 온갖 잡일은 다 하면서 풀 깎아 시야 확보하고 산 깎아 진지 구축하고 도랑 파서 참호 짓고 삽질은 필수인데?”

“그러니까 일반인이나 능력 딸리는 등신 에스퍼 새끼나 하는 걸 나, 강수혁이 왜 하냐고.”

수혁은 코웃음을 치며 눈을 느긋하게 깜빡였다.

그제야 말귀를 알아들은 김윤조가 입을 합 다물었다. 그러곤 뭔가 대단히 부당하다는 듯이 수혁을 응시했다. 억울하면 에스퍼로 태어나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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