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그게…….”
아니라고 사실을 밝히는 편이 좋을 거다. 나중에 따로 알아냈을 때 이 망나니가 또 무슨 지랄을 할지. 이 동네에도 산이 많다. 아주 많다.
“기특하네.”
대답 못 하는 사이에 강수혁이 알아서 결론을 내렸다. 흐뭇한 표정에 딱 한 대 치고 싶게 만들었다.
“이게 기……특한 겁니까?”
떨떠름함을 숨기지 못한 채 윤조는 ‘기특’이라는 소름 돋는 표현을 쓴 이유를 에둘러 물었다.
“콧대 높은 가이드님께서 자발적으로 내 따가리를 하겠다고 집까지 기어들어 왔는데 기특하지.”
해결책 발견으로 인한 기쁨이 일시에 증발하였다. 대신에 대량의 엿을 먹이겠다는 상대의 선전포고에 이젠 기분이 젖은 쓰레기처럼 우글쭈글해졌다.
‘이런 삼대가 빌어먹을 개새끼가. 하여간 잘해 주고 싶어도 잘해 주기 싫게 만들기는 선수야. 따까리 하는 김에 그냥 철 수세미로 벅벅 닦아 주마.’
속으로 쌍욕 날리면서도 윤조는 어떤 나쁜 생각도 하지 않은 것처럼 명랑하게 대답했다.
“네, 무엇이든 시켜 주십시오.”
그러자 도리어 강수혁이 의심했다.
“이거 장난이면 너, 진짜 죽는다.”
“속고만 사셨습니까? 진짜입니다. 정 못 믿으시겠으면 사령부에 확인해 보십시오. 그쪽에서도 숙소 이동 사실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 거! 말입니다.”
동거에 힘을 주었다. 강수혁은 의심을 거두지 못하면서도 확인까지는 안 했다.
“아니 됐어. 사기로 드러나면 이번엔 다 죽여 버리지 뭐.”
심드렁한 투로 내뱉는 말에 윤조는 한쪽 입꼬리를 삐질 올렸다.
마음에 안 들면 대뜸 죽이겠다는 놈과 뭘 하라고요? 밀당 연애요? 차라리 슬라임 괴물과 알콩달콩 사는 편이 더 쉬울 거다.
“동거 중에도 패널티 룰은 항상 적용되니까요. 제 신체에 일정 이상의 물리적 힘을 가하면 위성 AI가 자동으로 패널티를 부과합니다. 그런 경우, 제게 임의 중단 권한이 없다는 사실을 유념하십시오.”
혹시나 몰라 이미 아는 사실을 다시 주지시켰다. 역시나 강수혁은 코웃음만 쳤다.
“내 걱정하지 말고 너는 내 용서를 받을 방법이나 찾지그래?”
거참. 건수 하나 잡았다고 정말로 기고만장하고 재수 없게 나온다.
슬슬 패널티 강도를 좀 올려야 하는 시점인가. AI에게 패널티 강도 조정을 위한 분석을 지시했다.
“참고로 말하는데. 아파트 안 무너뜨린 거, 내 잘난 가이드님의 안녕을 위해서 참은 거야. 그것도 다 계산에 넣어.”
“……예.”
무고한 인명 피해를 대량으로 내지 않고 산만 무너뜨렸다고 지금 고마워하란 얘기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미친 소시오패스 새끼.
“따라와.”
강수혁이 주택 현관으로 향했다.
붉은 벽돌로 지은 집은 고풍스럽고 멋졌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마감 자재에 흠이 있거나 혹은 묵은 먼지가 잔뜩 끼었다.
그림 같은 4인 가족에 대형견 두 마리쯤은 풀어놓고 하하 호호 웃는 풍요로운 광경이 어울릴 넓은 정원도 사람의 손길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잔디는 얼마나 자랐는지 꽃대가 무성하고 관목은 밀림이 되기 직전이었다.
“요즘 온대 자연림이 거의 사라지고 있다는데…… 여기서는 아주 번창하네요.”
“뭐?”
앞장서던 강수혁이 뒤를 돌아봤다. 윤조는 그냥 싱긋 웃었다.
“그냥 해 본 말입니다.”
“우리 가이드님은 자연림이 좋은가 봐? 나는 깔끔한 정원이 취향인데.”
“그러신가요? 깔끔한 것도 좋죠. 집값도 올라가고.”
대충 맞장구를 쳤더니 강수혁이 불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지? 잡초부터 뽑아야겠어, 따까리.”
순간 윤조는 저도 모르게 엉망진창인 정원을 다시 돌아봤다.
“다 정리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한 삼 일?”
열심히 하면 하루면 될 것 같지만, 일부러 넉넉히 잡아 삼 일을 질렀다. 그러자 강수혁이 의외로 순순하게 그러라고 한다.
“그래. 그럼 삼 일.”
“아, 예. 감사합니다?”
갑자기 돌풍이 불면서 강수혁이 사라졌다. 윤조가 양팔로 얼굴을 가리는 순간 다시 나타난 강수혁의 손에는 이가 다 빠진 낫이 들려 있었다. 강수혁은 윤조의 손을 잡아 그걸 손바닥 위에 올려 주었다. 심지어 소중한 유산을 남기는 사람처럼 펼쳐진 손가락을 하나하나 곱게 접어주면서 실실 쪼갰다.
“그럼 수고해, 따까리.”
“예? 지금요?”
황당한 나머지 윤조는 저도 모르게 강수혁의 앞을 막았다.
“응. 다 하기 전엔 현관 통과 금지.”
“아니 이걸 어떻게 저 혼자 하라고요?”
언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상대는 그저 실실 웃을 뿐이었다.
“알아서 하셔야지?”
“소령님!”
“수고해.”
강수혁은 윤조의 어깨를 자랑스럽게 툭툭 두 번 치고는 다시 돌풍과 함께 사라졌다. 자기가 무슨 오즈의 마법사라고 시발. 바람과 함께 사라지면 다냐!
순간 빡이 친 윤조는 텅 빈 정원 어딘가를 향해 외쳤다.
“야! 너무한 거 아니냐! 망쳐 놓은 건 넌데 왜 내가 이걸 치워야 해! 나 연두부라고 연약하다고! 개새끼야아!”
그러면서 들고 있던 녹슨 낫을 집 쪽으로 향해 던졌다. 딴에는 강화 인간인지라 낫는 고속으로 회전하면서 현관문을 향해 날아갔다. 철판이 뚫리거나 혹은 튕겨 나오거나. 결과는 둘 중 하나여야 했다.
“응?”
날아가던 낫이 현관에 박히기 직전 공중에서 멈췄다. 그도 모자라 느닷없이 역회전을 시작하더니 이쪽으로 날아왔다. 정확하게 윤조의 이마를 향해서.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억, 시발!”
욕설을 뱉기 전에 몸부터 움직여야 하는데. 속도가 너무 빨라 미처 피할 수 없었다. 눈만 질끈 감았다.
옅은 바람이 훅 끼쳤다. 예상한 고통은 없었다. 찡그렸던 눈을 살짝 뜨자 붉은 낫 끝이 정확하게 미간 사이에 멈춰 있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하…… 할게요. 하면 되지 않습니까. 사람이 왜 이렇게 성질이 불같고 그래. 성질 팍팍 내고 사니까 화병은 안 걸리겠네.”
달달 떨면서 윤조는 공중을 부유하는 낫의 손잡이를 곱게 잡았다. 낫은 얌전히 윤조의 손에 끌려왔다.
‘개새끼! 시바알! 밴댕이같이 속 좁은 새끼! 욕도 못 하냐!’
속으로 쌍욕을 날리면서도 윤조는 겉으로는 하하 웃으며 웃자란 잔디를 베기 시작했다. 이 썩은 똥 같은 신세야.
“훗.”
저택 옥상.
항상 애용하는 선베드에 누운 강수혁은 손으로 머리를 괘고 주택 마당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입가엔 절로 빙긋한 웃음이 걸렸다.
일반 군복을 입은 놈은 쭈그려 앉은 채 열심히 잔디를 손질했다. 낫질을 할 때마다 꿈질꿈질 움직이는 뒷모습을 보니 아침 내내 비틀렸던 심사가 슬슬 풀리려고 했다.
바짝 접은 허벅다리에 턱 걸쳐진 상체, 고개를 숙이느라 굽은 등, 밑으로 올록볼록 튀어나온 한 쌍의 엉덩이. 디지털 패턴 군복 때문에 멀리서 보니 꼭 개구리 같았다.
“귀엽네.”
까만 머리카락에 햇빛이 곧장 떨어졌다.
군복은 원래 통풍이 잘 안 될 뿐더러 발진 방지를 위해 안에 검은 내피까지 입은 김윤조는 더운지 금방 땀을 흘렸다. 처음에는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더니, 이내 낫을 두고 일어나 상의를 벗었다. 딴에는 가이드님이 남의 정원에 풀이나 뜯는 꼴을 보니 상당히 통쾌했다.
“쿡쿡.”
강수혁은 숨을 죽여 웃었다.
순간 놈이 뭔가를 감지한 듯 벌떡 일어서서 뒤를 힐끔 봤다. 빌어먹을 위성을 이용하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을 텐데. 저 청개구리 같은 놈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옥상까지는 생각 못 했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놈은 하얀 낯을 구기곤 다시 쭈그려 앉았다. 그러곤 이어지는 낫질이 아까보다 훨씬 무성의하고 거칠었다.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자원은 무슨.”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심나연 박사는 수혁을 잡아먹으려 들면 들었지, 이렇게 숙이고 들어가라고 지시를 할 위인이 아니었다. 최정 대령은 그럴 깜냥이 없고. 그 외에 가이드 김윤조에게 이런 명령을 내릴 만한 사람은 극소수, 솔직히 말해 손에 꼽을 정도다.
장교 아파트 뒷산을 뭉갰으니 당연히 꼭대기에 보고가 들어갔을 거다. 그렇지 않아도 아침나절에 장성급이 애용하는 특정 헬기 기종 엔진 소리를 감지했다.
“장선욱인가.”
징그럽기 짝이 없는 치의 낯이 떠올랐다.
사람 좋은 척하면서 뒤로는 누구보다도 잔인해질 수 있는 인간.
놈의 본성을 모르던 시절엔 그를 부친처럼 따랐다. 그의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지금 돌이키기엔 너무나도 혐오스러운 기억이었다.
“시발.”
수혁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등에 불기운이 생기면서 붉은 수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수포는 정확하게 척추를 따라 번졌다.
“시발.”
뜨거움은 둘째치고 너무 가렵다.
차라리 아픈 게 낫다. 가려운 건 참기 힘들었다. 손이 잘 닿는 거리라면 살점을 파냈을 거다. 일전에 심하게 일어났을 때는 가려움을 참지 못하고 실제로 칼로 척추 인근을 마구잡이로 그은 적도 있었다.
“이거 왜 이런 겁니까?”
전에 연두부 새끼가 상처에 관해 물었다.
수포는 신체가 척추 장치를 거부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었다. 평소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는 괜찮지만, 한 번씩 수혁이 장치를 의식할 때면 종종 이런다.
강력한 재생력을 지닌 신체 본능이 살 안을 파고드는 이질적인 장치를 힘껏 밀어내려 들었다. 하지만 척추에 심어 놓은 장치는 진드기처럼 더 달라붙을 뿐,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강제로 뜯어내는 일도 불가능했다. 장치의 끝은 뇌에 연결되어 있는데, 일정 이상 파손되면 강력한 스턴을 걸어 수혁을 기절시킨다.
수혁이 의식을 잃으면 놀란 신체는 본능적으로 재생 복구에 들어갔다. 장치를 밀어내기보다는 회복에 집중하는 것이다. 자해와 기절, 그리고 재생 복구를 거듭하면서 장치는 뗄 수 없을 만큼 척추에 강하게 유착되어 버렸다.
숨을 죽이며 뜨거움과 가려움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사이 김윤조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