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동거
검진이 끝난 후, 헌병대는 윤조에게 짐을 챙길 여유를 주지 않고 바로 차에 태웠다.
차량은 특작부 중심을 벗어나 야산을 돌아서 장성급을 위한 단독 주택 마을로 데려갔다. 사생활 보호를 위해 서로 간의 넓은 거리를 자랑하는 주택 중에서도 가장 안쪽 외진 곳에 있는 저택이 바로 강수혁의 숙소였다.
“허.”
헌병대 차량에서 내린 윤조는 거대한 대문짝을 보고 혀를 찼다. 여러 곳이 우글쭈글했다. 무슨 비 맞은 종이처럼. 더불어 대문 기둥 위 CCTV가 있던 자리는 설치한 흔적만 있었다. 보안의 ‘ㅂ’ 자도 찾아볼 수 없는 형국이었다.
하긴 여기 미치광이 트리플 S급이 산다고 소문이 나도 단단히 났을 텐데 누가 과연 들어오겠는가.
공적 용무로 이곳을 찾은 헌병대조차 대문을 넘진 않았다. 대신에 짐은 나중에 따로 배송할 거니, 특별히 챙겨야 할 물품이 있으면 목록을 적어 메시지를 남기라는 말과 함께 메일 주소를 개인 단말기로 전송했다.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적거리자 헌병대가 침묵 어린 시선으로 윤조의 등을 떠밀었다. 외통수다.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이기 있냐.’
윤조는 억지로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서 내내 툴툴댔다.
상황을 파악하고 나니, 그 강수혁이 그런 취급을 당하고도 고작 뒷산 봉우리만 날린 것이 대단하긴 했다. 참을성이 짚신벌레 크기만큼 늘긴 했다.
하지만 심 박사에게 비상 연락을 하지 않은 이유나 혹은 군의관을 찾는 대신에 임의로 응급조치하고 집으로 옮긴 이유 등등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강수혁을 실질적으로 양육한 장본인이 연애에 밀당을 운운하지만.
“진짜 그게 말이 되냐고.”
생각만 해도 소름이 쭉 끼쳤다.
“그렇게 연애질 밀당이 하고 싶으면 본인이 하든가. 왜 하필 나한테. 어휴 진짜.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절로 욕이 쭉쭉 나왔다. 그때였다.
“연애질 밀당을 누구와 하는데?”
싸늘한 음성이 뒤통수에 날아와 꽂혔다.
“헉!”
윤조는 그 자리에서 반쯤 자지러졌다. 이 미친놈은 왜 맨날 귀신처럼 뒤에서 불쑥불쑥 나타나고 지랄인지.
“기척 좀 내고 다니십시오!”
“기척 내서 누구 좋으라고.”
강수혁의 태도는 역시나 삐딱했다. 이런 놈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장선욱 중장이 단단히 잘못 짚었다.
“그래서 연애질 밀당은 누구와 하는 거냐고? 임성준? 아니면 장세인?”
“무슨 말씀 하시는 겁니까? 그분들 얘기가 지금 왜 나옵니까?”
윤조가 반문하자 강수혁의 얼굴이 한층 일그러졌다. 홍채에 진줏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분. 드.을?”
일부러 말끝을 늘어뜨리면서 묻는 태도에서 불쾌감이 뚝뚝 묻어났다.
“누구는 시발, 뒈지려는 거 살려, 귀찮게 집까지 모셔 줘, 처자다가…… 하여튼 갖은 고생을 다 했는데도 미친놈에 변태 소리부터 찍찍 갈긴 새끼가, 누구는 분드을?”
평소의 윤조라면 약을 더 올렸겠으나, 이번에는 아무래도 입을 다물게 되었다.
“왜 내 집에 온 건지는 모르겠는데. 지금 내가 네 얼굴 보면 패널티고 시발 나발이고 박살 내고 싶거든. 인큐베이터 걸레짝이라고 펄펄 뛰셨잖아? 지금 나한테 박살 나면 재생 못 하니까 말이야. 당장 꺼져, 개새끼야.”
싸늘한 말을 쏟아내는 상대의 검은 홍채 위로 진줏빛이 일렁였다. 활성화 직전이었다. 하지만 강수혁의 손은 늘 그랬던 것처럼 헐렁한 군복 바지 주머니에 꽂혀 있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김윤조 하나 날리는데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필요가 없다. 부동자세로도 공기 분자를 초고속으로 밀어내어 토네이도급 바람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 혹은 진공 폭탄이나.
“잘 달래 보래.”
진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상황이었다. 중장이 직접 내린 명령이라 심 박사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더불어 뭣 같은 태도나마 강수혁이 지적한 대로 일이 이렇게 된 배경에는 윤조의 섣부른 오해가 있었다. 또 숙소에서 쫓겨났으니 어쨌든 여기서 비비고 살아야 했다. 잘못 끼운 단추는 최대한 제대로 고치는 편이 신상에 좋다.
결심한 윤조는 등짐을 지고 냅다 허리부터 90도로 푹 꺾었다. 그러곤 우렁차게 외쳤다.
“죄송합니다!”
“발작 징후를 적시에 발견하셔서 응급 처리를 하신 점, 그 과정에서 인큐베이터 손상을 최소한으로 하신 점, 더불어 의식이 없는 저를 손수 숙소로 이동시키고 이후로도 후처리를 도맡아 하신 점. 대단히 감사합니다.”
“…….”
윤조 앞에 버티고 선 상대는 말이 없었다. 그걸 이제 알았느냐라든가 혹은 감사를 맨입으로 하느냐 라는 소리를 할 법도 한데. 강수혁의 침묵이 평소보다 길었다.
‘쪼잔한 새끼. 머리까지 숙였는데.’
속으로 툴툴대면서 윤조는 사과를 더 짜냈다.
“제대로 경위를 파악하지도 않고 무턱대고 강수혁 소령님을 비난한 점, 대단히 죄송합니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마가 아주 무릎에 닿을 기세였다. 대가리까지 박아야 하나? 살짝 고민할 무렵, 드디어 강수혁이 입을 열었다.
“김윤조 준위.”
“네.”
숙였던 고개를 들자 강수혁의 냉랭한 낯이 눈에 들어왔다.
“나한테만 비싸게 구는 놈이 고개를 숙여서 좀 놀라긴 했어. 하지만 그런다고 모든 일이 다 해결되면 세상이 이렇게 쓰레기장 같진 않겠지?”
그럼 그렇지. 강수혁이 순순히 사과를 받아 줄 위인이 아니다.
“아닙니다. 쉬운 용서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이곳에 머물면서 차차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강수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윤조에게 되물었다.
“네가…… 여기서 산다고?”
“그렇습니다.”
윤조의 대답에 강수혁의 안면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딱딱해졌다.
“머슴처럼 부려 먹다 못해 이젠 날 더러 집까지 양보하라고? 이 새끼가. 누굴 호구로 아나.”
“예? 집을 왜 비웁니까?”
“시발. 네가 여기 산다며! 그럼 나는 나가야 할 거 아냐!”
아. 그런 수가 있구나! 어두운 운명에 한 줄기 광명이 비쳤다.
순간 윤조는 대놓고 기뻐할 뻔했다. 웃음이 번지려는 낯을 억지로 구겨 누르면서 목을 가다듬었다.
일단 같이 살면서 쫓겨나거나 쫓아내는 방향으로 정리하면 된다. 명령 불복종이 아니며, 지랄견의 의견이 그러하다고 보고하면 중장도 별다른 수가 없으리라.
일단 같이 산다. 그리고 최대한 강수혁을 빡치게 한다. 성질을 못 이긴 강수혁이 가출한다. 혹은 윤조 본인이 그에 의해 쫓겨난다.
해결방안이 떠오르자 엿 같은 기분이 다소 누그러들었다.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뭔데?”
윤조는 즐겁게 대답했다.
“같이 산다는 뜻인데요.”
“뭐? 같이 살아?”
강수혁이 짧은 헛바람을 내뱉었다. 그는 윤조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 고개를 기울여 윤조의 눈을 빤히 봤다.
“그러니까 동거?”
“도…….”
동거라는 단어에 윤조는 저도 모르게 잠시 스턴이 걸렸다. 이 망할 부대는 총사령관부터 미치광이 소령까지 단어 선택이 왜 다 이 모양이야.
“숙소 동기입니다. 그러니까 하우스메이트.”
“그게 동거잖아. 같이 사는 거.”
“예. 뭐 따지고 보면 그렇긴 하죠.”
떨떠름하게 답하는 사이 강수혁은 주머니에 찔러넣었던 손을 꺼내 팔짱을 꼈다.
굳었던 표정은 평소와 같은 재수 없는 낯짝으로 돌아왔다. 홍채에 일렁이던 진줏빛도 자취를 감췄다. 대신에 강수혁의 눈초리엔 옅은 의심이 깃들었다.
“이번엔 누구 명령이야?”
“아, 그게.”
장선욱 중장이 그랬다고 하려는 찰나 강수혁이 먼 산을 보면서 마치 아무 저의 없이 가벼운 의문이라는 듯이, 하지만 어딜 봐도 대단히 의식하는 티가 팍팍 나는 태도로 물었다.
“이번에도 자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