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그랑주 포인트 (32)화 (32/256)

29화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궤변이다.

“생물학적 동질감을 주기엔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적은 비율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DNA를 제공한 다른 에스퍼도 동일한 증상을 보여야 하는데, 그런 사실은 아직 관찰되지 않았습니다.”

“강수혁이 무서워서 감히 내색이라도 하겠어? 어제도 박병관이를 박살을 내 놨더구먼.”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실제로 최정은 깨달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랑 최정이 같은 성에 안 차는 오랑우탄들만 득시글하다가 제 눈에는 이제 좀 사람 같은 것이 나타났으니 안 빠지고 배기겠어? 눈이 완전히 돌아가지. 그놈 숫총각 딱지도 김 준위가 떼 줬잖아. 이 상황에서 여자든 남자든 알 게 뭐야. 한 놈이라도 강수혁이를 잡고 흔들면 되는 거지. 되레 남자라서 다행이지. 혹시 강수혁이 애라도 생겨 봐, 그 변수 감당할 수 있겠어?”

장선욱 중장이 코웃음을 쳤다.

강수혁에 비견하면 A급 에스퍼도 너무 하찮고 연약했다. 그와의 거리보다는 일반인과의 거리가 더 가까울 만큼 압도적인 차이가 있었다. 특수한 능력을 보유한 S급 소수를 제외하곤 강수혁에겐 개미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심 박사가 입을 다문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장선욱 중장은 심 박사가 비록 두뇌 특화여서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으나, 엄연히 에스퍼인 걸 까먹은 듯했다.

‘우리라니. 누구더러 오랑우탄이래. 이 아재가 장난하나.’

심 박사는 속으로 중지를 올렸다.

그러든가 말든가 텔레파시 능력이 없는 장선욱은 입을 다문 부하들을 보고 만족스럽게 몸을 돌렸다. 고갯짓하자 대기하던 행정 장교가 엘리베이터 문을 열었다.

바로 앞에 대기하고 있는 장성용 차량을 향해 걷던 장선욱은 차에 올라타기 전에 마지막으로 심 박사와 최정에게 명령했다.

“내가 따로 지시하기 전까지 다른 놈은 붙이지 말아, 김윤조 말이야. ”

“다른 에스퍼를 이용한 추가 테스트를 미루란 뜻입니까.”

“그래. 일단 강수혁이에게 집중하자고. 그놈만 잘 잡아도 가이드 시스템은 성공이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장선욱을 태운 고급 차량이 출발했다. 최정은 경례를 붙이는 동안 심 박사는 그저 서 있었다. 유지했다. 차가 지하 주차장을 완전히 벗어나고서야 눈썹에 붙인 손을 뗀 최정이 입을 열었다.

“사실 같아?”

“모르지.”

“정말로 강수혁이 김윤조를 좋아하면 어떻게 하지?”

최정이 울상을 지었다. 툭하면 징징거리는 성격으로 어떻게 엘리트 부대 작전사령관이 되었는지 의문이었다. 심 박사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뭘 어떻게 해.”

“홀딱 반해도 말이야. 호르몬 반응이나 뇌 동조의 부수적 효과면 뭐든 수습할 방법이 있단 얘기잖아. 동조를 끊거나 뭐 필요하다면 가이드를 하나 더 만들거나. 그런데 진짜 좋아하는 거면 방법이 없어.”

“무슨 방법?”

최정의 울상이 이젠 밉상처럼 구겨졌다.

“만에 하나 김윤조가 사망했을 때 상황을 수습할 방법.”

“…….”

최정은 작전사령관으로서 모든 경우의 수를 살펴 임기응변을 발휘하는 습관이 있었다. 항상 최악의 경우를 생각한다. 상대적으로 사람 심리에 취약한 심 박사는 김윤조의 사망까진 생각지 못했다.

김윤조는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강화 인간일 뿐, 불사신이 아니었다. 강수혁이 붙어 있다곤 해도 여차했을 경우 사망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존재했다.

“심나연, 나 지금 시한폭탄 안은 기분이다.”

최정이 가슴을 짚으며 우는 소리를 늘어놨다.

“늘 시한폭탄이었잖아. 강수혁 그 새끼는.”

그렇게 말하는 심 박사도 약간 떨떠름함을 떨치지 못했다.

“근데 이제는 불붙은 시한폭탄이 됐어. 어떡하면 좋냐?”

“어떡하긴 뭘 어떻게 해? 그냥 천지신명에게 별 탈 없기를 빌어야지.”

대책이 없기는 심 박사도 마찬가지였다.

최정이 어이없다는 듯이 심 박사를 응시했다.

“너는 그게 생명공학 박사라는 사람이 할 말이냐?”

“원래 첨단 과학의 끝은 철학이야.”

“천지신명은 철학이 아니라 무속이잖아.”

“시끄러워. 신이든 귀신이든 빌어. 그 수밖에 없어.”

괜한 소리만 늘어놓은 최정을 무시하고 심 박사는 혼자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가이드 시스템의 성공을 기뻐했는데, 지금에 이르러 따져 보니 너무 성공해서 탈이었다.

곧장 연구실로 향했다. 출입문 바로 앞에서 김윤조가 기다리고 있었다.

“박사님!”

“아, 나한테 읍소해도 소용없어. 중장이 완전히 못을 박았어. 소지품은 헌병대가 알아서 옮긴다니까 너는 여기서 검사받고 바로 그놈 집으로 이동해.”

“허어억.”

절망에 찬 윤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면서 근처 간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차라리 죽도록 맞는 게 낫지, 어떻게 매일 얼굴 보면서 삽니까? 이건 신종 고문이에요.”

사실 김윤조의 심경을, 심 박사가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뭐 그래도 요즘은 그놈이 얌전하긴 하잖아? 태도도 좀 나아진 것 같고 말이야.”

미안하게도 위로를 건네는 것 외에는 심 박사가 어떻게 해 줄 방법이 없다.

“아니, 강수혁 그 자식은 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을 해서 사람을 헷갈리게 합니까?”

준위가 소령을 상대로 막말을 퍼붓는 데도 심 박사는 나무라기는커녕 오히려 동조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연애라니 무슨.”

“으허허어억. 그 말 하지 마십시오. 저 트라우마 오려고 합니다. 시발. 아니 통성명 전에 제 몸을 피떡으로 만들어서 죽이려 했던, 아주 잔인하고 못돼 처먹은 놈입니다. 그런 개자식이랑 뭐요? 아 씨! 총사령관만 아니었으면 아니! 하다못해 제게 에스퍼 능력이 있었으면 그 자리에서 자폭했습니다!”

윤조가 펄펄 뛰었다.

심 박사에게 화를 내어 무슨 소용이 있나. 윤조를 창조한 천재라도 상부의 명령을 따르는 일개 군인 신분일 뿐이다.

“하여간 개망나니 놈을 어떻게든 잘 구슬려 보래.”

“무슨 수로 말입니까?”

“나야 모르지.”

인큐베이터가 수리 중이라 검진을 위해 윤조의 혈압을 비롯하여 각종 바이털 사인을 손수 잰 심 박사가 뇌파 감지 장치를 꺼내면서 문득 엉뚱한 말을 꺼냈다.

“심리상담가라도 찾아봐야 하나?”

이마에 패치를 붙이던 윤조의 낯이 삽시간에 썩었다.

“상담가 만나서 뭐라고 묻습니까? 미친놈이 날 죽이려다가 갑자기 좋아한다고 지랄합니다. 저는 거부하지 말고 오히려 같이 살면서 구슬려 보라는 상부 명령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스트레스로 자폭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뭐 이런 상담이라도 합니까?”

“역시 소용이 없겠지?”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차라리 문제견 전문가가 더 도움이 될 겁니다.”

“하긴. 굳이 따지자면 그 새끼는 인간이 아니니까 말이야.”

현재 윤조는 불안 증상에 시달리는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불안 원인이야 너무 명확했다.

“어제 수면유도제 처방했던데.”

“예. 그 새…… 자식 꼴이 보기 싫어서 잠이나 자려고 처방했습니다. 그 때문에 발작 상황을 인지 못 했습니다.”

새끼라고는 할 수 없어서 윤조는 억지로 자식이라 정정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삼대가 빌어먹을 쌍놈의 좆같은 호로 새끼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최근 발작 빈도가 높아지는 추세니까 당분간 임의 처방은 금지야.”

심 박사의 명령에 윤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 강수혁이 언제 발현했는지 알아?”

뇌파 분석을 계속 이어 가던 심 박사가 새로운 얘기를 꺼냈다.

“잘 모릅니다. 강 소령 파일이 잠겨 있었습니다. 열람 신청했는데 보안 등급을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강수혁 파일은 나도 접근 못 해.”

가이드 시스템을 만든 심 박사도 강수혁 파일을 못 본다는 말에 윤조는 깜짝 놀랐다. 설명이 이어졌다.

“그냥 생체 샘플만 받았지. 강수혁이 누구 자식인지, 어디서 발견되었는지, 어떤 경로로 특작부에 소속되었는지 정확한 사실 관계는 아무도 몰라. 그걸 아는 사람은 현재 장선욱 중장뿐이야. 내가 강수혁 관련 연구 보고서, 그리고 최정 대령이 강수혁 작전 보고서를 올리면 장 중장이 취합해서 강수혁 파일을 작성해.”

“왜 그런 겁니까?”

이해가 전혀 안 갔다. 총사령관인 중장이 서류 작업을 직접 한다고?

“그만큼 중요한 자산이라는 거지. 그리고…….”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이라도 있는 겁니까.”

심 박사가 한쪽 눈썹을 올렸다가 내렸다.

“그야 모르지. 단순히 최중요 자산에 대한 보안 때문일 수도 있고. 하지만 장 중장의 태도가 영 마음에 걸려.”

“어떻게 말입니까?”

“아직 잘 모르겠어. 그런데 석연치 않은 것만은 확실해.”

심 박사는 말을 아꼈다. 사실은 짐작되는 바가 있긴 했다.

예전 들었던 사소한 의문이 장선욱 중장의 기이한 태도와 맞물려 아까부터 심 박사의 뇌리를 점령하고 있었다.

다른 에스퍼는 샘플 채취를 위해 심 박사의 연구실에 직접 들렀다. 그런데 강수혁만은 직접 오지 않고 헌병대에 의해 샘플이 전달되었다. 처음에는 성격이 개떡 같은 강수혁이 순순히 협조를 안 해서 기존 보관 중인 샘플을 제공한 것이라 여겨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런데 지금 문득 그런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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