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심장이 계속 울렁였다. 머릿속도 멍해졌다. 덩달아 멀미가 났다. 이대로 김윤조를 두고 갈 수 있을까. 불가능한 얘기였다. 그러기엔 가이드 시스템은 너무 견고했다.
잠시 김윤조를 바라보던 수혁은 내적 갈등을 정리했다.
“엿 같은 시스템.”
욕설엔 힘이 없었다. 수혁은 조용히 침대로 올라갔다. 그리고 악몽에 사로잡힌 상대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는 수혁의 손이 이끄는 대로 끌려왔다. 검은색 머리카락이 수혁의 한쪽 어깨에 닿았다. 인조라도 강화 신체를 가진 주제에 김윤조는 너무 연약해 보였다.
“연두부 새끼.”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제풀에 뭉그러지기나 하고.
기왕 인간 리모컨을 달 거라면 못 생겨서 좆에 힘이 들어가지도 않고, 또 건장해서 산꼭대기에서부터 굴려도 되는 튼튼한 놈이 낫다. 하필이면 이렇게 끌어안기만 해도 망가질 것 같은 놈이라니. 기분 더럽게.
제 뜻대로 굴러가는 법이 없는 인생을 저주하면서 수혁은 품 안에서 떠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밤새 등을 도닥였다.
* * *
정신이 들었을 때 윤조는 미간부터 구겼다.
‘으. 골치야.’
머리가 지끈거렸다. 재생 직후임에도 전신이 무거웠다. 이런 일은 흔치 않다.
빌어먹게도 어제 꿈자리가 대단히 사나웠다.
8년 전 사건부터 미친개에게 죽을 뻔했던 사건까지 온통 뒤죽박죽된 채로 윤조를 괴롭혔다. 보통은 중간에 깨기 때문에 괜찮았다. 하지만 어제는 재생 중에 수면 유도제를 썼다. 그것이 실수였다. 깨지도 못하고 오랫동안 싫은 기억에 쫓겨야 했다.
원래 사람은 수면 중 꿈은 기억 못 하기 마련인데, 망할 놈의 가이드 시스템이 윤조의 뇌를 너무 활성화해 놔서 망각조차 쉽지 않았다. 그것도 아주 생생해서 단순한 시각뿐 아니라 청각, 후각에 이어 심지어 촉각의 잔상까지 남았다.
슬라임 괴물의 지독한 악취에 시달리는 한편,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일시에 붕괴하면서 느껴지는 거대한 진동. 달아나는 사람들의 비명. 더불어 갓 깎은 사과의 향긋한 냄새, 계속 들어오는 휴대전화 메시지, 거기다가 검지 끝에 걸린 작은 쇼핑백의 흔들림까지.
그뿐인가. 장면이 느닷없이 변화하여 시작된 2부는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갑자기 열린 인큐베이터 밖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 풀린 무릎에 걸리는 아찔한 통증. 차가운 바닥. 굉음과 함께 들이닥친 에스퍼의 살기 어린 오팔색 홍채. 잔인하게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비치는 하얀 송곳니. 이어지는 끔찍한 고통. 터지는 핏물. 차분한 AI의 음성.
정말 쌍욕이 나오게 생생했다. 할 수만 있다면 무의식 속에 남은 기억을 없애 버리고 싶을 만큼.
고작 두 시간에 지나지 않을 꿈이지만, 재생 프로그램 효과를 완전히 무효로 돌릴 만큼 피곤했다. 30분 정도 자는 편이 아무래도 나을 것 같았다.
“기본 재생 30분.”
눈을 감은 채로 명령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뇌에서 울리는 게 아니라 귓가에 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때 신체 감각 또한 이상함을 감지했다. 윤조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어?”
보이는 건 남의 가슴이었다. 두툼하고 질긴 피부가 낯익었다. 눈알을 굴리자 역시 익숙한 낯짝이 들어왔다. 심지어 상대의 시선이 윤조를 향하고 있었다. 어? 이 미친놈이 왜 여기 있지? 이상한데. 아, 아직 꿈인가?
“귀찮게 갖은 뒤치다꺼리를 해 줬더니 깨자마자 하는 소리가 미친놈이 왜 여기 있냐아?”
낮고 딱딱한 음성이 돌아왔다. 들렸나? 꿈이 신기한데. 미친놈이 텔레파시까지 쓰다니. 토 나오는 꿈이다. 정말 싫다 싫어.
상대의 미간이 사납게 구겨졌다.
“텔레파시는 무슨. 네가 들리게 입으로 말하고 있잖아. 개새끼야.”
험악한 손이 다가와 윤조의 입을 꽉 잡았다. 아팠다. 꿈일 리가 없다. 그러기엔 너무 실감 난다. 이건 현실이다.
“허억! 시발!”
윤조는 기겁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뭐, 시발?”
덩달아 수혁도 벌떡 일어났다.
“이게 어디서 상관한테 욕을 하고 지랄이야.”
험악하게 구겨진 수혁의 낯엔 짜증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뇌파를 통해 피로와 짜증 패턴이 전달되었다. 하지만 당장 상대의 기분에 집중할 상황이 아니었다.
윤조는 재빠르게 주변을 스캔했다. 자신의 집 침실이다. 거기다가 아랫도리는 썰렁하고 윗도리는 하필이면 강수혁의 것이 분명한 티셔츠를 입고 있다.
잠들기 전 재생 중이었다. 강수혁 꼴이 보기 싫어서 인공 양수에 수면 유도제를 첨가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아니, 소령님이 왜 여기 있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왜 여기 있는데요?”
“네가 네 집에 안 있으면 어디 있을 건데?”
동문서답이 돌아오자 황당함 위로 짜증이 벌컥 났다.
“그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윤조는 손을 들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뭔가 끈적하고 찝찌름했다. 인공 양수를 제대로 씻지 않은 탓이었다. 재생 직후 알아서 온수 세척까지 자동인데. 양수 흔적이 몸에 남았다는 말인즉슨.
“재생 중에 강제로 꺼냈습니까?”
“…….”
귀찮은 듯이 돌아서는 등짝에서 긍정을 읽어 내렸다. 윤조는 침실을 벗어나는 강수혁의 뒤를 사나운 걸음으로 따라갔다. 강수혁은 남의 집을 멋대로 활보했다.
“미쳤습니까? 재생 중에 강제로 꺼내다니요! 강제 중단 코드도 없을 텐데…… 인큐베이터를 박살 낸 건 아니겠죠?”
“잠금장치만 조금 찌그러졌어.”
주방 냉장고 문을 잡은 강수혁이 귀찮은 듯 대답했다. 뒤이어 냉장고 속을 살핀 그는 반쯤 남은 생수병을 보곤 투덜댔다.
“물도 제대로 없냐? 도대체 이 집구석에는 있는 게 뭐야? 이불도 없고. 여분 베개도 없고.”
그럼 마시질 말든가. 멋대로 남의 냉장고를 뒤지고 멋대로 생수병에 입을 대고 마시는 꼴을 윤조는 멍하게 봤다. 심지어 그는 남은 물을 몽땅 마셨다.
“정수기 정도는 들여놔라. 연봉 받아서 어디에 써?”
“지금 정수기가 문제입니까? 인큐베이터 잠금장치만 조금 찌그러졌다는 게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 잠금 부분만 약간 일그러졌다고.”
빈 생수병이 에스퍼 손안에서 휴지처럼 우그러졌다.
약간은 무슨. 강수혁의 기준에서 약간은 전파까지는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니까 반쯤 박살이 났다는 뜻. 인큐베이터의 신세도 그의 손에 들린 생수병과 다르지 않으리라.
“왜요? 왜 부쉈는데요?”
“그야 네가…….”
“소령님이 부수긴 했군요. 아니 고작 두 시간 재생도 못 참습니까? 연병장에서 연구실로 비행 좀 했다고 그렇게 성욕이 폭발해요?”
윤조가 따지고 들자 강수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을 무슨 짐승 새끼로…….”
“아닙니까? 그럼 왜 제가 이 꼴에 여기서 이러고 있습니까? 설명해 보시죠.”
당연히 강수혁은 설명하지 못했다. 대신에 귀찮은 듯이 돌아섰다.
“됐다. 내가 널 데리고 무슨 얘기를 하겠냐. 옷이나 입어. 곧 심 박사 출근할 테니까 이상 없나 검사부터 받아.”
“말 딴 데로 돌리지 마십시오! 인큐베이터, 그거 얼마나 복잡하고 섬세한 기계인 줄 아십니까? 그거 없으면 저 못 버텨요, 아십니까?”
“고치면 되잖아.”
이게 무슨. 쌀 떨어졌으면 농사부터 지으라는 급의 망발인가.
‘이 답도 없는 새끼.’
가이드의 안녕한 존재를 위해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는 귀중한 장치를 망가뜨려 놓고 저렇게 나와? 이건 묵과할 수 없다.
윤조는 노발대발했다.
“눈만 깜빡하면 뼈도 알아서 척척 붙는 누구와 달리 보통 기계와 인간은 고치고 치료하는 데도 시간과 노력과 비용이 듭니다. 저는 얼마든지 때리고 부수고 망가뜨려도 좋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재생 회복은 할 수 있게 도와주셔야죠! 그걸 망가뜨리면 앞으로 소령님 뒤치다꺼리를 어떻게 하라고요? 예? 마구잡이로 박다가 또 허리 나가고 찢어지면 알아서 붙여 주실 겁니까?”
단숨에 우다다다 몰아붙였다.
“그렇게까지 화를 낼 일이야? 그리고 뒤치다꺼리라니. 누가 누굴 뒤치다꺼리하는데?”
그런데 뭐 뀐 놈이 오히려 윤조를 나무랐다.
“네, 그렇게까지 화를 낼 일입니다. 무슨 여드름 덕지덕지 난 중2도 아니고 5분마다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어디 쉬운 줄 아십니까? 배려심도 없고 양심도 없고. 힘만 무식하게 세고 뻔뻔하고 이기적인 누구누구 덕분에 매번 피 보는 건 저란 말입니다.”
“너…… 말 다 했어?”
강수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왜요? 말 다 했으면 또 멱살 잡고 패대기칠 겁니까? 아니면 갈비뼈 서너 대 부러뜨리시려고요?”
윤조는 참지 않고 빈정댔다.
“뭐 항상 그러셨으니 이번에도 그러실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냥 맞아드리진 못합니다. 인큐베이터를 박살 내 놨으니 재생할 수단이 없으니까. 패널티를 받으셔도 본인 탓입니다.”
쉬지 않고 몰아붙이는 윤조를 향한 강수혁의 눈빛은 여느 때보다 싸늘했다.
“애초에 때리려고 한 적도 없어.”
구긴 생수병이 싱크대 위로 날았다. 스테인리스 싱크대에 부딪힌 플라스틱병이 요란하게 울렸다.
재생하던 사람을 도중에 건드린 주제에 미안한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또라이가 주방을 벗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꿈틀거리는 등짝을 본 윤조는 황급히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었다. 그리곤 강수혁이 막 현관문을 밀칠 때 티셔츠를 벗었다.
“여기요.”
매서운 눈빛이 윤조의 전신을 훑었다. 직후 거친 손이 티셔츠를 낚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