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그랑주 포인트 (18)화 (18/256)

16화

윤조는 이름을 외기도 어려울 만큼 무수한 화학 약품에 오랫동안 절여졌다. 물어보기 무서운 각종 방사선에도 장시간 노출되었다. 그 결과 멜라닌 색소가 거의 남아나질 않았다.

완전히 잘라냈다가 새로 기른 모발과 눈썹, 속눈썹, 그리고 눈꺼풀 덕에 양수에 오래 노출되지 않은 고동색 홍채가 유일하게 짙은 부분이었다. 그 외에는 창백할 정도로 하얬다. 그렇다고 알비노 증후군 같은 외양은 또 아니었다. 흘끔 보기만 해도 자연 발생 돌연변이가 아닌, 인공적인 느낌이 푹 끼쳤다.

살아 움직이는 인형. 불쾌한 골짜기. 인조인간.

그게 가이드 김윤조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선이었다. 어떤 자들은 침략자인 외계 생물보다 김윤조를 더 꺼림칙하게 여겼다.

얇고 파리한 피부에 설핏 마른 몸을 가진 남자의 존재는 부대 내에서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직위 고하, 성별, 나이를 막론하고 윤조에게 크고 작은 관심을 표출했다. 더러는 경계하면서, 더러는 장난으로, 때로는 인조 강화 인간에 대한 불쾌감을 당당히 표출하면서.

‘그러든가 말든가.’

윤조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본인만 신경 쓰지 않는다고 평탄한 생활이 보장되진 않았다. 단지 불쾌하다는 이유만으로 시비를 거는 빌어먹을 새끼들은 어디에도 있었고, 당연히 사령부 안에도 있었다.

더욱이 강수혁에게 그런 식으로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 수 없는 경로를 통해 알려지고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노골적인 추행도 종종 발생했고 때로는 완력을 동반한 심각한 시비도 있었다.

심 박사는 연구실을 나서는 윤조를 향해 잔소리했다.

“별일 있으면 강수혁 불러. 에스퍼 놈들을 조질 수 있는 건 그 개망나니뿐이니까.”

언제는 개망나니의 꿍꿍이를 조심하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제는 별일 있으면 부르란다.

“그렇다고 아무 별일에나 부르지 말고. 그 새끼 또 지랄할라.”

“……강 소령님을 믿으라는 건지, 아니면 믿지 말라는 건지 헷갈립니다.”

“알아서 적절히 판단해. 그러라고 특수 위성 붙여 줬잖아. 그러니까 내 말은.”

심 박사는 짜증스러운 한숨을 뱉었다.

“또 인큐베이터 신세 질 일은 만들지 말자고. 저 인큐도 프로토타입이라 한번 고장 나면 끝장이야. 재생 후에는 일정 이상 재정비 기간이 필요해. 당장 문제 있단 얘기는 아니고. 계속 그러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거지.”

심 박사는 적은 확률에도 걱정이 큰 편이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혹은 윤조가 너무 태평하든가.

“저도 군인입니다. 그리고 박사님 덕분에 제 근력은 에스퍼 C급, 스피드는 B급 정도로 향상되었습니다. 부대 내에서 제게 시비를 걸고 무사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알지. 알아.”

대다수 에스퍼는 C 혹은 B급이었다. 슬라임 괴물을 단독으로 상대할 수 있는 수준.

A급과 S급은 군사 기밀로 취급되는 만큼 극소수여서 사령부 내에서도 10명 이하였다. 그들은 강력한 힘을 가진 터라 많은 제약이 있고 또 세뇌와 다를 바가 없는 절제 교육을 많이 받아서 예의도 발랐다.

트리플 S라는 미친 등급으로, 거기다가 참을성에 협조성, 사회성까지 다방면으로 결핍된 치명적인 존재는 강수혁이 유일했다. 그런 미친 게 여럿 있으면 지구는 한참 전에 멸망했을 거다. 골칫덩이가 하나뿐이라 참 다행이었다.

“그래도 아예 없는 건 아니잖아. C급이라도 한 번에 둘 이상 동시에 덤비면 혼자 감당하지 못해. 에스퍼 중에는 강수혁에게 앙심을 품은 놈이 많으니까 말이야. 너를 죽이면 강수혁도 죽일 수 있다는 개소리를 믿는 등신들도 제법 있는 것 같고. 하여간 도움이 안 되는 새끼. 그 새끼가 빨리 콱 죽어 버려야 내 속이 편하지.”

“욕 많이 먹는 사람은 장수하지 않습니까? 박사님 덕분에 강 소령님 무병장수할 것 같습니다.”

농담에 심 박사가 입을 꾹 다물었다. 강수혁이 어지간히 싫긴 싫은 모양이었다.

운동화 끈을 묶은 윤조는 발을 꾹꾹 눌러 보았다. 어디 눌리거나 조이진 않았다. 그래도 새 운동화라 조심해서 걷지 않으면 분명히 뒤꿈치 살이 까질 거다.

‘28살, 8년 차 직업 군인에 새 군화도 아니고 운동화에 발꿈치 살이 까질 것을 염려해야 한다니.’

스스로 선택한 인생이니 후회하지는 않으나 이런 어이없는 상황을 맞닥뜨리면 절로 헛웃음이 터지곤 했다.

두툼한 양말이 알아서 살을 잘 커버하길 바라며 윤조는 연구실을 나섰다.

“어디로 갈 거야?”

뒤를 지켜보던 심 박사가 물었다.

“연병장이나 한 바퀴 돌려고 합니다.”

“여든 살 먹은 영감처럼 걸어. 절대로 뛰지 말고.”

꼭 엄마 같은 잔소리가 따라붙었다.

막 입구 지문 패드에 손을 대던 윤조는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3일을 꽉 채우고도 3시간 후. 부모를 자처하는 심 박사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윤조는 드디어 지하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메인 건물을 떠나 조금 걷자 오래된 연병장이 나왔다.

일반인으로 구성된 특수부대는 사령부 저편 새로 만든 훈련 시설과 연병장을 사용했다. 또 에스퍼는 민감한 시설이 들어찬 건물 가까이에 있는 연병장을 처음부터 사용하지 않았다. 훈련 중에 혹시 실수로라도 건물에 타격을 주는 걸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훈련장은 민간인 출입이 통제된 인근 야산, 혹은 구형 비행장이었다.

그런 이유로 구형 연병장은 공무원처럼 정시 출근, 정시 퇴근을 반복하는 일부 행정과 간부와 연구진이 식수 가벼운 산책 코스가 되었다. 동시에 갓 재생 후 다른 사람의 방해 없이 도보 재활을 시작하기 최적이었다.

지금은 점심시간도 훌쩍 지나 저녁 시간을 앞두고 있었다. 행정병과 간부들은 퇴근 전 업무를 서두르고, 병사들은 평시 훈련 일과가 끝나고 휴식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야간 훈련이나 특수 훈련을 하는 팀이 연병장 인근에 모습을 조금씩 보이기도 하는데 오늘은 그마저 없는 것 같았다.

“조용하다.”

기기 보호를 위해 일정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연구실 공기와는 질적으로 다른 바깥 공기가 기도를 타고 폐 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후아.”

크게 들이마셨다가 다시 내뱉었다. 마른 공기에선 먼지 냄새와 희미한 기름 냄새가 났다. 병참 기지가 멀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타르 녹는 냄새와 탄약 냄새가 나지 않는 걸 보면 화력 훈련이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해가 서쪽으로 한껏 기울어서 한두 시간 후면 질 것 같았다. 느긋하게 길어지는 그림자를 따라 윤조는 천천히 걸었다.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덕에 연병장은 가장자리는 웃자란 풀이 그득했다. 비와 바람에 쓸린 모래와 자갈이 제멋대로 뭉쳤다. 작은 풀벌레와 딱정벌레가 후루룩 뛰어다니고 바닥엔 달팽이와 지렁이가 꿈틀거렸다.

“야생이네.”

지렁이를 밟을 뻔한 윤조는 발을 조심스럽게 옮겼다. 풀이 있는 곳을 벗어나 흙이 드러난 연병장 중앙 쪽으로 향했다. 멀찍이서 가장자리를 둘러보니 방치된 상태가 더 잘 보였다. 연병장을 빙 둘러심은 방풍림도 가지치기를 안 한 지 오래였다.

“아무리 사용하지 않는 연병장이라지만 관리 상태가 너무 엉망인데.”

최첨단을 자랑하는 특수작전사령부 중앙에 있는 시설답지 않았다. 한가한 별 중 하나가 나타나서 한마디 해야 해결되지 않을까.

간만에 여유가 생기니까 별 시답잖은 생각까지 다 들었다. 시설관리는 공병대, 혹은 행정반 소관이었다. 자신은 웃자란 잡초에서 풍기는 싱그러운 풀 냄새와 굵은 모래가 섞인 땅을 밟으며 산뜻한 질감을 즐기면 그만이었다.

‘발꿈치, 발끝, 발목.’

윤조는 속으로 순서를 외면서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여든 살 먹은 영감까지는 아니라도 큰 부상에서 갓 회복한 환자 속도였다.

딱딱한 군화가 아닌 부드러운 운동화의 밑창은 새로 만든 무릎 연골과 척추에 가해지는 충격을 최소화했다. 그래도 도보 10분이 넘어가자 이마에 땀이 났다. 움직일 때마다 얇고 부드러운 트레이닝복 사이로 마른 바람이 들어와 땀을 훔쳐 갔다.

‘발꿈치, 발끝, 발목.’

15분쯤 되었을 때였다.

풀벌레와 윤조뿐인 공간에 무시할 수 없는 강한 존재감이 불쑥 나타났다.

본능적으로 경계했던 윤조는 곧 낮은 한숨을 쉬며 긴장을 풀었다. 상대에게서 너무나도 익숙한, 그래서 불쾌하기 짝이 없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었다.

“멀쩡하군.”

아니나 다를까 강수혁의 삭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보다는 목소리가 예상보다 너무 가까이에서 들렸다. 저도 모르게 심장이 덜컥 주저앉았다. 윤조가 휙 돌아보자마자 두툼한 가슴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분명 방금 연병장 가장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데.’

상대는 어느새 코 닿는 거리에 있었다. 윤조는 한 걸음 물러나며 고개를 들었다.

순간이동 능력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전에 눈으로 냉기를 뿜던 것도 그렇고. 숨기고 있는 능력이 있는 걸까.

“텔레포트 능력도 발현되었습니까?”

“무슨 소리야.”

“저기에 있다가 어떻게 갑자기 여기까지 왔습니까? 기척이 없었는데요.”

윤조의 질문에 강수혁은 제 몸을 살짝 띄워 보였다. 염력을 이용하여 몸을 띄워 비행하는 것은 그의 주특기였다. 물 위를 부유하는 귀신처럼 작은 원을 그리더니 다시 땅에 내려왔다.

“아.”

“대가리를 장식으로 달고 있는 게 아니면 물어보기 전에 본인 담당 에스퍼의 능력 가동 범위를 좀 파악하지?”

비비 꼬인 조롱이 돌아왔다. 하여간 그냥 넘어가질 않는다.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의문은 일단 접어 두었다.

“누구 덕분에 하체가 박살 나서 재생하는 바람에요. 뇌도 좀 손상된 것 같고요. 하지만 조기에 연구실로 이송 조치해 주신 점은 감사합니다. 덕분에 일주일 있을 걸 삼 일만 있었습니다.”

윤조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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