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그랑주 포인트 (13)화 (13/256)

02. 프로토타입

삐. 삐. 삐.

기계의 알림 소리에 윤조는 문득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눈은 뜨지 않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액체가 윤조의 전신을 감쌌다. 익숙한 감촉에 자신이 재생 인큐베이터 안 인공 양수 속에 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어둡고 고요한 세상이었다.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는 절대 평화가 바로 이런 것이리라.

윤조는 인조 양수가 주는 포근함을 즐겼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깼어?”

인큐베이터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심나연 박사였다.

40대 중반인 심나연 박사는 가이드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다. 가이드가 된 김윤조의 관리 감독 책임관이자 법적 책임이 있는 보호자이기도 했다.

“척추에 실금이 가긴 했지만, 완전히 박살이 난 건 아니라 다행이야.”

삑.삑. 삐빅.

심 박사가 윤조가 들어 있는 인큐베이터 계기판을 조작했다. 그러자 어두운 공간에 옅은 빛이 들어왔다.

“눈 떠 봐.”

시키는 대로 눈을 떴다. 양수가 안구에 직접 닿았으나 따갑기보다는 오히려 쾌적했다. 보글보글 거품이 올라오는 인공 양수 때문에 재창조주의 인영이 구불거렸다.

윤조의 뇌에는 총 네 개의 케이블이 연결되어 있었다. 정해진 절차에 따라 가이드 프로세서도 세밀한 재조정 프로그램을 돌리고 있었다.

“관등 성명.”

-준위 김윤조. 특수작전부대 제1대대 소속. 중대, 소대 소속 없음. 작전명령책임자 대령 최정.

“등록 코드.”

-G0001-pt. 강화 인간. 분류 가이드. 조정관리책임자 대령 심나연.

“좋아. 마지막 기억이 뭐야?”

개인용 패드를 든 심 박사는 윤조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무심하게 물었다. 조정 절차였다.

-에스퍼 강수혁 소령의 성적 충동을 성공적으로 해소했습니다. 피 냄새, 정액 냄새 그리고 단백질이 변형하는 냄새를 감지 직후 기억이 단절되었습니다.

“개망나니 놈의 진술과 일치하는군.”

돌아오는 어조에는 미미한 짜증이 섞여 있었다.

심 박사는 강수혁의 공공연하게 개망나니라고 불렀다. 당연하게도 일생일대의 창조물을 매번 망가뜨리는 놈을 좋아할 리가 없다.

“개망나니 새끼. 언제 정신 차릴 건지.”

짜증 가운데서도 묘하게 친근함이 느껴졌다. 개새끼의 갱생을 포기하지 않고 정신 차리길 바라는 점이 특히 그랬다.

윤조가 가이드가 되기 전, 심 박사와 강수혁에 대해서 잘 모를 때. 두 사람은 제법 가까운 사이였다. 윤조가 직접 보고 들은 바는 없지만, 도는 소문이 그랬다.

심 박사가 강수혁의 멘토를 담당할 때는 제법 군인답고 사고도 덜 쳤다고 했다. 강수혁의 개망나니 짓이 특히 강해진 건 심 박사와 틀어진 이후라는 얘기도 있었다.

관계가 틀어진 이유는 당연히 가이드 프로젝트 때문이었다. 그러니 앞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나아질 희망은 없다고 보는 편이 타당했다.

“디스크 세 개가 터졌어. 척추엔 피로 골절. 항문은 다 찢어졌고 직장 안에는 물집과 멍이 가득해. 전부 재생하는데 일주일은 걸릴 거야.”

패드를 조작하던 심 박사가 윤조의 상태를 설명했다.

-그게 답니까?

“그게 다냐고?”

심 박사가 그렇지 않아도 둥근 눈매를 더 동그랗게 떴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인큐베이터 안 윤조를 빤히 봤다.

“알량한 좆질로 사람을 하반신 불구로 만들었는데 그게 다냐는 말이 나와? 네가 일반인이었으면 평생 휠체어 신세야.”

-저는 일반인이 아니잖습니까. 또 가이드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좆질당하기도 전에 죽었을 겁니다.

윤조의 차분한 지적에 심 박사가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반박은 하지 않았다.

“너도 참, 운 한번 더럽게 없지. 뇌파 동조의 부작용이 성 충동일 줄 누가 알았겠어.”

-그러게 말입니다.

윤조는 싱긋 웃었다.

-그래도 좆질당하는 쪽이 살해당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참 긍정적이구나.”

어이없다는 듯이 심 박사가 양 팔짱을 꼈다. 엄한 표정이 꼭 개구쟁이 조카를 혼내는 이모 같았다.

-긍정성을 높이 사서 저를 실험체로 최종 결정하신 것으로 압니다만.

“그것도 맞아. 이 미친 프로젝트 과정을 미치지 않고 버티려면 낙천적인 성격이 중요하지.”

심 박사가 굳은 안면 근육을 풀고 피식 웃었다.

심 박사의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 새끼가 좀만 어른스러웠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오갈 데 없는 놈을 먹여 줘, 재워 줘, 연봉 줘, 떠받들어 줘. 뭐가 불만이야, 개망나니 놈.”

툴툴대던 심 박사는 태블릿 패드를 다시 확인하더니 인큐베이터에 연결된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봤다. 그러다가 갑자기 컴퓨터 위에 패드를 팽개쳤다. 뾰족한 시선이 인큐베이터 안까지 날아들었다.

“너는 화도 안 나냐? 그 미친 새끼가 널 죽일 뻔한 것도 모자라서는 수시로 이렇게 초죽음으로 만들어 놓는데 말이야.”

“화가 안 난다면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강수혁 소령에게 화로 맞서 봐야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쪽만 손해입니다.”

윤조가 일반론을 내세우자 심 박사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어휴. 이 속도 없는 새끼.”

가이드 프로젝트의 피실험체로 참여하여 죽거나 미치지 않은 채로 개조 과정을 견딘 사례는 윤조가 최초였다.

드디어 탄생한 프로토타입 가이드의 테스터 에스퍼로 강수혁이 지정되었을 때 그가 보인 첫 반응은 격렬한 살의였다.

명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가이드 프로젝트 자체를 지극히 혐오했다. 절대로 테스터가 될 수 없다고 명령을 거부했다. 사실상 강수혁을 통제하기 위해 가이드 프로젝트를 개발했던 군부는 그를 제압하려고 에스퍼 헌병 다수를 보냈다.

막강한 에스퍼가 한번 마음먹으면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에스퍼 헌병대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이제 강수혁을 저지할 수 있는 수단은 무차별 폭격뿐인데 그렇다고 아군 부대 안에 미사일을 쏟아부을 수는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강수혁은 심나연 박사의 연구실에 침입했다. 에스퍼 헌병대가 출동하여 그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연구동 건물이 대거 손상되었다. 실험체의 구동을 지켜보던 심 박사도 휘말려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강수혁을 막진 못했다.

강수혁이 연구실의 두꺼운 차폐문을 가격했을 때, 위험을 감지한 연구실 AI는 긴급 소개 절차에 들어갔다. 시스템 명령에 따라 강제로 깨워진 윤조는 인공 양수에 흠뻑 젖은 상태로 일어났다.

G0001-p라는 마킹이 새겨진 다리를 인큐베이터 밖으로 내미는 순간, 강수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군, 징그러운 혼종 괴물 놈이.”

강수혁이 처음으로 뱉은 말은 아직도 윤조의 기억 속에 생생했다. 그것이 강수혁과의 첫 대면이었다.

윤조는 원래 일반인 출신 하사관 입대라 에스퍼와 별로 인연이 없었다. 각종 전과를 인정받아 엘리트 코스인 특작부로 진급, 발령된 후에 에스퍼를 실제로 처음 봤다. 유명 인사인 강수혁은 각종 미디어를 통해 얼굴만 익혔을 뿐, 그전까진 어떤 개인적인 접점이 없었다.

영문 모를 증오에 윤조는 당황했다.

“뒈져.”

합당한 이유도 없이 분노한 에스퍼는 살의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당시 윤조는 개조된 신체에 대한 적응 기간을 갖지 못한 상태였다.

체격만 성인 남성일 뿐, 막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그의 신체 조작 능력은 갓 태어난 신생아 수준이었다. 당연히 방어 능력도 현저하게 떨어졌다. 걸음도 제대로 못 걸어서 도망칠 수조차 없었다. 그저 맨몸으로 인큐베이터에 기대어 선 것이 최선이었다.

신체적 격차가 뻔히 보이는 중에도 강수혁은 약간의 동정이나 일말의 자비도 없이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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