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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 (9)화 (9/256)

9화

“하여간 에스퍼 놈들은 싹 다 미친 변태야.”

언젠가 최정 대령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김윤조 이상으로 그 말을 통감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그때 윤조는 처음으로 가이드가 된 것을 후회했다.

뇌와 신경에 기반하는 시스템인 만큼, 에스퍼에 대한 가이드의 강한 거부감은 즉시 섬세한 프로세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덕분에 가이드 시스템 자체가 붕괴할 뻔했다. 그때 강수혁이 얼마나 득의만만하게 나왔는지.

프로그램을 빨리 수정하여 안정화하라는 군부의 명령을 별도로, 윤조는 승리에 도취된 강수혁의 낯짝이 보기 싫어 이를 악물고 대책을 궁리했다. 그 결과 가이드_002 프로그램 ‘일시 분리’가 개발되었다.

일시 분리 상태에서 윤조는 기본적으로 뇌파 동조를 유지하되 특수 위성을 통한 음성 보고만 받는다. 실시간 감정 전달은 차단된다.

‘변태 새끼의 속마음은 전혀 알고 싶지 않아.’

속으로 툴툴대면서 윤조는 천천히 리조트 위층으로 올라갔다.

비상구로 사용하는 계단의 철제문은 열려 있었다.

아파트형 숙박 시설이기에 각 객실은 철제 현관문이 있었고 오토록이 걸려 있었다. 카드키 없이는 밖에서 열 수가 없었다. 전투복 기능을 이용하여 열려고 해도 일반 아파트처럼 비상시 건전지를 대는 방식이 아니라 불가능했다.

한쪽 객실 앞에 선 윤조가 등허리 쪽 권총 홀더에 막 손을 대던 참이었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옆 객실 문이 나가떨어졌다. 그 앞에선 강수혁이 올렸던 한쪽 발을 막 내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윤조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그를 지나 객실로 들어갔다.

건물 밖과 달리 안은 깨끗했다. 건물용 이중창이 깨지지 않고 유지된 덕분이었다. 군화를 신은 채로 거실을 지나 메인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도 멀쩡했다.

‘적어도 맨바닥에서 허리가 부러지는 사태는 면했군.’

침대를 확인한 김윤조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강수혁이 멋대로 망가뜨린 윤조의 전투복은 가이드 시스템의 일부였다. 전투복 또한 프로토타입으로 이걸 대체할 양산품이 없다는 뜻이다. 더 망가지면 전투복 없이 강수혁의 난폭한 반응을 감당해야 한다. 아무리 강화 신체를 가진 가이드라도 그럴 자신은 솔직히 없다.

군의 자산 보존에는 일절 관심 없는 놈이 귀중한 가이드 전용 전투복을 더 망치기 전에 알아서 벗기로 했다.

“먼저 벗겠습니다.”

덤덤하게 보고한 윤조는 곧바로 목 옆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망가진 조인트 때문에 서너 번 꾹꾹 눌러야 했다. 다행히 전투복의 잠금이 풀렸다.

전투복 안에는 땀 흡수와 피부 보호를 위해 특수 재질로 만든 슈트 내피를 입고 있었다. 말이 좋아 내피지, 막말로 전신 쫄쫄이였다. 내피도 빠르게 벗어 먼지가 묻지 않도록 잘 말아 전투복 위에 올렸다.

“후.”

서늘한 기운에 윤조의 입술 사이로 낮은 바람이 빠졌다.

내피는 피부에 직접 착용을 기본으로 한다. 한마디로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는다. 따라서 내피를 벗은 지금, 윤조는 완벽한 나체였다.

옷을 정리하고 돌아서던 윤조는 먼지 맞은 화장대 거울을 발견했다. 흐린 유리에 볼륨감 없는 몸이 비쳤다.

목둘레에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가이드로 거듭나는 동안 인큐베이터 안에서 있었던 탓에 피부는 백지였다. 반대로 입술과 젖꼭지 부분은 핏기가 너무 비쳐 유달리 붉었다. 손톱, 발톱도, 심지어 팔꿈치에 발꿈치, 무릎까지도 성인 남성답지 않게 분홍빛이 강했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심미성을 위해 일부러 유지한 머리카락과 눈썹을 제외한 다른 체모는 완벽하게 제거되었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겨드랑이와 사타구니가 일반 피부처럼 매끈했다. 윤조는 자연스럽게 인상을 썼다.

원래부터 이런 건 아니었다.

가이드 프로젝트에 참가하기 전 김윤조는 일반인 출신 하사관으로, 제법 매끈한 얼굴 외엔 지극히 평범한 성인 남자였다. 체모도, 피부도 특별할 게 없었다.

‘목매달아 죽은 귀신 같네.’

제 꼴을 외면한 윤조는 침실과 거실을 잇는 입구에 멀뚱히 선 사람을 응시했다.

“저는 준비되었습니다.”

선언을 끝으로 윤조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객실 문을 걷어찬 이후로 객실까지는 묵묵히 따라 들어온 강수혁은 아까부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싸늘하게 이글거리는 시선은 윤조의 미간을 향했다. 꼭 저격용 레이저 같았다.

“소령님?”

왜 그러냐고 묻는 대신에 호칭했다. 부른 의도를 알 텐데도 강수혁은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감정 전달을 차단했기에 그의 속내가 어떤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분노와 짜증으로 점철된 좀 전과 크게 다르진 않을 거다. 분수에 넘치도록 잘생기게 태어난 안면을 사정없이 구기고 있었으니까.

가만히 있어도 기분 나쁜 일은 피할 수 없기에 빨리 해치운 후 복귀하고 싶었다. 윤조는 좋게 권했다.

“빨리하시죠.”

“뭘?”

무감각한 음성이 돌아왔다. 모르는 척에 기가 막혔다.

‘개새끼.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평소엔 기절하고 싶을 만큼 제멋대로에 폭력적으로 나오더니. 오늘은 패턴을 바꾼 모양이었다. 참을 인을 계속 새기면서 윤조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가 내렸다.

“그럼 제가 시작하겠습니다.”

이쪽에서 주도적으로 시작한다고 해서 결과적으로 다를 건 없다.

두 손을 군복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무심히 선 남자에게 다가섰다. 티셔츠를 찢어 버린 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강수혁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렸다. 키 차이가 제법 나서 체중이 발 앞쪽으로 쏠렸다.

윤조의 상체는 볼 것이 없지만, 강수혁은 달랐다. 그는 체구가 큰 만큼 흉통도 크고 흉근도 대단했다. 불룩 솟아 있기에 살짝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명치가 닿았다.

헐벗은 상체가 맞닿아도 강수혁은 요지부동이었다. 윤조가 가까이 다가가면서 미간에 내내 고정한 시선을 유지하느라 고개가 살짝 내려왔을 뿐이었다. 그는 꼭 어떻게 나오는지 흥미롭게 지켜보는 듯했다. 그의 양 입꼬리가 미미하게 위로 향했다.

‘누가 즐긴다고? 남말하고 있네.’

마음에 들지 않지만, 가슴팍만 대고 어정쩡하게 서 있을 수는 없었다.

딱딱한 어깨에서 손을 내린 윤조는 대신 두툼한 허리께에 손을 뻗었다. 우람한 옆구리를 감싼 피부는 언제나처럼 질기고 뜨거웠다. 모든 에스퍼가 그런지, 혹은 강수혁만 유달리 그런지 확인하기 어렵다. 솔직히 다른 에스퍼의 속살 온도 따위 알고 싶지도 않고.

양 옆구리에 손바닥을 미끄러뜨리는 중에도 강수혁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꿈쩍 않는 태도에서 옹졸한 고집이 느껴졌다.

‘진짜 유치하게 나오네.’

보란 듯이 딱딱하게 굴곡진 흉근에 희고 판판한 가슴을 기댔다. 뒤이어 다리에 힘을 살짝 뺐다. 허리가 뒤로 빠지면서 상체를 강수혁에게 한껏 기대는 자세가 되었다. 누가 보면 아양 떠는 줄 알 것이다.

좋든 싫든 접촉 부위가 넘어진 것만으로도 이쪽 긴장도가 올라갔다. 덩달아 맥박도 조금 빨라졌다. 창백한 얼굴엔 홍조가 돌았다. 혹여 성적 흥분이라고 상대가 착각하지 않기를 바랐다.

‘아니 착각해도 괜찮나? 더 빡칠 테니…… 아니. 이런 생각 그만하자.’

열탕에 들어갈 때처럼 괜히 숨이 가빠졌다. 옅은 숨이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샜다. 얼굴이 상대의 흉근에 가까이 있는 탓에 꼭 가슴에 입술이 닿을 듯 말 듯했다. 광대 인근에 열감이 치솟았다. 숨을 돌릴 겸 고개를 들어 재수 없는 낯짝이 어떤 상태인지 확인했다.

이렇게 몸을 비비고 있는데도 강수혁은 오히려 아까보다 더 무표정했다. 흥미가 점점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 진짜. 개새끼. 계속 가만히 있을 건가.’

아래를 보니 활동성을 강조하여 넉넉하게 제작된 군복 바지 위로 성적 흥분의 증거가 완연했다. 어떻게든 좋게 달래 보려 했더니. 짜증이 울컥 치밀었다.

윤조는 입술을 모아 강수혁의 가슴 한복판에 쿡 찍었다.

쪽.

이번에는 효과가 있었다.

강수혁의 미간과 입매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번에는 튼실한 흉근을 앞니로 살짝 긁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싸늘한 질타가 날아들었다. 하지만 윤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작전 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에스퍼의 안정화를 시도하는 중입니다만.”

“안정화를 시도?”

강수혁은 꼭 무슨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사람 같았다.

“예.”

죽일 듯이 노려보는 남자를 향해 윤조는 의연하게 대답했다.

“안정화를 위한 방법이 정말로 이것뿐이야?”

“이러려고 여기에 착륙한 거 아닙니까.”

“누가 그래?”

강수혁의 발화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뭐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윤조는 특수 위성에게 분석을 요구했다. 2초 동안 강수혁을 스캔한 특수 위성은 음성으로 보고했다.

-분노, 가학, 짜증, 혐오, 혼란.

‘뭐야, 분노에 가학이면 성 충동 패턴 맞잖아.’

윤조의 다른 자아인 AI가 여태까지 수집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성욕임을 재확인했다. 신뢰도는 99.99%였다. 이쯤 되면 강수혁이 아니라 강 분노, 강 짜증에 이어 강 성충동이라고 불러야 한다.

대단하신 에스퍼님께서는 가학 충동을 심하게 느끼는 중에도 일절 움직이지 않았다. 뭐 때문에 그러는지 몰라도 유치했다. 윤조의 무한한 인내심이 바닥을 보이기 직전이었다.

유치한 새끼를 상대로 괜히 말로 신간하느니 대놓고 물어보는 편이 낫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알려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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