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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 (8)화 (8/256)

8화

윤조는 헬멧 조인트를 긁었다. 완전히 망가진 것을 우그러뜨려 놓은 거라 벗을 방법이 요원했다.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강수혁을 힐끔거렸다. 헬멧을 망가뜨린 장본인이 혀를 차며 다가왔다. 구토감에 헐떡이는 윤조를 난폭하게 잡은 그는, 말 그대로 헬멧 조인트를 찢어 냈다.

콰직.

완전히 박살 난 헬멧이 바닥을 뒹굴었다.

“허억! 허억!”

윤조는 머리를 허리까지 숙인 채로 헛구역질을 했다.

할 수 있는 한 빠르게 공기를 빨아 마셨다. 격렬한 심호흡을 반복했다. 실제로 토하는 건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 전투복 내 산소가 아주 모자란 건 아니었으므로, 어지러움과 헛구역질은 모두 빠른 비행 때문이었다.

“후우.”

뒤집힌 속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대신 목이 아팠다. 아무래도 조인트를 뜯어내는 과정에서 멍이 심하게 든 것 같았다.

윤조는 티타늄에 짓눌린 자국을 손으로 문지르면서 허리를 세웠다.

타타타타타. 타타타타타.

거대한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소음이 윤조의 고막을 때렸다. 고개를 들자 수송 헬기 두 대가 강진시 중심가 쪽으로 날아갔다. 최정 대령이 이세명을 구조하기 위한 팀을 서둘러 파견한 듯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모은 윤조는 흐릿한 시선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여기는?”

눈앞에 하얀색 대리석 건물이 보였다. 특수 위성이 주변을 빠르게 스캔해서 윤조에게 자료를 전송했다.

여긴 강진시에 게이트가 열리기 전까지 성황리에 운영되던 리조트였다. 하지만 지금은 영업을 중단한 상태였다.

‘이런 게 여기 있는 줄은 또 어떻게 안 건지.’

폭격 흔적은 없었다. 대신 관리하지 않아서 무성하게 자란 수목과 묵은 낙엽이 갈라진 보도블록을 반쯤 가렸다. 건물 자체는 깨끗했다. 하지만 사람이 떠난 자리 특유의 을씨년스러움이 풍겼다.

파괴된 시가지와 달리 방사능 농도가 훨씬 옅었다. 일반인에게는 여전히 유해하지만 에스퍼와 가이드에게는 안전 등급이었다. 윤조 뇌 속 감각기의 방사능 경고 단계가 빠르게 떨어졌다.

‘그런데 왜 여기에?’

윤조는 의문을 담고 강수혁을 봤다.

“뭘 봐?”

“아, 예.”

혹시나 윤조의 상태를 눈치채고 가까운 리조트에 착륙한 걸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빠르게 지웠다. 멀미를 가라앉히라고 잠시 쉬어 가는, 인간적인 배려심이 강수혁에게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 게 있었다면 애초에 무지막지한 속도 자체를 내지 않았을 거다.

순전히 본인 필요에 의해 여기에 멈췄다고 보는 편이 타당했다.

버려진 리조트.

리조트는 기본적으로 숙박 시설이다. 거기서 강수혁의 의도를 파악했다.

‘급하기도 하지, 짐승 새끼.’

자신을 귀찮게, 열받게, 짜증 나게 한 대가를 당장 치르라는 거다. 그럼 그렇지. 쓰레기 새끼.

여기서 당황하면 지는 거다. 미친개를 길들일 때는 절대 겁먹은 티를 내지 말 것. 의연하게 대처할 것. 애청하는 문제견 훈련 예능을 통해 배운 가르침을 다시 한번 새겼다.

“물이 나오려나요? 깨끗한 침대라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윤조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과 톤으로 말했다.

그러자 계속 비웃음과 짜증 쪽을 가리키던 강수혁의 뇌파가 변했다. 비꼬인 감정 위에 혼란과 의문이 덧씌워졌다. 뭐가 궁금한 건지 몰라도 험한 꼴 보는 건 확정된 미래였다.

윤조가 먼저 움직였다.

아직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건물 입구로 향했다. 메인 게이트 앞에 놓인 낮은 대리석 계단에 막 한 발을 올린 윤조는 강수혁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걸 깨달았다.

“안 오십니까?”

양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선 강수혁이 입을 열었다.

“영감도 그렇게 걷진 않겠어. 한 세월 걸리겠군.”

“오늘 안에는 도착할 겁니다. 그리고 현재 건물 진입 속도는 제가 더 빠른데요.”

지지 않고 대꾸하자 강수혁의 뇌파 중 짜증 패턴이 좀 전보다 더 강하게 바뀌었다.

“비행 좀 했다고 다리가 풀리다니. 하여간 가이드 따위, 나약해 빠졌어. 조깅하다가 자빠지진 않고?”

나약하다는 비난은 부당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가이드 윤조는 일반인보다 월등히 강하다. 음속을 능가하는 비행 속도를 전투복 하나로 버틸 정도였다. 단지 초음속 비행을 가벼운 조깅으로 치부하는 강수혁 본인이 지나치게 강한 거다.

“소령님에 비하면 뭐, 나약하니까요. 좀 살살 다뤄 주시죠.”

윤조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소령님 상대하고 난 후에 걷다가 넘어진 적이 있긴 있습니다.”

비꼴 의도는 전혀 없었다. 강수혁의 갖은 지랄을 한 바탕 상대하고 나면 정말로 힘이 쪽 빠지고 다리가 후들거려서 도무지 똑바로 걷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군인인데 내내 누워서 요양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빠른 복귀를 위해 가벼운 스트레칭과 속보(速步)를 통해 컨디션 조절을 시도할 때 종종 넘어지기도 했다.

“나약한 두부 새끼.”

강수혁의 뇌파 중 분노 패턴이 점점 강해졌다. 사실상 짜증이나 의구심이 살짝 치솟았을 때를 제외하곤 내내 화를 내고 있었다. 혐오 수치도 떨어지지 않았다.

일상적인 대화에도 일일이 반응하며 예민을 떠는 성격으로 어떻게 군부에서 그것도 게이트와 외계 생명체에 대항하는 최전방에서 버티는지 신기했다.

‘하긴 저러니까 군에서 가이드 프로젝트를 한 거겠지. 자업자득이야.’

통제가 안 되는 성격 나쁜 놈과 뇌파로 항상 연결되어야 한다니. 가이드가 된 자체는 후회하지 않지만 하필이면 자신의 에스퍼가 강수혁이라는 점이 별로였다. 다른 멀쩡한 에스퍼도 많은데 하필. 신은 왜 저런 비뚤어진 새끼에게 지나친 힘을 부여해서 죄 없는 가이드의 운명까지 망치려고 하는가.

윤조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계속 그렇게 계실 겁니까? 한세월 걸리는 건 제가 아니라 소령님 같습니다만.”

잔소리를 덧붙이자 거리를 두고 서 있던 강수혁이 드디어 움직였다. 슬로모션처럼 게으르게 발을 놀리는 데도 다리가 워낙 길다 보니 윤조와의 거리가 금방 좁혀졌다. 누구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필사적으로 걷는데. 하여간 세상은 불공평했다.

가까이 다가온 강수혁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하고 싶어서 안달 났나. 누구는 기분 더러워 죽겠는데.”

시체와 같은 평온을 유지하던 윤조의 감정 그래프가 일순간 트레몰로처럼 우르르 진동했다. 오늘은 윤조가 그를 먼저 건드렸다. 그래서 되도록 참으려고 했다. 하지만 내내 짜증을 공유하는 이쪽도 슬슬 영향을 받게 된다.

‘누구는 뭐 좋아서 이러는 줄 아나. 시발.’

제 성질머리가 더러운 탓이 가이드가 개발된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이기적이고 민감하고 속 좁기가 꼭 덜 자란 사춘기 남고생 같았다.

‘참자, 참아.’

윤조는 심호흡을 반복하면서 감정을 가라앉혔다. 강수혁을 상대로 감정적으로 나가 봐야 이쪽 손해다. 최대한 침착을 유지하는 편이 낫다.

‘AI, 가이드_002 프로그램 실행.’

눈을 감은 윤조가 명령했다.

-가이드_002 ‘분리’ 프로그램을 실행합니다. 감각 수용을 정지하고 뇌파 동조를 최저 단계로 유지합니다. 응급 코드 준비 완료.

특수 위성이 대답했다.

뇌파 동조는 ‘연결’이 기본이다. 가이드 시스템을 재부팅할 때 윤조의 의식이 들기 전부터 먼저 실행되는 최우선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강수혁도, 그리고 김윤조도 사람인 이상 때로는 서로에 대한 뇌파 동조를 유지하기 힘들 때가 있다. 예를 들자면 그가 능력을 사용한 후 ‘뒷감당’을 할 때라든가.

윤조는 얼굴을 찡그렸다. 정말 이해 불가였다.

‘어떻게 생겨 먹으면 뇌파 동조 부작용으로 성욕이 폭발하지?’

어떤 변태적 욕망을 품고 있으면 능력을 쓰면서 발기한단 말인가.

가이드 프로그램의 첫 테스터 에스퍼가 되기 전 강수혁은 이러지 않았다. 아니다. 정정한다. 그런 적이 없는 건 확인한 바가 없고 다만 그런 요구를 공개적으로 한 적이 없었다.

군부가 필사적으로 가이드 프로그램에 매달린 주요 목적이 바로 강수혁 통제였다. 프로토타입인 김윤조가 완성되자마자 당연히 강수혁이 테스트 에스퍼로 지목되었다.

말이 거창해서 가이드지, 한마디로 에스퍼용 목줄인 걸 즉시 알아차린 강수혁은 뒤틀린 성질을 감당하지 못해 항명 및 테러를 강행했다. 갓 태어난 김윤조를 거의 살해할 뻔했다. 먼저 완성되어 김윤조의 명령을 기다리던 특수 위성 AI가 위험을 감지하고 패널티부터 부과하지 않았다면, 김윤조는 가이드로서 제대로 된 성과도 내지 못하고 허무하게 사망했을 거다.

이후로도 강수혁은 상부 명령에 순순히 따르는 대신 각종 지랄을 일삼았다. 패널티를 통해 한참 맞으면서 조금씩 폭력의 강도를 낮추고 말을 좀 듣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창의적인 지랄을 했다.

“섰는데?”

뇌파 동조 프로그램 가동 후 각종 테스트를 하던 시기, 강수혁은 가랑이를 가리켰다.

“이거 가이드가 생긴 부작용이니 책임은 당연히 그쪽이 지는 거지?”

처음에는 단순한 성추행인 줄 알았다. 하지만 능력을 쓸 때마다 발기 정도는 점점 심해졌다. 나중에는 서 있지 못할 지경이 되기도 했다. 뇌파 동조 단계를 낮추면 발기 정도가 누그러지고 높이면 즉시 폭발 수준에 이른다.

이런 부작용을 예상치 못한 군 상부와 프로젝트 연구진들은 대단히 놀랐다. 충격을 감당하지 못해 뇌가 정지한 사람도 있다. 바로 김윤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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