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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 (6)화 (6/256)

6화

강수혁을 익히 겪어 본 사람들은 능력도 없는 일개 일반인 주제에 위대한 에스퍼님 앞에서 상관이랍시고 으스대는 꼴이 배알이 뒤틀려서 그렇다고 믿었다. 윤조도 최근 그쪽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에스퍼는 대부분 인간에게 호의적이었다. 개인적으로 꺼리거나 미워하는 인간이 있다고 해도 인류 자체를 혐오하진 않는다. 인간의 바탕으로 진화하였기에 인간을 동족으로 여기고, 인간과의 교류를 통해 정서적 만족감을 얻기 때문이었다. 즉, 에스퍼도 여전히 사람이었다.

‘하지만 강수혁에게는 통하지 않는 얘기지.’

하필 군단 전체와 맞먹는 화력을 보유한 최강의 에스퍼가 미치광이였다. 군이 가이드 프로젝트에 매달릴 이유가 충분했다.

윤조의 죽음은 강수혁에 대한 강제력 상실과 같다. 통제에서 벗어난 강수혁이 국가와 군부에 어떤 타격을 입힐지는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모두 한 가지에는 동의했다.

적어도 가이드 프로젝트에 관여한 군 고위층과 연구진은 다 죽을 거라는 것.

김윤조는 책임지고 장수해야 했다. 장수가 아니라도 최소한 강수혁보다는 나중에 죽어야 했다. 시답잖은 사고나 소소한 작전에서 잃을 순 없다.

강수혁은 김윤조 보호라는 명목으로 군 수뇌부를 협박해 가이드 전투복에 대한 접근 코드를 얻어 낸 것이 분명했다. 쥐 쫓아내겠다고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통째로 넘긴 꼴이었다.

조작을 끝낸 강수혁은 패드에 뜨는 수치를 확인했다. 그러곤 던지듯 윤조의 손목을 놓았다. 윤조에게 닿은 손이 더럽다는 듯이 손을 털곤 뺐던 장갑을 다시 꼈다.

일그러진 강수혁의 얼굴이 평소와 같은 불쾌감 어린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어느새 15분이 지나 있었다.

“오늘 비번일 텐데. 누가 출동시켰어?”

“제 비번 날도 아십니까?”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말 돌리지 말고. 누가 시켰냐고.”

“자원했습니다.”

“최정, 그놈인가?”

소령이 대령을 그놈이라고 부른다. 그래도 무방하다. 강수혁이니까. 대령이 아니라 대장이 와도 수틀리면 멱살부터 잡고 볼 놈이니까.

“자원입니다.”

“이게 끝까지 우기는군.”

“사실이 그러니까요.”

쾅!

이번에는 먼 곳 어딘가 빌딩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파편은커녕 먼지도 도달하지 않을 거리였다.

‘능력 사정거리가 더 길어졌나?’

윤조는 즉시 위성 AI에게 분석을 지시했다. 시선이 먼 곳을 향한 건 아주 잠시였을 뿐이었다. 그것도 참지 못한 강수혁이 손으로 윤조의 턱을 잡아 저를 보도록 돌렸다.

“똑바로 대답 안 하지?

강수혁의 분노 수치는 계속해서 상한가를 쳤다.

분석하자면, 강수혁은 현재 할 수만 있다면 김윤조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일상적으로 쓰는 은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단히 폭력적이고 가학적이었다.

잔인한 충동이, 끔찍한 살기(殺氣)가 그것을 시행할 능력과 의욕이 충만한 사람으로부터 강하게 발산되었다. 그런데도 침착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김윤조가 그의 가이드이기 때문이었다. 동조 프로그램이 있는 한 윤조는 안전하다.

반대로 강수혁으로부터 격렬한 증오를 받는 근본 원인이 바로 동조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아이러니였다.

“정말입니다. 자원 맞습니다.”

“그래?”

윤조의 턱을 놓은 강수혁은 제 손을 군복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꼭 제 손이 멋대로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 구속하는 듯했다. 소름이 윤조의 전신을 훑었다.

훌쩍 큰 키를 살짝 기울인 그는 윤조를 삐딱하게 내려다봤다.

“그렇다면 내 거지 같은 기분은 누가 책임지지?”

“제가 집니다.”

“네 주제에 어떻게?”

“무엇이든 시키십시오.”

윤조는 ‘무엇이든’이라는 말에 특히 강세를 주었다.

“무엇이든?”

윤조를 쏘아보는 상대의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아니나 다를까. 열받은 중에서도 그쪽으로의 흥미는 가득했다. 이럴 줄 알았다.

“그게 무엇일 줄 알고?”

가라앉은 음성이 위협적이었다.

무엇인지 왜 모르겠나. 강수혁이 제게 요구할 대가는 하나뿐이다. 그걸 본인도, 윤조도 안다.

“동조 프로그램은 확실하게 오프 시켜 두겠습니다.”

대답 대신 강수혁이 좋아할 조건을 제시했다.

“오프 지속 시간은?”

“2시간.”

삐-.

대답하자마자 강한 파동이 윤조의 프로세서를 뒤흔들었다. 뇌 안 경고등이 켜졌다.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강수혁이었다. 그의 뇌파가 요동치고 있다.

분노와 짜증이 기본이긴 한데 다른 뇌파 패턴이 끼어 있었다. 드물게 감지하는 그 패턴이 정확하게 어떤 심리나 감정인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다만 가학 성향과 관련이 있다고 막연하게 연관시켰다.

윤조는 불분명한 패턴을 따로 ‘지랄-01’이라 명명했다. 그 지랄-01 패턴이 평소보다 더 강하게 드러났다.

“두 시간이 부족하십니까? 세 시간으로 할까요? 그 이상은 음, 비뇨기과 상담이 필요하지 않나 싶은데요. 그런데 에스퍼 쪽은 군에서 비뇨기과도 봅니까? 일반 병원은 못 가지 않습니까.”

“배짱 좋군.”

강수혁의 입매가 비웃음으로 비틀렸다. 그에게선 악의가 풀풀 풍겼다. 역시 좋은 쪽 감정은 절대로 아니다. 애초에 강수혁이 윤조를 향해 좋은 감정을 품는 자체가 어불성설이긴 했다.

“장소는…….”

윤조가 적당한 지역 후보를 제시하려던 때였다.

그어어어어억.

비명도 한숨도 그렇다고 명확한 짐승의 울음도 아닌 기괴한 소리가 울러 펴졌다. 슬라임이었다. 강수혁과 말씨름하는 사이 열심히 기어 온 괴물들이 도로 주변으로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네요.”

저것들은 느릿느릿한 속도로 사방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전투복이 멀쩡했다면 신호를 받아 각 개체의 수와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 누구 씨 덕분에 불가능했다. 대신 머드형이 발산하는 강력한 전파가 윤조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산소 발생기와 방사능 제염 장치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방사능이 치솟은 덕분이었다.

모터가 달린 등이 뜨끈해지기 시작했다. 과열 방지용 미세 환기 장치가 따로 있기에 열기가 전투복 착용자에게 미치지 않게 되어 있다. 원래는 그랬다.

아무래도 조인트 고장이 내부에 여러 가지 오류를 일으킨 모양이었다.

“강수혁 소령님.”

“닥쳐.”

강수혁의 짜증 섞인 명령에 윤조는 일단 입을 다물었다. 슬라임 괴물 무리를 인지했을 텐데도 강수혁의 시선은 윤조에게 꽂힌 채로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전해지는 상대의 뇌파 속에는 성적 흥분의 증거가 가득했다.

파장이 너무 빠르고 커서 흉악한 성범죄 따위는 비견되지 않을 정도였다. 폭력 계통 파장도 성 충동에 동조하여 진폭이 점점 커졌다. 위험 수위까지 급격하게 치솟았고 실제로 특수 위성의 AI가 대비 상태에 들어갔다.

‘무슨 상상을 하는데 패턴이 이렇게 지저분해?’

짜증 나는 인간 리모컨 새끼를 낱낱이 해체하고 그 내장을 갈기갈기 찢은 후에, 머리는 짓밟아 부수고 남은 잔해는 완벽하게 소거하는 상상을 하는 중인가?

‘좀 더 저열하고 잔인할 쪽일지도.’

비슷한 뇌파를 발하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그에게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강수혁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네 재수 없는 눈구멍에 좆을 박는 상상.”

잘린 목의 기도에 좆 대가리를 쑤셔 박고 덜그럭거리는 윤조의 턱에 혀가 잘릴 정도로 흔들 거라는 얘기도 한 적이 있다.

일부러 충격을 주려고 대충 지어낸 막말 같은데 아예 실행하지 못할 놈은 또 아니라는 점이 섬뜩했다.

‘오늘은 아니겠지. 오늘만 아니면 됐어.’

괜히 눈구멍이 아렸다. 저도 모르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미친 새끼.”

강수혁이 갑자기 욕했다. 뇌파 패턴에서 지랄도가 급상승했다. 뭐에 또 심사가 뒤틀렸는지 의문이었다.

또라이 에스퍼를 상대하는 사이 슬라임 괴물과의 거리는 시시각각 좁혀졌다.

흘러내리는 형체들 사이에서 괴이한 빛을 발하는 촉수가 삐져나왔다. 얇은 밧줄 굵기의 촉수 수십 가닥이 이쪽으로 느릿느릿 다가왔다. 겉보기에는 우스워도 상당히 위험했다. 초(超) 진동 기관이어서 보호 장비 없이 맨살에 닿을 시 즉시 세포가 분해된다.

‘전투복은 견디지만 그래도 오래가진 않을 텐데.’

저 위험한 게 자꾸 오는데 이대로 있을 건지. 윤조가 의문을 담고 강수혁을 바라볼 때였다.

슈왁.

바람이 갈라지는 파열음이 사방으로 뻗었다. 괴물의 촉수가 우수수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긴 유기체는 굵은 소금을 맞은 미꾸라지처럼 퍼덕였다. 수십 개가 동시에 그러는 광경은 불쾌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윤조는 눈가를 찌푸렸다.

강수혁의 힘은 기본적으로 염력이었다. 물질을 조종하는 능력으로 에스퍼 사이에선 꽤 흔했다.

강수혁의 특별함은 염력 자체가 아니라 조종할 수 있는 물질의 범위와 사용 방법의 창의성에 있었다. 그는 작게는 분자 단위에서부터 크게는 초고층 빌딩까지 조작할 수 있다. 기가 막힌 섬세함과 압도적인 화력을 동시에 보유한 염력 능력자는 흔치 않다. 거기다가 염력의 창의적 사용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분명히 지금도 공기 분자를 조작해 진공 칼날을 만들어 촉수를 잘라냈을 것이다.

‘힘 센 거 알겠으니까 예고 좀 하지.’

속으로는 툴툴대면서도 윤조는 멀끔한 표정을 유지했다.

촉수가 잘렸다고 딴에는 달려오던 슬라임 괴물 전체가 갑자기 멈추었다. 잠시 후 괴물의 상단 부분이 일제히 미끄러졌다. 꼭 실력 없는 그래픽 디자이너가 만든 장면처럼 위화감이 철철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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