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달이 엄청 커.”
처음에는 루나가 플럼버의 달을 가지고 온 줄 알았다. 그런데 나보다 그가 더 놀라워했다.
“지구에 와서 저런 달은 처음 보는 것 같아.”
나는 휴대폰에 충전케이블을 연결하고 전원을 켰다. 캘린더를 보니 오늘이 음력 보름이었다.
“음력으로 보름이래. 그래서 보름달 떴나 봐. 그런데 저렇게 큰 달은 나도 처음 봐.”
뭔가 어색한 건가. 루나는 평소처럼 조잘거리지 않았다. 깊은 생각에 빠진 것 같기도 하고 고민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설마 후회하는 건가. 아니면 나를 원망하나. 우리 관계가 새롭게 전개되는 것이 아직도 못마땅한 건가.
우리는 끝없이 펼쳐진 도로를 달렸다. 달은 끈질기게 우리를 따라왔다. 3월인데도 밤에는 겨울의 기운이 남아있었다. 한적한 도로 위에 눈 같은 서리가 내려앉았다. 그 살얼음 위를 달빛이 스치며 지나갔다. 달빛을 받은 검은 도로는 얼핏 일렁이는 호수처럼 보였다. 노란 중앙선이 부표처럼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졌다. 그 모든 단조로운 패턴을 응시하며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 키스 잘하는 것 같아.”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분위기를 업시키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내심 신기하기도 했다. 야한 영화도 별로 보지 않은 내가 하는 것치고 신기에 가까운 테크닉이었다. 그런 걸 내가 할 줄 알 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에 내심 기특했다.
“그런 걸 본능이라고 하나 봐.”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나는 어색하지는 않았으나 그가 어떤 기분인지 알고 싶었다. 이것으로 우리 사이에 모종의 발전이 있을 거라 기대해도 되는지, 오늘부터 그가 날 연인으로 대해줄 것인지.
키스 때는 그도 좋아하고 있다고 느꼈는데 지나고 나니 꿈인가 싶었다. 그가 줄곧 나를 외면하고만 있으니 더 그랬다.
용기를 내 고개를 돌렸다. 수려한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찬연한 달의 광채가 봉긋한 이마와 날렵한 콧날에 은빛 테두리를 만들었다. 달빛으로 빛나는 눈동자는 호수에 잠긴 또 다른 달처럼 촉촉하게 일렁였다. 그 때문에 얼핏 그가 울고 있는 줄 알았다.
“형.”
귀찮다는 듯 그가 눈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왜…?”
“화났어?”
“내가 왜 화가 나.”
“내가 키스해서 화난 거야?”
이번에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신경질적으로 오디오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하필이면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곡이 블링크의 ‘Kiss me’였다. 그의 손가락이 공중에서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좀 전보다 더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버튼을 눌러버렸다.
“우리 키스할 때 되고도 남지 않았어?”
이번에는 반응이 있었다. 다만 나쁜 쪽으로.
내 쪽을 ‘파닥’ 돌아본 얼굴에는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화가 아니라 짜증이 난다는 건 무슨 뜻일까.
“제발, 단 5분이라도 그 빌어먹을 키스 소리 좀 안 하면 안 되겠니?”
“응…?”
“잠깐만이라도 입 좀 다물라고.”
흥분했다고 하기에는 침착해보였고, 침착하다고 하기에는 흥분한 것처럼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가 토실거리는 입술을 윗니로 살짝 깨물고는 ‘파닥’ 고개를 돌렸다.
잠든 도시는 막힘이 없어서 어느새 차는 우리 동네로 들어섰다. 저 멀리 루나커피의 간판이 보였다. 우리를 쫓던 달은 이제 그 위에 떠 있었다.
어찌 됐든, 미니밴이 대문 앞에 서자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바보 같지만, 아까는 정말로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 긴 하루였다.
***
아직 자정 전이다. 내 생일은 지나가지 않았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주방으로 가보니 역시나 루나가 있었다. 평소처럼 환한 미소로 맞아주지는 않았지만.
사실 그는 아주 우울해보였다. 내가 들어갔을 때 그는 허공을 노려보며 반듯하게 앉아있었고, 식탁에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많은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중앙에는 내가 좋아하는 가나슈 케이크가 놓여있고 루나가 직접 만든 설탕 고양이와 초가 꽂혀있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그 앞에 마주 앉았다.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잔뜩 화난 얼굴로 말했다.
“생일 축하한다.”
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초를 훅 불었다. 그가 옆 의자에서 뭔가를 집어 들더니 내게 내밀었다. 핑크색 리본이 달린 하늘색 상자였다.
“이게 뭐야?”
“생일 선물.”
나는 군소리 없이 상자를 열어보았다. 엄청나게 비싼 명품 지갑이 들어있었다. 내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지갑을 꺼내 열어보니 조그만 생일 카드와 신용카드가 꽂혀있었다. 생일 카드를 펼쳐보았다.
[사랑하는 내 동생 은별아.
열아홉 번째 생일 축하한다. 어른이 된 것도 축하해.
너무 세속적인 선물 같지만 이제 대학생이자 사회인이 되는 너에게 풍요로움을 선물해주고 싶었어. 배우 생활하려면 필요한 것도 많을 거야. 원하는 거 다 사도록 해.
- 너의 영원한 형, 루나가.]
나는 생일 카드를 흔들었다.
“무슨 뜻이야?”
“네 앞으로 계좌를 만들어놨어. 원래 거래하는 은행이니까 그냥 사용하면 돼.”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루나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루나가 돈 얘기를 꺼낼 때는 플럼버행을 고려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래서인가.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서, 그래서 짜증이 난 걸까.
그런데 우리에게 정말로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면, 그래서 루나가 내 키스를 못마땅해하는 거라면, 나는 더 이상 참을 마음이 없었다.
“필립이랑 고양이들은 어디 갔어?”
필립은 물론이고 거실의 고양이 텐트도 비어있었다.
“로저 집에.”
“왜?”
“아빠는 우리 둘이 맺어지기를 바라셔. 알고 있지?”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꼴 보기 싫은지 루나가 미간을 바짝 좁혔다. 나는 이내 시선을 내렸다. 그러고 나니 억울한 마음이 들어 구시렁거렸다.
“오늘 내 생일인데.”
루나가 푸우, 한숨과 함께 나를 불렀다.
“정은별.”
“응…?”
“너도 잘 알고 있겠지만 형은 운명론자야.”
나는 반가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형도 알겠지만 나도 그래.”
“하지만 네가 나타난 후로 내 견해는 꾸준히 변해왔어.”
내 얼굴은 이내 울적해졌다.
“이 어린 녀석을 내 반려자로 맞아야 하는 게 운명이라면, 그딴 운명은 개밥그릇에 던져주는 게 옳은 일이라고 말이야.”
나는 절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형.
“그때부터 나는 운명이란 상황에 따라 족쇄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됐어.”
“아니야, 형.”
“넌 어때?”
“아니라니까.”
“너한테 운명은 어떤 거냐고.”
“그야말로 운명이지! 절대복종해야 하는 것.”
“그러니까, 넌 운명이 의무라고 생각하는 거야. 맞지?”
“당연하지!”
유도신문 비슷한 것을 당했다는 생각이 든 건 마지막 말을 뱉은 직후였다. 루나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너무나 불쾌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혼돈에 휩싸였다. 뭐지? 내가 뭘 잘못 말한 거지?
“형. 무슨 뜻으로 묻는 거야?”
“말 그대로야. 모든 사람이 이정표를 보고 아무런 의구심을 갖지 않듯이, 너도 그런 거잖아. 나도 예전에는 그랬다고. 이정표가 오른쪽으로 가라고 하면 당연히 그쪽으로 가는 것과 똑같이, 나도 예전에는 너처럼 운명은 반드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어.”
나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야!”
바로 그거였다. 루나는 늘 스스로 운명론자라며 말하던 대로 그렇게 운명을 믿어주면 되는 거였다. 코흘리개 정은별이든, 멋진 대학생 정은별이든, 그저 나를 받아들이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뭐지? 루나의 굳은 표정은 영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아니… 오히려 좀 전보다 더 불쾌한 얼굴로 그가 눈을 내리깔았다.
“네 생각을 솔직히 말해줘서 고마워.”
“아니, 내 생각이란 게….”
루나는 이제 정상적인 낯빛으로 돌아왔지만 굉장히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뭔지는 몰라도 몹시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을 때 루나가 짓는 표정이었다. 그가 나이프를 내게 건네주었다.
“잘라.”
“응? 으응.”
나는 케이크를 반으로 잘랐다. 루나가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밥 먹어.”
“응? 응.”
그제야 내 배가 등짝에 달라붙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역국에 밥을 말아 후룩후룩 먹다가 보니 루나는 밥알을 세고 있었다.
“형, 사랑해.”
실수였다. 입에 밥을 잔뜩 넣고 그런 고백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역시나 루나는 도끼눈을 뜨고 나를 보더니 이내 밥그릇으로 시선을 내렸다.
“형도 사랑해.”
“오늘 같이 자.”
또 실수였다. 갈비찜 따위를 손으로 집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역시나 루나는 한심하다는 듯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래.”
“알았어….”
당연히 거절인 줄 알고 시무룩하게 대답하며 갈비찜을 우적거리는데, 멍청한 귀가 뒤늦게 뜨였다.
“뭐?”
루나는 턱을 치켜들고 얼굴만큼이나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같이 자자고.”
“정말이야?”
“속고만 살았니?”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싸늘한 얼굴과 이 선선한 대답은 영 매칭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오늘, 같이 자는 거지?”
“정은별.”
“아, 알았어. 얼른 먹을게. 얼른 먹고 들어가.”
“천천히 먹어도 돼.”
“음식이 정말 맛있어. 이렇게 많이 준비할 필요는 없었는데, 암튼 고마워, 형.”
“그러니? 입에 맞는다니 다행이구나. 많이 먹으렴.”
갑자기 예전의 그림책 말투라 분위기가 싸했지만,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그걸 따지지도 못했다. 배도 고팠고 자정이 지나기 전에 루나와 침대에 눕고 싶기도 해서였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나는 여전히 밥알을 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