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95화 (95/103)

<95화>

“죄송합니다만, 감독님.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내 귀에도 지나칠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손을 번쩍 들고 겨우 내뱉은 말에 촬영장에는 찬물을 쏟아부은 것 같은 정적이 일었다. 당연한 일이다. 스태프들은 뭘 잘못 들었나 싶었는지 서로 쳐다보았다.

오승철 감독은 얼굴의 반을 가리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표정을 확인하기 힘들었다. 다만 그의 꽉 다문 입술이 미묘하게 비틀리는 것은 볼 수 있었다. 나는 그게 비웃음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뜨끔했지만 흔들리는 건 아니었다.

다만 어떻게든 내가 건방지거나 이 신성한 현장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중요한 약속이 있다는 사실을 납득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몸을 반으로 접어 인사를 하고는 씩씩하게 외쳤다.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이 아니면 안 되는 약속입니다. 오늘만 아니면 언제든 호출해주셔도 됩니다. 새벽이든 밤이든 감독님께서 부르시면 달려 나오겠습니다. 물론 이 일로 저를 쓰레기 취급하지 않으신다는 전제하에서입니다만.”

이 대표는 열심히 눈짓을 보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대신 동서남북으로 절을 해댔다. 언제든 호출이라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상 이건 끝이었다. 그 정도도 모를 만큼 내 눈치가 꽝은 아니다. 다른 건 어쩔 수 없다지만 이 대표에게 어떻게 사과해야 좋을지 도무지 계산이 안 섰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별수 없었다. 배우라는 직업을 영영 그만둬야 한대도 어쩔 수 없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

“정은별.”

오 감독의 목소리였다. 나는 몸을 펴고 그를 보았다.

“네, 감독님.”

“오늘이 아니면 안 되는 일이 뭔지 알려줄 수는 없나?”

“개인적인 일입니다. 죄송합니다.”

오 감독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는 귀찮은 파리를 쫓아내는 것처럼 손을 휘저었다.

“가봐.”

“죄송합니다!”

나는 또 한 번 인사하고는 촬영장을 뛰어나왔다.

스튜디오는 아울렛 쇼핑몰 정도는 되는 규모였다. 촬영이 한창인 세트를 빼면 간간이 가로등만 켜져 있어 유령도시 같았다. 그 텅 빈 거리를 바람처럼 뛰었다. 생소하고 어수선한 구역들이 휙휙 지나갔다.

지겹도록 긴 통로를 벗어나자 겨우 한적한 거리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황무지 같은 벌판에 8차선 도로가 펼쳐졌다.

“헉, 헉….”

그래도 뛰고 있으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어떻게든 오늘 중으로 루나커피에 닿을 수 있을 거라고 자기 암시를 걸었다.

“갈 수 있어, 갈 수 있어.”

무시무시한 터널을 통과해 삼거리에 다다르자 표지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서울 방향은 직진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다른 이름은 듣도 보도 못한 지역이었다.

휴대폰을 꺼내 보니 부재중 전화는 물론이고 문자가 여러 개 와 있었다. 그새 강 팀장이 보낸 문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패스. 루나의 메시지를 확인하려는데 띡, 기분 나쁜 소음과 함께 화면이 깜깜해졌다.

“젠장!”

[제발 좀 서두르지 말고 형이 지금….]

화면에 떠 있는 문장을 거기까지밖에 읽지 못했다.

“형이 지금, 형이 지금.”

형이 지금, 뭐였을까?

어쨌든 지금은 이동할 방법을 찾는 게 급했다. 나는 빈 택시가 없는지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빈 택시는커녕 지나는 차도 없었다.

“어쩌지?”

휴대폰 충전만 해놨어도 택시를 부를 수 있었을지 모르는데, 낭패였다.

“형이 지금….”

루나가 나를 보고 있었나? 그래서 지금 여기로 온다는 말이었나?

“그랬으면 좋겠다.”

간절히 그가 보고 싶었다. 여기서 이렇게 바보처럼 헤매다가 결국 헛되이 오늘을 흘려보낼 것만 같았다.

물론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닐지도 모른다. 반드시 오늘이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그저 크리스마스나 설날 같은 의미일 뿐. 크리스마스 선물을 다음 날 받는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도 내 마음이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오늘을 그냥 보내다니.

너무나 오랫동안 오늘을 기다렸다.

오늘이 가기 전에 반드시 내 진심을 루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내 마음을 확실한 말로 고백하고 싶었다. 7년 전 루나를 만난 그 순간부터 마음먹은 일이었다.

그런데 무슨 수로 오늘이 가기 전에 서울에 돌아갈 수 있을까? 여긴 전철역도 없고, 가장 가까운 전철역까지 간다 해도 막차 시간이 지나버릴 것이다. 그러니 그가 여기로 와준다면, 순간이동이라도 해서 나에게 와준다면 좋겠다. 우리는 늘 마음이 통했으니까.

이번에도 그럴까? 나는 반신반의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였다.

내 시선의 끝에 불빛 한 줄기가 잡혔다. 나는 그쪽을 향해 황급히 돌아섰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차 한 대가 있었다. 그 차의 형태가 채 잡히기도 전에 내 심장이 뛰었다. 하얀 미니밴, 루나커피 1호점 영업 차량.

“루나….”

루나가 나를 찾아왔다. 역시나 그가 와주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구름 속에 숨어있던 달이 미니밴 위로 떠올랐다. 그 순간 나는 예전의 그 꼬마 정은별이 되어 바람산 자락의 논두렁에 서 있었다.

넋을 잃고 바라보던 나는 정신없이 뛰었다. 나를 알아본 것인지 헤드라이트가 두어 번 깜빡였다. 그러다 아예 깜빡이를 켜고 갓길에 정차했다.

창문이 내려가고 루나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를 보자 내 정신은 순식간에 가출해버렸다. 그를 뺀 모든 것이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빛나는 달처럼 그가 검은 세상 위로 둥실 떠올랐다.

이 세상에 루나만이 존재했다. 오로지 나만이 그를 위해 존재했다. 나 정은별을 존재하게 하는 사람, 루나 블랑슈. 바로 그날, 우리가 처음 만난 그날 밤처럼 말이다.

“형!”

교차로를 쏜살같이 달리는 동안 그가 문을 열고 뛰어나왔다. 다급한 태도와 당황한 얼굴마저도 내 가슴에 불을 질렀다. 그가 특유의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뭐라 떠들었다. 무슨 잔소리인지는 안 들어도 뻔했다.

그가 정신을 다잡기도 전에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를 와락 끌어안고 꼼짝도 하지 못하게 온몸으로 감싸버렸다. 7년간 쌓아둔 감정이 고스란히 얽혀들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나 자신도 말릴 수 없었다. 내 안에서 모든 것이 폭발했다. 그 순간 우리의 머리 위에서 달이 폭발했다. 세상이 화들짝 놀랐다. 검은 하늘은 달의 파편으로 뒤덮였다. 그 바람에 잠들었던 별무리가 깨어났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그 말은 내가 삼켰다. 입술이 포개지자 나는 모든 걸 다 버렸다. 그동안 간직한 꼬마 정은별도, 소년 정은별도, 심지어 인간 정은별도. 그 순간 나는 루나라는 달을 삼킨, 굶주린 늑대였다.

종일 초조했던 만큼 나는 솔직해져 있었다. 내 욕망을 더 이상 감춰야 할 필요도 의무도 느끼지 못했다.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내 정신을 편안하게 놔주었다. 그러고 나니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된 내 손은 루나의 몸을 친친 감아 안고, 내 입술은 루나의 입술을 세차게 벌려 놓았다. 놀란 것일까, 그는 크게 반항하지 않았다. 사실 그가 뭘 어떻게 하든 나는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끓어오르는 욕망 때문에 그 순간 배려심을 챙길 정도로 여유롭지 못했으니까.

나는 오늘 그에게 키스하려고 작정했다. 이 역시 수년 전부터 마음먹은 계획이자 소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하나의 통과의례에 불과했다.

꼬마 정은별은 뽀뽀와 키스의 차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 아이는 루나커피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에게 입을 맞췄던 것이 첫 키스라고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그러나 소년이 된 정은별은 그 차이를 알아냈고, 백번도 넘게 진짜 키스를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의미 있는 날에 첫 키스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맹세컨대, 소년 정은별이 상상하던 키스는 결코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 키스는 아주 아름답고 조용하고 어딘지 서글픈, 아무튼 뭔가 서정적인 것이었다. 소년 정은별의 상상 속에서 키스는 영속을 위한 아름다운 의식이었다. 키스 후의 연인은 다정하게 서로를 바라보면서 달콤한 말을 속삭일 것이다. 사랑해, 너만을 영원히. 뻔하지만 축복을 느끼게 해주는 말들 말이다. 이렇게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요란한 감흥 따위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으응….”

누구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분명 내 목에서 나온 소리일 텐데 루나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어쨌거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와 혀를 섞는 순간, 나는 1초 전의 정은별이 아니었다. 좀 전에 내가 늑대라고 했던가? 그 정도로 순한 짐승도 아니었다. 7년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표범이 우물에 빠진 기분이랄까, 절제가 불가능했다. 내 머릿속은 하얘져버렸고 내 심장은 용광로가 되었다.

혀가 감기는 순간 키스가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키스는 계획대로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키스는 키스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키스는 도화선이었다. 내 몸에 불이 붙어버렸다. 미칠 것처럼 루나를 안고 싶었다. 이건 서정적인 것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나는 그런 내 반응에 몹시 당황했다.

어느새 그는 내 압력에 못 이겨 차 안으로 거의 욱여넣어졌고, 이제 나는 제멋대로 키스에 탐닉해있었다. 말캉한 혀의 감촉과 열정에 사로잡힌 나는 뭔가 간과했다는 사실을 한동안 깨닫지 못했다.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내 눈이 번쩍 뜨였다. 그가 내 목을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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