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93화 (93/103)

<93화>

지구상에서 정은별만큼 간절히 어른이 되기를 열망하던 소년이 있었을까?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은, 바로 오늘부터 나 정은별은 성인이기 때문이다. 어제까지는 소년 정은별이었고, 그래서 누군가 꼬마 취급을 하면 날을 세우고는 했다. 어른이 되어보니 알겠다. 누가 뭐래도 어른이니까 누가 꼬마 취급을 하거나 말거나 성도 안 난다는 사실. 물론 이 남성미 뿜뿜하는 정은별을 꼬마 취급할 사람은 이제 존재하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졸업식 다음날에 루나가 들뜬 얼굴로 말했다.

“생일파티에 친구들 한 스무 명쯤 초대해도 돼.”

“뭐?”

“왜? 너 생일파티에 친구들 초대하는 거 중학교 때 해보고 안 했잖아.”

“이번에도 안 해. 아니, 이번에는 더 안 해.”

“하지만 그냥 생파도 아니고 성인식 아냐. 난 아주 성대하게 열어주고 싶은데.”

“잘못 짚었거든.”

“그럼, 뭐…. 여행 갈래? 지중해 같은 데로 가볼까?”

나는 좀 솔깃해서 아주 조금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 생일이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줄 거지?”

“당연하지.”

“올해 생일은 형이랑 단둘이 보내고 싶어.”

“나랑 단둘이?”

“응.”

루나는 그게 무슨 뜻일까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이내 알았다는 듯이 물었다.

“어디 가고 싶은데?”

“누가 어디 가고 싶대?”

“그럼…?”

“루나커피에서 형이랑 단둘이 보내고 싶다고.”

“루나커피에서? 그럼 고양이들은?”

“고양이들은, 괜찮아.”

“그게 뭐야?”

루나는 입술을 삐죽였지만 싫지만은 않은 눈치였다. 그에게 루나커피는 지중해의 휴양지보다 더 근사한 곳이니까. 아마도 그는 평생 루나커피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말고 살라고 해도 별 불만을 갖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가 여행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나 역시 또래 아이들과는 달리 여행에 대한 로망이 별로 없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나는 그의 취향과 삶의 방식에 동화되었다.

그건 나 스스로도 신기하게 여겨지는 점이었다. 그와 나는 분명 다른 면이 많고 그가 좋아하는 것을 나는 싫어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의 취향을 따라야겠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너무나 자연스레 싫어하던 것들이 좋아지곤 했다.

그래서 나도 어떤 훌륭한 여행지보다도 루나커피에서의 일상이 더 소중했다. 그가 사랑하는 곳에서 그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어른으로서 첫발을 내디디고 싶었다.

그리고 받고 싶은 선물은….

“생선은 루나 블랑슈.”

“뭐라고?”

토끼처럼 팔짝 뛰는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나는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 선물 필요 없다고. 형만 있으면 된다고.”

루나는 발그레한 얼굴로 슬쩍 눈을 흘겼다.

“자식이, 형을 자꾸 놀려. 좋아. 그럼 생일상 차려놓고 기다릴게.”

“뭘 차려. 그냥 마당에서 고기나 구워먹어.”

“그 정도는 형이 알아서 할게. 해주고 싶어서 그래.”

배시시 웃는 나를 그가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도 배시시 웃었다.

“알았어.”

***

황금달 엔터테인먼트는 강남의 유명한 시장 골목에 있었다. 꽤 오래된 4층 건물로, 썩 훌륭한 편은 아니지만 간간이 수리해서 나름 전문적인 공간은 잘 갖춰져 있었다.

지금 나는 연습실 중 한 곳에서 연극 대본으로 대사 연습 중이었다.

“로라는 내가 아는 어떤 여자와도 달라. 이런 말 기분 나빠? 나쁜 의미는 아닌데….”

“오 마이 갓, 너 진짜 국어책 잘 읽는다.”

이죽거리는 인간은 세윤이 형이다. 조그만 회사다 보니 연습실을 같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도 내가 발연기라는 건 알지만 지적받으면 기분 나쁜 건 어쩔 수 없는 듯.

“좀 나아지지 않았어?”

세윤이 형은 몹시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대표님이 널 1년 안에 우리 회사 간판스타로 만들겠다고 하시던데 큰일 났다. 네가 잘돼야 우리도 다 잘될 거 아냐.”

왠지 비꼬는 투지만 옳은 말이니 새겨듣기로 했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대본을 읊으려는데 강호정 팀장이 입구에서 수선을 떨었다. 강호정 팀장은 28세의 남자로 넉넉한 몸집에 성격도 서글서글한 매니지먼트 팀장이다.

“야! 정은별, 빨리 와! 빨리빨리!”

“왜요?”

“오승철 감독이 좀 보자고 했대.”

“저를요?”

“그래! 그 사람 만나기 힘들다 너. 지금 출발해야 해!”

세윤이 형이 팔짝거리며 흥분했다.

“진짜요? 우와! 정은별, 뭐 해? 눈썹 휘날리게 뛰어! 그리고 사인 좀 받아줘.”

오승철 감독은 국내외 영화제에서 수많은 상을 휩쓴 국내 최고의 스타 감독이었다. 영화에 별 관심 없었던 나도 그의 명성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좀 시큰둥했다.

“하지만 그분은 영화감독이잖아요. 난 드라마가 좋은데요.”

그러나 강 팀장은 흥분해서인지 내 말을 잘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내 손을 잡아끌고 날듯이 1층으로 내려왔다. 현관 앞에는 이미 차가 대기 중이었다. 이 대표의 회색 밴이었다. 국내 브랜드에서 출시한 중저가형 차량으로, 사실 밴이라기보다 좌석이 조금 넓은 봉고차였다.

이 대표와 홍수현 과장이 뒤에 타고 있었고 강 팀장이 부랴부랴 운전석에 올라탔다. 홍 과장은 스타일리스트 겸 메이크업 아티스트였다. 내가 타자 그녀가 준비하고 있던 의상을 내보였다.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청바지와 재킷이지만 다 렌탈로 가져온 명품이었다.

“자, 갈아입어.”

20대 여성인 홍 과장 앞에서 훌렁훌렁 옷을 벗는 일도 어느 정도 익숙해진 참이었다. 움직이는 차 안에서 옷을 갈아입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다. 쌔액쌔액 숨을 내쉬고 있자니 퍼뜩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요?”

열렬히 휴대폰을 두들기고 있던 이 대표가 대답했다.

“지금 그 영화사가 소유한 경기도 N시의 스튜디오에서 촬영 중이래. 잘 됐지 뭐. N시 스튜디오는 정말 크거든. 거의 한국의 유니버설 스튜디오야. 언젠가 한번 견학시켜줄 참이었는데 이렇게 가게 되네.”

“몇 시쯤 끝나요?”

“음,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오늘은 공식적인 미팅도 아니고 그냥 면이나 트자는 거니까.”

“오후 6시까지는 돌아올 수 있겠죠?”

이 대표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오전 10시밖에 안 된 시각이었다. 나 역시 그저 확인 차원에서 해본 소리였다.

“아마 그렇겠지.”

나는 안심하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차는 빠르게 달려 머지않아 국도로 접어들었다.

***

오후 4시가 넘어갈 때부터 슬슬 초조해졌다.

현장이라는 곳은 기묘한 장소였다. 세트란, 일상에서 보지 못한 장비들과 가짜로 둘러싸인 하나의 카오스였다. 가짜를 진짜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모든 사람이 한 종류의 신경증에 빠지는 곳. 그 신경증이 이상할 정도로 활기를 만들어냈다.

게다가 오승철 감독이라는 사람은 자타공인 카리스마가 대단해서 사람들을 한 덩어리로 만드는 재주를 갖춘 것 같았다. 세세한 사항까지 일일이 지적을 하면서도 지치는 법이 없었다. 한 마디로 추진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에서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누고 하염없이 오 감독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감독 말로는 액션 신을 촬영 중이라 평소보다 신경이 더 곤두서 있다고 했다. 액션 감독과 말씨름도 제법 길었다. 그들이 완벽한 한 신을 건지기 위해 존경스러울 정도로 수많은 ‘커트’를 외치는 동안 내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멋진 곳이지만 내 마음이 콩밭에 가 있어 몰입할 수가 없었다.

언제쯤 오냐는 루나의 메시지를 본 것도 오후 5시가 지난 후였다. 휴대폰 소리가 들리면 오 감독이 완전히 돌아버린다는 PD의 경고로 우리 휴대폰도 전부 무음으로 해놓았다.

내가 이 정도면 오늘은 그냥 돌아가고 나중에 미팅이든 뭐든 하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이 대표는 난색을 표했다.

“이건 정말 귀한 기회야. 아까 오 감독님이 너 액션에도 잘 맞는지 이 스튜디오에서 한번 찍어보고 싶다고 하셨어. 그런 말을 아무나 듣는 게 아니란 말이지.”

정말이지 환장하겠다. 왜 하필 오늘.

나는 루나에게 생일파티는 신경 쓰지 말라는 문자를 보냈다. 대신 자정 전까지는 꼭 들어갈 테니 자지 말고 기다려달라고 덧붙였다. 그 메시지의 의미를 루나는 알까?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자정 전까지는 돌아갈 수 있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밤 10시가 되고, 아무리 타이트하게 따져 봐도 10시 반에는 출발해야 자정 전에 루나커피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계산을 끝내자 그 순간부터 시간에 가속도가 붙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이 대표에게 그만 가야겠다고 말했다. 그때 PD가 우리를 불렀다. 겨우 촬영이 끝났던 것이다.

“어이, 거기.”

오 감독이 내게 손짓했다. 그가 카메라 앞에 서서 뭐든 해보라고 말했다. 나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어서 망설이다가 종일 진저리나게 보고 또 봤던 액션 배우들의 동작 몇 가지를 흉내내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박수도 쳐주고 환호도 보내줬지만 오 감독은 고개를 저었다.

“다른 거 없나? 유도 같은 거 할 줄 알아?”

옆에 서 있던 이 대표가 냉큼 대답했다.

“할 줄 알아요. 저래 봬도 운동은 거의 다 잘합니다.”

“그럼 할 줄 아는 거 다 해봐요.”

그래서 나는 정말로 할 줄 아는 걸 다 했다. 유도도 하고 태권도도 하고, 공중 3회전에 이단 돌려차기까지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원맨쇼를 선보였다.

그런데도 오 감독은 고개를 저었다. 이 대표는 입이 마르는지 생수를 들이켰고, 어떻게든 오 감독의 생각을 알아내려 애쓰는 눈치였다. 나 역시 입이 바짝바짝 말랐고 오 감독의 의중을 알아내려 애썼다. 다만 내가 궁금한 것은 그가 언제쯤 오디션인지 테스트인지를 끝낼 생각인지에 몰려있을 뿐이라는 것이 이 대표와는 다른 점이었다.

10시 24분. 이제 나는 오디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 감독이 또다시 명령 아닌 명령을 내렸다.

“이번엔 결투 신 한번 해보자고.”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오 감독이 눈썹을 쫙 올렸다. 눈치 빠른 이 대표는 내 표정을 읽은 것 같았다. 그가 두려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

사실 누구보다도 이 대표에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디션은 언젠가 또 볼 수도 있겠지만 오늘은 다시 오지 않을 테니까. 영원히 말이다.

“죄송합니다만, 감독님.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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