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어른이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나는 열두 살 때 이미 터득했다.
루나를 만나기 전까지 내가 아는 어른은 무늬만 어른일 뿐 죄다 어린아이만도 못한 인간들이었다. 내게 피와 살을 준 친부모도 마찬가지였다. 가끔씩 나는 그들의 꿈을 꾸곤 한다. 그 꿈은 모두 악몽이었다. 그들의 얼굴이 어느 순간 나로 바뀌어버리는 악몽.
어린 시절 나는 그들과 같은 어른이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 열망은 루나를 만난 후로 더 강렬해졌다. 내 삶의 목표는 오로지 루나 앞에서 멋지고 당당한 어른 남자가 되는 것이었다!
“우와! 은별이 운동 진짜 많이 했구나.”
“뭐 쫌….”
“한 번만 만져봐도 돼?”
“네에?”
모처럼 루나커피에 놀러 온 세윤이 형이었다. 세윤이 형은 황금달 엔터테인먼트 8기생으로 입사해 지금은 1군 선수로 활동 중이다. 나는 11기생이고 아직 데뷔조차 못 했으니 대선배인 셈이다. 세윤이 형은 오늘 방송국에서 인터뷰가 있다고 했다. 방송국이 근처라서 이 대표와 함께 들른 참이었다.
회사에서 마주칠 때도 느꼈지만, 볼 때마다 연예인 티가 좔좔 흐르는 게 알바생으로 있을 때보다 열 배는 멋있어졌다. 그런데 이 선배님께서 루나한테 관심이 있는 줄 알았는데 요즘 나랑 마주칠 때마다 눈웃음을 살살 치는 게 영 수상쩍다.
나도 모르게 루나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루나는 옆에서 음료를 만들고 있었는데, 등을 돌리고 있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뭔가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듯했다. 내 착각인가?
“미안하지만 저는 남이 내 몸에 손대는 거 싫어해요.”
“자식이, 일관성 쩔게 까칠해.”
“엇!”
나의 대쪽 같은 일침에도 불구하고 세윤이 형이 내 팔을 덥석 잡았다. 그것도 모자라 이두박근을 마구 주물러댔다.
“엇, 세윤이 형! 이러지 마세요!”
그때 엄청나게 밝은 내 귀에 뭔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독!
곁눈으로 보니 루나의 손에 들린 시나몬 스틱이 반 토막 나 있었다. 루나는 신경질적으로 스틱을 집어 던지고 새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초코 크림 프라푸치노에 푹! 꽂았다. 그게 꼭 내 팔뚝에 꽂히는 것 같아서 심히 간지러웠다. 이윽고 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초코 크림 프라푸치노 나왔습니다!”
“야옹, 깜짝이야.”
어슬렁거리던 필립이 소리 지르자 루나가 말했다. 비꼬는 투로.
“필립, 여기 복잡하니까 고양이답게 나가서 놀렴.”
“야옹, 버릇없는 놈.”
필립이 투덜거리며 카운터를 나갔다.
잠시 후 이 대표가 가게로 들어왔다. 이 대표의 예민한 시야를 마침맞게 필립이 어슬렁거리며 가로질렀다. 그렇잖아도 이 대표는 필립의 광팬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필립의 자태에 완전히 반한 이 대표는 한동안 셔터를 눌러댔다. 필립은 거드름을 피우며 온갖 포즈를 취했다. 이윽고 필립이 꼬리를 살랑거리며 거만하게 멀어지자 이 대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진짜 예쁜 녀석은 저 녀석이라니까. 별이 오십 개.”
나는 이 대표를 자리로 안내했다.
“대표님, 뭐 드실래요?”
“뭐든 사장님이 추천해주시는 걸로, 커피는 곱빼기로 좀 부탁한다. 종일 한 잔도 못 마셨거든. 아, 그리고 사장님께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겠냐고 여쭤봐.”
“네.”
가게가 무척 바빠서 루나가 짬을 내기 힘들 뻔했는데 마침맞게도 로저가 와줬다. 로저는 워튼 씨 소식을 알려주려고 들렀다가 또 알바생이 되고 말았다.
“워튼 씨가 풀려났네, 루나.”
“오! 정말요?”
두 사람은 자리를 옮기지 않고 카운터에서 프랑스어로 대화를 나눴다. 루나가 좀처럼 접객을 뒤로하지 못해서였다. 손님 중 프랑스어를 아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나 싶지만 알아듣는다 해도 어차피 무슨 대화인지 제대로 파악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나중에 루나가 설명해준 바로는, 워튼 씨는 범죄의 정황도 없고 의도도 없어보이는데다가 특별히 범법행위를 한 적도 없어 기소유예로 풀려났단다. 나탈리가 그의 신분을 보증해줬는데 그녀가 낸 아이디어대로 했더니 어느 정도 참작이 되었다고 한다.
나탈리의 아이디어는 다름 아닌 워튼 씨가 기억상실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거였다. 경찰은 거짓말탐지기와 의료진을 동원했지만 로저 말대로 워튼 씨의 뇌 대부분에는 아직도 락이 걸려있었다. 워튼 씨는 칩을 주사할 때가 지난 지 오래라고 했는데 그래도 효력이 좀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락이 걸린 워튼 씨의 뇌는 지구의 거짓말탐지기가 주로 사용하는 열 감지며 심박수 등에 강력한 방패 노릇을 해줬다.
현재 워튼 씨는 무사히 풀려나 파리 근교 생 비츠라는 소도시에서 나탈리와 함께 모처럼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단다. 루나는 바쁜 와중에도 촉촉한 눈을 빛내며 로저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와, 잘됐어요. 정말 낭만적이네요.”
일을 돕고 있던 세윤이 형이 내게 물었다.
“두 분 프랑스어 잘하신다! 멋있어. 그런데 무슨 얘기하시는 거야?”
“그냥 아는 할아버지 얘기일 거예요.”
잠시 후 루나는 로저와 세윤이 형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카운터를 빠져나왔다. 이 대표는 클럽 샌드위치와 아메리카노 따따블샷으로 늦은 점심을 막 끝낸 참이었다.
“오늘도 루나커피 샌드위치는 갓벽했습니다, 하하하!”
“맛있으셨다니 다행이에요.”
“오늘은 은별이 작업 계획표랄까요, 향후 1년간 어떤 식으로 일을 진행할지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그렇잖아도 궁금하던 참이었어요.”
“하하하, 그렇죠? 이제 수능도 끝났겠다, 본격적으로 연습에 들어가게 될 텐데요. 트레이닝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제일 힘든 게 그거거든요. 몸만들기요.”
“아하.”
“그런데 은별이는 이미 80% 이상 완성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몸이 좋습니다. 하하!”
내 착각인지는 몰라도 그때 루나의 두 뺨이 발그레해진 것처럼 보였다.
“대학에 합격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연기학원에 등록시켜 기본기를 배우게 할 겁니다. 이게 주 3회, 오전에 2시간 정도고요. 방학 동안 수료한 후 우리 회사에서 초빙한 원로 연기자가 개인 연습을 시켜줄 겁니다. 또 영어와 중국어를 배워야 하고요, 액션 연기에 대비해 무술 교육도 받게 됩니다. 춤과 노래도 배우게 될 거고 교양수업도 있습니다. 간간이 오디션이나 미팅이 있을 수 있고요.”
“오…. 너무 힘들겠는데요. 애가 잘 해낼 수 있을지….”
내가 얼른 끼어들었다.
“걱정 마, 형. 잘 해낼 수 있어. 그리고 나 이제 진짜로 애 아니야.”
이 대표가 내 등을 툭 치며 요란하게 떠들었다.
“은별이가 이렇다니까요. 겁먹는 일이 없어요. 배짱이 두둑한 녀석이에요. 그것만으로도 먹고 들어가죠.”
루나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뭘 먹고 들어가요?”
“소심한 것보다는 여러모로 좋다는 거예요.”
“그것도 그러네요.”
“그렇게 어느 정도 훈련이 되었다 싶으면 주연으로 데뷔시킬 계획입니다.”
그 말에는 내 입이 쩍 벌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나는 단역에서 조연으로, 조연에서 고정배역으로, 그런 단계적인 발전을 각오하고 있었다. 연습생 대부분이 그런 수순을 밟고 있으니 당연한 생각이었다.
“대표님. 카메라 구경도 못 해봤는데 갑자기 주연이요?”
내가 대뜸 묻자 루나도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러게요. 그게, 돼요?”
“하하! 되게 해야죠. 은별이는 주인공 얼굴이에요. 조연을 맡으면 아마 잔디밭의 백합 한 송이처럼 이상해 보일 겁니다.”
“오, 비유가 너무 적절하시네요.”
루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나는 그가 들뜨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역시나 황홀하다는 듯이 그가 두 손을 모으고 눈을 반짝였다.
“그럼 우리 은별이를 드라마 남주로 보게 될 날이 얼마 안 남은 거예요? 정말 신기하네요.”
“앞일은 가봐야 아는 거지만 일단 계획은 그렇습니다.”
장장 한 시간 동안 떠들고 나서야 이 대표는 루나커피를 떠났다.
그가 한 말은 나보다 루나를 더 들뜨게 한 것 같았다. 루나는 남은 오후를 내내 방실거리며 보냈다. 가끔씩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어찌 됐든 그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의욕이 샘솟았다.
***
다음 날 새벽 4시, 휴대폰이 울렸다. 이미 이 대표로부터 스케줄 표를 받은 상태라서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양치와 세수를 하고 운동복을 걸친 다음 방을 나오자 루나도 막 방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은별아. 벌써 운동 가는 거야?”
“오늘부터 전문 트레이너가 데리러 오기로 했어.”
“너무 심하게 몰아붙이는 거 아니니?”
“걱정 마. 나 체력 좋잖아.”
“그래도….”
“두세 시간 걸릴 거야. 다녀올게.”
“밥은?”
“우유 한잔 마시고 운동한 다음에 트레이너랑 먹을 거래.”
“그래…?”
그러고 보니 루나와 함께 하는 아침 식사가 큰 즐거움이었는데 갑자기 그걸 못하게 되었다. 루나도 섭섭한 모양인지 어제의 들뜬 얼굴과는 달리 시무룩해보였다. 나는 가만히 그를 끌어안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의 손이 내 등을 두들겼다.
아침밥을 같이 먹지 못하는 건 서운하지만, 어른이 되려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예상보다 빨리 내 힘으로 뭔가 이룰 수 있는, 루나에게 어울리는 어른 남자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일상의 작은 행복을 기꺼이 포기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행복의 효용성을 저울질해나가는 것, 그것이 인생의 가장 불합리한 모순 같았지만 나 역시 별수 없었다. 내게는 시간이 없기에 더더욱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잠시 후 나는 포옹을 풀고 루나와 눈을 맞췄다.
“나 없다고 울지 말고 아침 챙겨 먹어.”
“뭐야? 이 녀석이!”
“헤헤! 다녀올게.”
나는 손을 들어보이고는 그대로 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루나가 내 팔을 잡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그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은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