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89화 (89/103)

<89화>

잘난 척하려는 건 아니지만, 어린 시절의 흑역사는 내게 유연함이라는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길이 아니면 돌아가고, 길이 없으면 만들어서 가면 된다, 그런 유연함 말이다. 꼬맹이 시절 거의 매일 인식하며 살았던, 일단 살고 봐야 한다는 위기감. 그로부터 본능적으로 배운 생존법은 쉽사리 잊히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징그러울 정도로 신속하게 미래의 설계를 바꿨다. 농구가 좋고 잘하고 싶었고 보람도 있었지만, 루나가 아니었으면 선택하지 않았을 길. 루나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농구를 선택한 이유였으니 그걸 못하게 된 이상 가능한 한 빨리 또 다른 멋진 직업을 택해야 했다. 이번에도 내 선택의 기준은 루나 블랑슈였다.

“생각해보자….”

루나 블랑슈가 정은별에게 원하는 게 뭔지.

“후우….”

한숨만 나왔다. 루나가 나한테 원하기는 개뿔. 그런 게 있을 턱이 있나.

“좋아. 그럼 냉정하게 따져보자.”

이름, 정은별.

키 185.2cm, 체중 71kg.

나이, 만 18.9세.

내신 평균 3등급.

성격, 친구들 기준 개. 루나 한정 강아지.

잘하는 것, 농구(는 빼고…). 운동. 싸움. 루나커피 보조. 요리 보조. 고양이 돌보기.

이게 현재 정은별의 모든 것이다. 그나마 농구가 내 존재를 조금이라도 빛나게 해주었는데 그마저 없어졌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아무것도 아닌 지구인 정은별을 반짝반짝 빛나는 별로 만들 수 있을까.

“야옹, 은별이 뭐 하냐. 공부도 안 하면서 왜 노트는 끼고 있어.”

“공부보다 더 중요한 거 하는 중이에요.”

“야옹?”

필립이 소파 등받이로 폴짝 뛰어올라 내 노트를 들여다봤다.

“야옹, 정은별에 대해 캐고 있어?”

“네에.”

“나는 지금까지 네가 정은별인 줄 알았는데?”

“그럴 거예요.”

“그럼 뭐? 너 자신을 연구하는 거냐?”

“고민 중이에요. 나란 놈이 뭘 해야 조금이라도 폼이 날지.”

“야옹, 폼 나려고 뭔가를 한다는 거냐?”

“그럼요.”

“야옹, 신박하네.”

필립이 테이블 위로 폴짝 뛰었다. 그가 앞발로 리모컨을 누르며 말했다.

“루나 좋아하는 드라마 한다. 가서 알려줘.”

“그럴까요?”

나는 노트를 집어 던지고 일어났다. 필립도 분리 목소리로 얼마든지 루나의 방에 알려줄 수 있을 텐데 일부러 나를 시킨 거였다. 역시 필립은 언제나 내 편이다.

루나의 방문을 노크하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그 목소리에 나는 괜스레 하나, 둘, 셋, 셈을 하며 기다렸다.

“됐어, 들어와.”

방에 들어가니 루나는 막 샤워를 끝내고 나온 참이었다. 티셔츠와 파자마 바지를 갖춰 입고 있었는데, 나 때문에 급하게 걸쳤는지 목과 팔에 물기가 남아있었다. 괜스레 침이 넘어갔다. 목젖이 다 아프도록 마른 침을 넘기면서 나도 모르게 수선화 같은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건 그냥 당연한 반응이었다. 대체 뭐가 당연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순간의 나는 그게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겼다. 다만 그런 모습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왜 새삼 그 순간 내 심장이 덜컥 소리를 내며 멈췄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왜?”

루나의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희미해진 기억을 되살리려고 미간을 좁혔다.

“아! 드라마. 필립이 드라마 한다고 와서 보래.”

“그렇잖아도 나가려고 했어. 먼저 가 있어.”

“어어.”

루나는 화장대 앞에 서서 로션을 집어 들었다. 거울 속의 그가 나를 보았다. 나는 그가 뭐라고 할지 알면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뭐 할 말 있어?”

“나….”

루나는 뺨에 로션을 두들겨 바르며 나를 응시했다.

“나, 앞으로 뭐 할지 생각하는 중이야.”

“어, 그래.”

뺨을 두들기던 그의 손이 목으로 내려갔다. 머리카락에 맺힌 물방울이 그의 이마와 어깨에 떨어졌다.

“내신이 별로라서 명문대학은 포기해야 할 것 같아.”

“그런 게 뭐가 중요해. 하고 싶은 공부가 뭘까, 그것만 생각해.”

“응….”

그가 수건으로 머리를 한번 털고는 돌아섰다.

“나가자.”

“으응.”

그가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내 곁을 스치며 방을 나설 때 젖은 머리카락이 내 코끝을 스쳤다. 뭔가 이상했다.

어째서 그 은실 같은 머리카락이 칼날처럼 느껴지는 걸까. 혹시나 내 코끝에서 피가 배어 나오지는 않는지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당연히 그런 일은 없었지만 가녀린 통증이 남아있었다. 그 통증은 목줄기를 타고 가슴으로 툭 떨어졌다.

그리고 거기가, 아파 왔다. 심장이. 칼로 벤 것처럼, 은 아니지만 뭔가 가늘고 날카로운 것으로 한번 두들겨 맞은 것처럼 짧은 고통이 스치고 지나갔다. 배 속에서 묘한 여운이 그 고통의 뒤를 따랐다. 그 여운은 고통을 쾌락으로 바꿔주는 것 같았다. 달짝지근한 그 여운은 한동안 내 몸에 머물렀다.

루나는 언제나처럼 쿠션을 안고 소파에 앉았다. 필립과 고양이들도 소파 위에 자리를 잡았다. 루나가 방긋 웃으며 언제나처럼 옆자리를 톡톡 두들겼다. 내가 옆에 앉자 루나가 포도 한 송이를 건네주었다.

루나는 포도를 먹을 때 송이째 들고 입으로 한 알씩 따서 먹는다. 어느새 나도 똑같은 방법으로 먹게 되었다. 그가 나를 보며 포도 한 알을 입에 넣었다. 그 순간 배 속에 남은 여운이 되살아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강도가 좀 셌다. 뭔가 뭉클하는 것이 아랫배를 두들기는 것 같았다. 그것을 겨우 억누르며 꾸역꾸역 포도알을 입에 넣었다.

“시작했다.”

루나가 반가운 듯 TV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 고개는 그를 향한 채 돌아갈 줄을 몰랐다. 그가 드라마에 몰입하며 필립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나는 그를 훔쳐보기만 했다.

그때였다.

“야옹, 남주 잘생겼다.”

“저 배우가 요즘 톱이래요. 너무 예쁘죠? 우리 은별이보다는 못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루나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포도 한 알을 또 삼키면서 웃었다.

그 순간 내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루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드라마만은 놓치지 않는다. 아니, 무슨 일이 있으면 위안을 받으려고 그러는지 더더욱 드라마를 챙겨보려 애쓴다.

그러고 보니 그날도 루나는 어김없이 드라마를 봤다.

그날. 내가 첫 키스 좀 해보려다 따귀 얻어맞은 그날 말이다. 그날따라 필립과 고양이들은 일찌감치 자기들 텐트에 들어가 잠들어버렸다.

“뭐 마실래?”

“응. 아무거나.”

루나는 맥주를 마셨고 내게는 오렌지 주스를 줬다. 루나가 안주도 없이 술을 마시는 일은 거의 없었다. 특히 맥주는 그가 썩 좋아하지 않는 술이다.

그때 나는 그가 나 때문에 속상해서 그런다고 생각했다. 그는 무척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울적한 건 기본이고 좀 화가 난 것 같아보였다. 나와 입 좀 맞춘 게 그렇게 기분이 더러운가, 나 역시 기분이 복잡했다.

아무튼 우리는 별말 없이 홀짝거리며 드라마 한 편을 끝까지 봤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이 꽤 야했다. 남녀 주인공이 느닷없이 바로 ‘직전’ 단계까지 갔는데, 나도 모르게 목을 쭉 빼고 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루나도 목을 쭉 빼고 보는 게 아닌가.

평소 같으면 왁자하게 놀려댔겠지만, 그날은 키스도 아닌 뽀뽀 좀 하다가 뺨까지 얻어맞았기에 쉽게 키들거릴 기분은 들지 않았다. 루나도 어색한지 곁눈으로 나를 보면서 일어났다.

“잘, 잘 자.”

“어어, 형도.”

그러고 내 방 침대에 누웠는데 눈이 말똥말똥한 게 영 잠이 오지 않았다. 자꾸만 드라마의 엔딩만이 어른거렸다. 이윽고 여주의 모습에 루나가 겹쳐 보였다. 그리고 남주의 모습은 바로 나….

“헉!”

내 비명에 한창 드라마를 보고 있던 루나와 고양이들이 화들짝 놀랐다.

“깜짝이야. 왜 그래?”

“야옹?”

나는 TV를 가리켰다.

“저거다!”

“응? 뭐가? 아아, 지금 둘이 사내에서 비밀 연애를 하고 있는데 막 들킨 참이야. 완전 재밌지?”

“어어, 그래. 그런데 나 졸리네. 형, 먼저 잘게.”

“그래? 그래, 그럼.”

루나는 나를 미심쩍게 쳐다보면서도 이내 TV로 주의를 돌렸다.

방으로 들어온 나는 책상 서랍을 뒤졌다.

“있다!”

이노마 대표의 명함이 서랍 속에 있었다.

나는 후다닥 노트북을 켜고 ‘황금달 엔터테인먼트’를 검색해보았다. 이 대표의 동그란 얼굴이 제일 위에 나왔다. 수많은 영화와 배우들의 프로필, 기사들이 뒤를 이었다.

“오! 세윤이 형.”

비록 여러 명이 함께 한 인터뷰지만 세윤이 형의 기사도 보였다. 시트콤 드라마에 고정으로 출연한단다.

“대단한데.”

명함에 적힌 이 대표의 휴대폰 번호를 내 폰에 입력했다. 뭘 한 것도 아닌데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일 당장 연락해봐야지. 설마 이제 필요 없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나저나 정은별, 바보냐?”

왜 이 생각을 이제야 한 걸까? 늘 함께 드라마를 봤으면서 생각조차 못 하다니.

“루나가 좋아하는 건 드라마잖아.”

*

다음날 오전 수업이 끝난 후 나는 이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루나커피의 정은별인데, 기억하세요?”

국수 같은 것을 먹고 있었는지 면발 끌어올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곧 활발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후루룩! 엇, 정은별! 당연히 기억하지. 나 지지난달에도 루나커피 갔었어.

“정말요? 그럼 저한테 배우 생각 있으면 연락하라는 말씀도 기억하세요?”

- 당연하지.

이 대표는 그날 당장 만나자고 했다.

약속을 잡고 돌아서는데 짜증 나는 면상이 버티고 서 있었다. 나는 피곤한 얼굴로 붕대가 감긴 팔꿈치를 가리켰다.

“최지환. 나 지금 상태 안 좋은 거 보이지? 헛소리하려면 가라.”

“농구 관둔다며.”

“그래서, 좋냐?”

하마 자식은 그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돌아서더니 또 제멋대로 사라져버렸다.

“허! 미친놈.”

그래도 그날 아침의 일을 더 이상 물고 늘어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미심쩍기는 하지만 그래도 생각은 있는 모양이었다. 나도 더 이상 그날 일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배우라, 배우.”

제대로는커녕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어디부터 알아봐야 할지 막막했다. 점심시간에 열심히 검색해서 동영상도 보고, 영화배우 SNS에도 들어가 보고, 그래도 와 닿는 게 없었다.

다행히 이 대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유능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었다.

약속장소인 햄버거 체인점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가 방긋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손을 흔들며 들어오는 폼이 개그맨 같다고 할까, 희극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그가 반갑게 악수를 청하고는 햄버거를 주문해 왔다. 우리는 햄버거를 우적거리며 대화를 나눴다.

“전 연기라는 건 생각도 안 해봐서요, 어떻게 배워야 해요?”

“정식으로 우리 회사 연습생이 되면 돼.”

“연습생이요?”

“그래, 월급을 받으면서 연기 연습을 하는 거야. 종합적으로 트레이닝을 시켜줄 거야.”

“월급도 주신다고요?”

“내일 당장 계약서 꾸며올까?”

“우선 우리 형한테 말한 다음에요. 형이 허락하면 전화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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