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어째서 아버지가 아들을 산 채로 잡아먹는 괴물이어야 했을까요? 그리고 그보다 더 절묘한 비유가 또 있을까요?
시간 말이에요. 지구의 그리스 신화에서는 시간이 자기 아이를 삼키는 괴물 크로노스로 표현되잖아요. 그것이야말로 지구인이 천재라는 증거인 것 같아요.
물론 이 부분에서 지구인과 플럼버인의 성향이 극적으로 갈리기는 해요. 플럼버인은 비유라는 것을 좋아하지 않거든요.
플럼버에서는 어떤 것이든 비유를 할 때는 좋지 않은 것을 설명하는 일이 대부분이에요. 비유란, 사람들의 머릿속에 알게 모르게 프레임을 심어주거든요. ~와 같은, ~와 비슷한, 그렇게 그룹을 생성하다 보면 간과하게 되는 경우의 수가 너무나 많답니다. 세상에 같은 것이란 단 한 개도 없는데 말이죠. 플럼버에서는 다수결, 대와 소, 집단과 개인 등을 저울질하지 않아요.
처음에 지구에 와서 온갖 비유에 먹혀들어가는 ‘원본’들을 접했을 때 무척 당황했답니다. 부적절하거나 부당하다고 느꼈던 비유도 많았어요. 그럼에도 절묘한 것들이 압도적으로 많으니 저 역시 금세 적응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그중 저를 감탄하게 만든 것 중 하나가 시간을 비유한 크로노스 신화였어요.
그렇지만 저는 단 한 번도 그것을 실감하지는 못했어요.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시간의 본질이 자식을 잡아먹는 아버지처럼 냉혹하다는 느낌 말이에요. 돌이켜보면 저에게는 늘 시간이 흐른다는 건 당연한 거였어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다른 의미로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 알겠어요. 시간이 잔인하다는 말의 의미를요. 시간은 앞으로 나아갈 뿐 아니라 상대적이기까지 하지요. 그러나 결과는 항상 정해져 있어요.
루나 블랑슈와 정은별의 시간 중 한쪽은 너무나 빠르게 흘러갔고 한쪽은 그 반대였어요. 루나 블랑슈에게 정은별과의 시간은 지나치게 빨랐어요. 제 마음은 그 아이를 처음 봤을 때보다 아주 조금밖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으니까요.
반면 정은별의 시간은 루나 블랑슈의 시간에 비하면 너무나 느렸던 거예요.
그 아이의 마음을 저는 몰랐을까요? 처음에는 몰랐던 것 같아요. 하지만 금세 알게 되었죠. 모를 수가 없었어요. 은별이가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 제 눈에도 훤히 보였어요. 은별이는 너무나 절절하게 제 마음을 알려 주고 싶어 했으니까요.
그런데도 저는 꿋꿋하게 모른 척했어요. 그러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저만 모른 척하면 언젠가는 각자 제자리를 찾아가게 될 거라고 말이죠. 저는 저의 길로, 은별이는 은별이의 길로, 대부분의 가족이 서로 사랑하면서도 각자의 길을 걷듯이 우리도 시간이 흐르면 잘못된 운명을 극복하게 될 거라고요.
그러면서도 저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운명의 연인을 그리워하고 있었어요. 그 운명의 연인이 바로 코앞에서 재롱을 떨고 있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하면서 말이죠. 그게 바로 제가 가진 네임에 대한 저의 딜레마였어요. 은별이를 마음 밖에 놓아두고 운명의 끈은 놓지 않으려는 모순이 발생한 거죠.
이유 여하를 떠나서 저는 은별이를 사랑해요.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아이니까요. 그 누구라 해도 이 귀엽고 영리한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을 거예요. 어느 시간부터 저는 은별이를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고 있었어요. 아이가 무섭게 자라는 것을 보면서 황홀한 마음 한편에는, 과거 속에 묻힌 그 조그만 천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공존하기 시작했어요. 저에게는 꿈처럼 짧은 그 추억들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했으니까요.
그러니 이 아이를 내 운명의 상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저에게 맞지 않는 블록을 끼워 맞추려 노력하는 일과 같지 않겠어요? 말도 안 되게 쓸데없는 일인 거죠. 그런데….
그런 줄만 알았는데….
“나 정은별. 루나 블랑슈의 배필이잖아.”
은별이가 네임의 의미를 알고 있다는 걸 안 다음부터 저는 평정심을 잃어가고 있었어요. 아주 조금씩이지만 제 견고한 블록은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정신 차리고 보니 그렇게 4년이 지났어요. 번개처럼 빠른 시간이었죠.
이제 저는 빌고 싶어졌어요. 제게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잖아요? 이제 와 새삼 운명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비록 많지 않은 수이지만 운명을 거부한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하기에 그들에게도 저처럼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을 거라는 추측과 함께 저 역시 그 소열에 합류할지를 결정하기 위해 말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훅 들어오면 아무리 연장자라도 당혹스럽지 않겠어요? 저 역시 세상을 다 통달할 정도로 오래 산 건 아니니까요. 물론 플럼버의 기준으로 말이에요.
짝!
오, 세상에…!
제가, 제가 지금 은별이를 때린 걸까요? 그러네요. 그랬어요. 제 표독스러운 손바닥이 은별이의 예쁜 뺨을 후려쳤어요.
물론 저는 때리자마자 후회했어요. 하지만 그런 티를 낼 수는 없었어요. 아이가 뽀뽀 좀 한 것 가지고 과한 반응이라고요? 오버하는 것처럼 보인다고요?
그럴지도 몰라요.
저는 정은별이라는 운명으로부터 벽을 치는 건지도 몰라요. 그 벽이 얼음이라 금세 녹아내리더라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은별이도 알고 저도 알아요. 우리의 운명은 어긋나 있다는 것을요.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이 모양 이 꼴로 만난 건지도 몰라요. 만약 은별이가 420살, 아니 스물한 살의 은별이로 제 앞에 나타났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행복했을까요? 그리고 평생 함께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 사실 우리의 문제는 그게 아니죠.
“형….”
“무슨 짓이야.”
알고 있었지만 은별이는 영리한 아이예요. 저보다 백배, 천 배는 똑똑해요.
“미안해.”
아이가 이렇게 금방 사과해버리는 건 꿍꿍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저는 알아요. 제가 안다는 걸 은별이도 알아요.
그 꿍꿍이는 다름 아닌 넉 달 후면 은별이도 어른이 된다는 사실이에요. 은별이 또래에 그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는 저도 잘 알고 있답니다. 아이들은 종종 어른이 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 믿곤 하지요. 은별이는 특히 더 그런 아이예요.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는데도 말이죠.
내 마음이 어떤지 아느냐고, 왜 나를 거부하기만 하느냐고, 언제까지 내칠 거냐고, 어깨에 새겨진 이름의 주인이 바로 나라고, 그렇게 아락바락 따진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하겠어요.
그런데 이 눈치 빠른 아이는 그것조차 하지 않네요. 금방 뺨을 얻어맞은 주제에 방긋거려요. 눈동자는 촉촉한데 웃고 있으니, 그런 게 얼마나 제 마음을 건드리는 지 이 사랑스럽고도 영악한 아이는 분명 알고 있는 거예요.
“잘못했어, 형. 화내지 마.”
저를 쥐락펴락하는 아이예요. 언젠가부터 저는 이 아이의 손바닥 위에 있는 기분이랍니다.
“때려서…. 형도 미안해.”
“아냐. 형은 뭘 해도 괜찮아.”
“그런 게 어디 있어.”
“있어. 정은별 사전에 쓰여 있어. ‘루나 블랑슈는 뭘 해도 괜찮다.’”
어김없이 능청을 떠니 무심코 웃고 말았어요. 웃어버리다니, 제정신일까요? 은별이의 마음이 어떤지 올올이 느끼고 있는 주제에, 형으로서 웃어버리면 안 되는 거였어요.
“형. 솔직히 말해줘.”
“뭘…?”
“농구선수 정은별이 아니라도, 형은 괜찮아?”
“그게 무슨 말이야? 당연히 괜찮지. 나한테 너는 소중한 동생이야. 농구를 하든 안 하든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어.”
그 말이 뭐라고, 대단한 위안이라도 되었다는 듯이 은별이는 또 환하게 웃네요.
“그럼 됐어.”
“일부러 씩씩한 척할 거 없어. 형 앞에서는 마음껏 좌절해도 돼.”
“아니, 좌절 따위 하지 않아. 좀 아까울 뿐이지. 그동안 꽤 노력했는데 그게 헛수고가 된다고 생각하니까 허탈한 것뿐이야.”
“정말…?”
“그래. 그리고 형이랑 입 맞춰서 금방 나아졌어.”
제 뺨이 화끈 달아올랐어요. 정말이지 타고난 재능이 아닐 수 없어요. 천사처럼 웃으면서 제 행동을 꾸짖는 묘수랄까요. 입맞춤을 치유책으로 몰아 저를 야박한 형으로 만드네요.
물론 그게 아이의 의도가 아니란 것은 잘 알지만, 결과적으로 저는 아이에게 위안을 줄 수도 있었을 행동을 금기사항이라도 되듯이 철벽을 친 게 되었어요. 그리고 어느새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요.
저는 그렇게 갈등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은별이는 이미 다른 생각을 하고 있나 봐요. 아이가 한숨을 푸욱 쉬며 투덜거렸어요.
“후우, 이제 수능 잘 봐야겠네.”
이제 421살인 어른답게, 지금은 저 자신이 아닌 상처받은 아이에게 집중해야겠어요.
“재수 안 하고 다른 학과 찾아볼 거야?”
“재수라니. 내가 왜 농구를 했는데.”
“왜 했는데?”
“형한테 멋지게 보이려고 한 거지.”
“뭐…?”
“재미있기도 했지만, 솔직히 나한테 마이클 조던 같은 재능은 없잖아. 키도 좀 모자라고. 벌써 고삼인데 185cm밖에 안 되잖아. 앞으로 자라봤자 얼마나 더 자라겠어.”
“그래….”
농구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니 그나마 다행인 것 같아요. 만약 은별이가 크게 좌절했다면 저는 정말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래도 며칠은 울적하게 지낼 줄 알았는데 은별이는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쿨하게 극복했어요.
이틀 후였어요.
깁스를 하고 학교에 간 날이었죠. 농구부에 그만둔다는 말을 한다던 날이기도 했어요. 농구부 코치 선생님이 제게 확인 전화까지 해왔죠. 선생님의 목소리는 울적하기 짝이 없었어요.
- 은별이가 농구를 그만둔다고 하는데요. 부상이 심하다는데 맞습니까?
“네. 저도 정말 유감이에요. 은별이도 섭섭해하고 있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은별이는 그다지 섭섭해하는 것 같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며칠 후였어요.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건방지기 그지없는 태도로 은별이가 툭 말을 던졌어요.
“형. 나, 갈 길을 정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