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 이름은 내 이름이 아니었지만 꿈속의 나는 그게 내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 나를 던졌다. 공을 던지듯, 하늘 높이 나를 던져버렸다. 한순간 나는 허공을 날아가는 줄 알았는데, 곧이어 추락했다. 그리고 부서졌다. 결국 나는 물방울이 되어 바다로 떨어졌다.
은별아.
내가 찾던 이름이었다. 물방울이 되어 흩어졌던 나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모여들었다. 원래 되찾아야 하는 것을 되찾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하게 몰려들었다. 자석에 쇳조각이 들러붙는 것과 같았다.
비로소 나는 완전히 내가 되었다. 온전한 내가 되자마자 내 신경은 귀에 집중되었다. 내가 찾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은별아.”
그의 목소리였다. 루나 블랑슈.
그리운 이름. 나는 그 어떤 이름도 아닌, 루나 블랑슈가 가진 이름만으로 불려야 했다. 그래야만 눈을 뜰 수 있었다.
“은별아.”
은별. 정은별. 그게 루나 블랑슈가 가진 내 이름이다.
오랜 시간 감고 있던 눈을 떠보았다.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 같았지만 간단하게 할 수 있었다. 어른거리던 시야에 그의 모습이 또렷이 잡힐 때까지 나는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내 얼굴보다도 익숙해진 얼굴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얼굴이 반가운 한편 또 그를 걱정시켰다는 좌절감이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정신 들어?”
“형….”
“그래, 형이야.”
“젠장.”
“뭐가 또 젠장이야? 아프지 않아?”
“그냥 좀 부딪친 것뿐이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 팔이 또 부러졌어.”
“뭐?”
무심코 몸을 일으키려던 나는 팔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도로 누웠다. 루나가 서둘러 내 팔을 잡아주었다.
“팔 부러져서 응급수술 받았다고. 가만 누워있어.”
“…가게는 어쩌고?”
“지금 가게가 문제야?”
“내 팔 좀 부러진 것 가지고 장사까지 접을 거 없어. 가 봐.”
“로저가 봐주고 있으니까 걱정 마.”
“집에 가서 누워있으면 안 돼?”
“안 돼. 아까 CT 촬영도 했어. 응급이라 결과 곧 나온댔어.”
“팔 좀 부러진 거 가지고 뭘 CT 촬영까지 해?”
루나는 어쩐지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팔에 종양이 생긴 것도 아닐 테고, 왜 이러나 싶었다.
“배고프지 않아? 내려가서 죽 좀 사가지고 올게.”
“괜찮아. 그냥 있어.”
“너 점심도 안 먹었잖아. 지금 저녁 먹을 때 다 됐어. 잠깐이면 돼.”
루나가 병실을 나간 후 전염인가 싶게 내 마음도 불안해졌다. 뭘까? 알 수 없는 불안감은 조금씩 더 짙어져 갔다.
10분도 안 되어 루나가 죽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그가 트레이를 내려 죽을 꺼내놓았다.
“전복죽이 제일 맛있다고 그러더라. 어서 먹어.”
“형도 먹어.”
“형은 됐어.”
“형 안 먹으면 나도 안 먹어.”
“형은 배 안 고파서 너 먹을 것만 사 왔어.”
“나눠먹으면 되지. 형이 먼저 한입 먹고 나 한입 줘.”
그러자 루나가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리고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가 죽을 떠먹여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한입 떠먹었다. 그 행위가 마냥 좋아서 나는 히죽거렸다. 입을 헤 벌리고 어리광을 부리니 기가 막힌 지 루나가 웃음을 흘렸다.
“아앙-”
“잘도 받아먹네. 맛있어?”
“형이 먹고 먹여주니까.”
“뭐래. 아무튼 사이코.”
잠깐 웃는가 싶더니 루나는 이내 시무룩해져서 내 시선을 피했다.
“무슨 걱정 있어?”
내 질문에 그가 나를 흘긋 보고는 다시 시선을 내렸다.
“형…?”
“네가 이렇게 몸 아낄 줄 모르고 다치니까 형이 걱정이지.”
“경기하다가 좀 다친 거잖아. 운동하다 보면 부상은 일상이야.”
“도로로 막 뛰어들지를 않나, 깁스 푼 지 하루 만에 농구를 하지 않나.”
변명할 말은 없었다. 그래도 좀 억울했다. 나름 계획이 있어서 훈련 서두른 건데.
“나 괜찮아.”
“형 없으면 어쩌려고 몸을 막 굴려.”
“형이 왜 없어?”
“형이 왜 없냐니, 왜 없긴. 그럼 뭐 형이 평생 네 뒤만 졸졸 쫓아다닐까?”
내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우는 게 나 자신도 느껴졌다.
어두운 내 표정을 루나가 물끄러미 보았다. 그 얼굴이 너무 슬퍼보여서 금방이라도 떠나버릴 사람 같았다. 루나도 이제 떠날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걸까. 내 키가 커버려서? 키가 크면 금방 어른이 되고 루나를 지켜줄 만큼 센 남자가 될 줄 알았는데 그냥 키만 컸을 뿐이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나는 말썽이나 부리는 어린애일 뿐이고 루나를 지켜주기는커녕 내 몸 하나 건사 못해 이 꼴이 되었다.
루나를 보내기로 결심했으면서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또 뭔가. 여전히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변명거리를 찾고 있었다.
“이제 곧 나도 성인이야. 앞으로는 내가 형 뒤를 졸졸 쫓아다닐게.”
그는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네가 뭐 하러 내 뒤를 쫓아다녀? 형이 네 도움 필요한 사람 같아?”
“형…?”
그때 의사와 간호사가 들어왔다. 의사는 사무적으로 말을 쏟아냈다.
“응급으로 빼놔서 결과가 금방 나왔습니다. 상태는 뭐, 괜찮습니다. 환자가 젊고 다친 부위가 팔이라서 뼈는 금방 붙을 겁니다. 다만, 상습적인 골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당분간 농구 같은 운동은 하시면 안 됩니다.”
나는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너무 간단하게 말해버려서 나조차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받아들일 뻔했다.
“저 농구선순데요.”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들었어요. 그런데 안타깝지만 적어도 1년간은 농구 하면 안 돼요.”
루나가 물었다.
“1년만 쉬면 다시 해도 되나요?”
“아마도요. 2, 3개월에 한 번씩 진찰하면서 경과를 지켜봅시다. 퇴원은 지금 하셔도 되고, 한두 시간 안정을 취하다 가셔도 됩니다.”
갑자기 머릿속이 캄캄해져서 괜스레 눈만 깜빡이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무슨 말이에요? 저 농구로 체대 갈 건데요. 정식 입단도 할 거구요.”
“안됐지만, 1년 재수하든지 다른 길을 찾아보기를 권합니다. 잘못하면 뼈가 영구적으로 휘어버릴 수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 농구는 물론이고 일상생활도 힘들게 될지 모릅니다. 골절도 잘 치료하지 않으면 큰일 나요. 우습게 알면 안 됩니다.”
중간고사가 끝났고 수시 전형만 남은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 농구를 포기하라고?
의사가 병실을 나가자 기분 나쁜 적막만 남았다. 나는 황당함을 넘어 수치심까지 느꼈다. 딱히 수치심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특별히 표현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루나 얼굴 보기가 창피했다. 이깟 일도 못 해내는 나는 루나의 말대로 여전히 꼬마 정은별인가? 루나의 도움 없이는 홀로서기도 안 되는 꼬마.
“은별아.”
이름을 불러놓고 다음 말이 생각나지 않는 듯 루나는 한동안 입만 벌린 채 나를 응시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집에 갈래.”
“그, 그래.”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다리가 다친 게 아닌데도 루나는 나를 방까지 부축해주었다. 침대에 기대앉은 나는 내 옆자리를 손으로 톡톡 두들겼다. 루나가 선선히 그 자리에 걸터앉았다.
“형. 실망했지?”
“내가 실망을 왜 해?”
“엄청난 실력파도 아닌 주제에 팔이나 부러지고, 그나마 농구 하나 잘하는 건데.”
루나는 조금 쓸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은 실망이 아니라 걱정하는 거야. 우리 은별이가 좌절할까 봐.”
“형만 실망 안 하면 난 좌절 같은 거 안 해.”
그 말에 루나가 내 표정을 살폈다.
“농구, 못하게 돼도 나만 실망 안 하면 좌절 안 한다는 거야?”
“응.”
내 단호한 대답에 루나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기막힌 것 같기도 하고 허탈한 것 같기도 했다.
“너 농구선수 되는 게 꿈이라고, 엄청 열심히 했잖아. 그런데 그렇게 간단하게 포기할 수 있겠어?”
“응.”
“뭐야. 진정으로 대답하는 것 같지가 않아서 형 걱정돼. 솔직하게 말해줘.”
물론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었다. 장난처럼 시작한 농구였고, 루나 때문에 꾸게 된 꿈이었다. 루나만이 나를 꿈꾸게 할 수 있었다. 어떤 꿈이든 루나라는 출발점만 있으면 되었다. 그게 뭐든 나는 물불 안 가리고 도전했을 것이다. 그런 내게 그 어떤 것도 전부가 될 수는 없었다. 나에게 절대적인 꿈은 루나뿐이니까.
그러나 그동안 내가 바친 시간 속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농구와 나름의 교감을 하고 있었다. 학교생활, 친구들, 앞으로 펼쳐질 대학 생활, 모든 게 농구로 이어져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 시간이 한 번에 무너져버린 셈이었다.
그러니 완전히 아무렇지도 않을 수는 없었다. 다만 극복해낼 미래의 내가 눈에 보인다고나 할까, 며칠만 끙끙 앓고 나면 아무 일 없이 일상을 계속 살아갈 것이다.
그저 지금 당장은 좀 아팠다.
“형.”
“응?”
“안아 줘.”
루나라는 약이 필요했다. 상처 입기 전의 온전한 정은별, 그렇게 나를 리셋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루나뿐이니까.
루나는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가만히 안아주었다.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얹어놓은 채 달콤한 체향에 집중했다. 언제나 내게 안정을 주는 향기였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평소와 다른 것을 원하고 있었다. 아니, 평소에는 원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을 이제 원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제 괜찮다고, 내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나는 멋대로 단정했다.
“형.”
“응?”
“…….”
한동안 대답이 없자 그가 팔을 풀고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그의 코가 내 뺨에 닿았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우리의 코끝이 맞닿았다. 나는 잠시 눈꽃송이 같은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다가 입술을 포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