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워튼 씨는 파리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만약 그가 도용한 신분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경찰이 파악한 상태라면, 워튼 씨는 자신의 정체를 증명하기 전에는 풀려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는 워튼 씨가 플럼버인이라는 것이 들통날지도 모르며, 그 과정에서 그와 자주 교류했던 회원들의 정체까지 탄로 날 위험이 매우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나는 깊게 고민하지 말라고 나를 위로했지만 나야말로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그러나 위로 따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잊고 있던 게 하나 있었다. 내가 배리를 구하느라 팔을 다쳤던 날, 루나가 타임 낫과 순간이동을 행하는 짧은 시간 미묘한 시간의 틈에서 그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 이가 한 명 있다는 사실 말이다.
드디어 팔의 깁스를 풀고 등교한 날이었다.
매점에서 지동현과 바나나우유를 쪽쪽 빨고 있을 때였다. 음습한 기운과 함께 짐승의 앞발 같은 손이 내 어깨를 턱 잡았다. 돌아보니 하마의 면상이 있었다. 나는 씨발, 욕을 씹으며 돌아섰다. 멍청하게도 그때까지 단 한 번도 그 일을 떠올리지 못했다.
“뭐냐?”
최지환은 떫은 감 먹은 하마 같은 얼굴로 턱을 까딱해 보였다.
“잠깐 얘기 좀 하자.”
나는 남은 바나나우유를 쪼옥 빨고는 빈 병을 지동현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투덜거리는 지동현을 내버려 두고 매점 밖으로 나오자 최지환이 화단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한껏 불량한 태도로 그 앞에 가 섰다.
“너랑 나랑, 쌈박질이면 몰라도 얘기 같은 걸 할 수 있을까?”
“까불지 말고 따라와라.”
“뭐 이 새끼야?”
녀석이 앞장서 걸었다. 나는 툴툴거리며 뒤를 따랐다. 녀석은 복잡한 수돗가를 지나 건물 모퉁이의 공터로 향했다. 거기 멈춘 녀석이 버티고 서기에 나 역시 턱을 쳐들고 물었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오냐?”
녀석이 하마 면상을 내 안와까지 쓰윽 들이밀었다.
“내가 루나 사장을 봤거든.”
“우리 형이야 커피숍에 가면 누구나 볼 수 있지. 그게 뭐?”
“중간고사 다음 날, 학교 앞 교차로에서.”
내 안색이 변하자 최지환이 능글맞게 웃었다. 당황하는 티를 내면 안 되는 거였는데 어리석었다.
어차피 때는 놓쳤으니 어쩔 수 없는 일. 나는 한발 뒤로 물러나며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뭔 말인지 지껄여봐.”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말이지.”
“돼먹지 않게 뜸 들이지 말고 본론부터 말해.”
“네가 갑자기 차로로 뛰어들길래 깜놀했거든.”
그제야 그날 루나가 한 말을 허투루 들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긴, 새겨들었어도 뭘 어떻게 할 수도 없지만.
“정은별 저 새끼가 왜 훤한 아침에 지각하다 말고 자살을 하나 싶었지. 난 또 중간고사 망쳐서 새삼스럽게 자폭하나 했다.”
“재미도 없는 농담은 집어치우고.”
“그런데 고양이 때문이더라고. 이상하게 그날따라 스쿨존에서 속력 내는 차가 많더라. 네가 고양이를 끌어안고 바닥을 굴렀을 때 그 차로로 택시가 막 달려왔었어. 난 너 진짜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그 순간 느닷없이 루나 사장이 나타났어.”
씨발. 진짜 씨발이다. 나는 이미 입장을 정했다.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우리 형이?”
시치미가 답이다. 어떤 말로도 변명이 안 되는 상황이니까. 최지환이 비웃음을 머금고 계속 지껄였다.
“여기서 나타났다는 말은 말 그대로 뿅 하고 나타났다는 뜻이야. 난 신호 기다리면서 건너편을 계속 보고 있었거든? 그때까지 루나 사장은 절대 어떤 길로도 걸어오지 않았어. 그냥 도로 한복판에 나타났다고. 마법사처럼.”
“네가 잘못 봤겠지. 그날 우리 형은 고양이 찾으러 거기까지 왔다가 날 발견하고 구한 거야.”
그러자 최지환이 내 앞으로 바짝 다가오더니 또 내 안와까지 면상을 들이밀었다.
“그래. 거기까지만 봤으면 나도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는데, 그다음이 문제야. 루나 사장은 물론이고 너까지 뿅 사라졌거든.”
“…….”
그야말로 말문이 막혔다. 분명 루나는 낫을 풀고 얼마간 시간을 지우는 작업을 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저 녀석은 그날 나와 꽤 오랫동안 같은 시간을 보냈다. 내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눈이 마주쳤으니 교차로까지 같이 걸어온 시간만 해도 5분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그 정도 시간을 지우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니 어차피 틀린 일이었다. 게다가 실외에서 시간을 지우는 일은 단 몇 초라도 상당히 위험한 일이라고 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최지환의 기억은 거의 지워지지 않았다. 설령 어느 부분이 지워졌다 해도 교차로 앞까지 함께 걷던 나를 기억한다면 말짱 쓸데없을 터였다. 이게 바로 루나가 말한, 타임 낫과 순간이동을 실외 공간에서 행할 경우 나타나는 부작용인 모양이었다.
“근데 그러고 나니 떠오르는 게 하나 있더라. 초딩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잖아.”
이렇게 된 거 끝까지 시치미 전략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분명히 내가 너 깔고 앉아서 패고 있었는데, 웬일인지 내가 엎어져 있고 넌 사라졌어. 애들은 그런 적 없다고, 은별이가 날 밀치고 도망간 것 같다고 했는데 난 분명히 네가 나한테 깔려서 얻어터지고 있었던 기억이 나거든.”
“글쎄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난 전혀 기억에 없는데.”
최지환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이제 그 얼굴이 무섭지는 않았지만 찜찜했다.
“그때는 그냥 농담이었는데…. 루나 사장, 진짜 외계인이지?”
섬뜩했냐고? 당연히 섬뜩했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이 녀석도 대가리가 커졌으니 대충 넘어가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쨌거나 일관성 있게 딱 잡아떼는 수밖에 없었다.
“야. 말 같지 않은 소리 집어 치우고 재수 없는 면상도 치워. 남의 귀중한 시간 뺏지 말고.”
나는 녀석의 가슴팍을 밀어버렸다. 녀석은 나를 노려볼 뿐 더 대들지는 않았다. 나는 최대한 무심한 척 녀석을 꼬나보고는 돌아서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 무심코 생각난 것이 있어서 돌아보았다.
“너, 나한테 뛰어왔냐?”
최지환이 인상을 팍 구기며 되물었다.
“뭔 소리야?”
“나 차로에 굴렀을 때 놀라서 뛰어왔냐고.”
녀석의 못생긴 입술이 슬쩍 비틀렸다.
“내가 약 먹었냐? 네가 뒹굴건 말건 내가 왜 놀라서 뛰어가?”
“그럼 그렇지. 난 또 네가 진짜 미쳤나 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가던 길을 걸었다.
외계인이냐니, 그냥 하는 소리겠지? 일종의 비유일 것이다. 그나저나 저 새끼가 떠들고 다니면 학교 안팎에 소문나는 건 시간문제일 텐데. 한술 더 떠서 SNS에라도 올리면? 물론 명예훼손에 대해 이제 녀석도 알 만큼 알 테니 직접적인 기술은 하지 않겠지만 그걸 보고 누군가 냄새를 맡는다면? 뿔테안경이 감을 잡는다던가….
뿔테안경은 그 후로 두어 번 로저의 레이더망에 잡혔을 뿐 이렇다 할 접근은 하지 않았다. 다만 황당하게도, 루나커피에 당당하게 들어와 커피를 주문했던 일이 한 번 있었다.
로저가 말해줬기에 알았지 그냥 회사원인 줄 알았다. 외모뿐 아니라 행동에서도 특별히 수상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짧게나마 추격전을 벌였음에도 로저를 보는 그 남자의 표정에는 아무런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무표정을 연기한 것이라면 그야말로 대종상 감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로저의 리딩 기술이 그에게는 먹히지 않는다는 거였다. 로저는 그가 플럼버의 칩 통제장치를 사용한 것 같다고 했다.
그 후로 무슨 일이든 일어날 것 같았는데 지금까지 별일 없었다. 그게 벌써 1년도 더 전의 일이다.
그러니 이것도 별일 아닐 것이다. 적어도 위험한 상황은 아니다. 최지환 혼자서 뭘 기억하든 그게 문제 될 리 없었다. 누가 저 녀석 헛소리를 믿어준다고.
아무튼 이런 일이 자주 생겨서 좋을 것은 없었다. 일단 내 기분이 무척 상했다. 이런 비슷한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말할 수 없이 불안했다. 금방이라도 루나와 고양이들 신변에 안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래서였던 것 같다. 그날 오후부터 재개한 농구부 훈련에서 실수를 거듭한 것은.
깁스는 풀었지만 며칠 더 팔을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권고를 무시한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사실 나는 좀 초조했다. 마지막 대항전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시합에서 우승하면 승률이 1점 더 높아진다. 그 1점이면 내가 희망하는 대학 두 곳 중 더 명문으로 갈 수 있었다.
나는 어서 근사한 남자가 되고 싶었다. 느닷없이 루나를 떠나보낼 일이 생긴다면 그에게 멋진 남자로 기억되고 싶었다. 꼬맹이나 코흘리개가 아닌, 날아오르는 정은별로 말이다. 그의 가슴에 별처럼 남고 싶었다.
이별의 시간.
그것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뿔테안경은 어디선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머리통에 자물쇠 거는 방법을 안다면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실험 중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관찰하는 단계 말이다. 아치볼트와 엘리아가 엉뚱한 곳으로 도킹한 것도, 로저의 말대로 그들의 실험이 어느 정도 성공했음을 뜻하는지도 모른다. 조르주가 사라진 것도 그들의 짓일지도…. 그렇게 한 명씩 잡아가서 실험을 하고….
“헉…!”
그 생각을 하니 숨이 막혔다. 그동안 어리석고 이기적인 나는 눈에 훤히 보이는 위험을 의도적으로 묵살하고 있었다. 루나와 함께 있고 싶어서, 루나를 보내기 싫어서, 루나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 주체는 오로지 나였다. 루나가 아니라 나 자신이 우선인 생각이었다.
“나쁜 새끼.”
그리고 나는 겨우 결심했던 것 같다. 로저를 도와야겠다. 어떻게든 루나를 데리고 그가 플럼버로 떠날 수 있도록 도와야겠다고.
그 상태로 덩크슛 따위를 시도하는 게 아니었다. 별것 아닌 것 같았던 팔의 부상이 치명적인 실수를 불러왔다. 공을 놓친 것은 그렇다 치고, 기분 나쁜 통증에 주춤거리고 있는데 같은 편 아이가 쏜 속공이 내 팔을 맞췄다. 그 아이는 당연히 내가 패스를 받아줄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나는 바보같이 공에 맞고 쓰러졌다.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통증을 느낀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