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누차 말했듯이, 저는 운명론자랍니다.
저에게 네임이 생겼을 때 저는 이름의 주인을 찾으면 평생 그 사람만을 사랑할 거라고 다짐했어요. 제가 그렇게 운명을 믿는 이유는, 부모님의 영향이 컸을 거예요.
두 분은 여러모로 맞지 않는 사람들이었어요. 아빠는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걸 좋아했고 엄마는 그걸 질색하셨어요. 아빠는 친구들과 왁자하게 노는 걸 즐겼고 엄마는 그것도 질색하셨어요. 그런 일차원적인 취향 말고 제가 모르는 부분에서도 두 분은 맞지 않았을 거예요. 특히 대화가 통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제 기억 속에 두 분이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하지만 조부모님은 반대였죠. 극단적으로 말하면 부모님은 결혼생활의 나쁜 예, 조부모님은 좋은 예였어요. 그리고 저는 그게 네임 때문이라고 단정했어요. 조부모님은 네이밍이 된 사이였고 부모님은 그렇지 못했으니까요. 그 생각을 한 것은 아주 어릴 때였어요.
그때부터 제 세계에서 연인이란, 운명이 정해주는 사람이라는 관념이 뿌리 깊게 박혀버린 거예요. 그러니 그 생각을 바꾸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겠어요?
그 때문이에요.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제가 그 생각을 포기하지 못한 이유는 말이죠.
고백할게요. 요즘 저는 어쩌면 그 생각이 족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요. 그 네임만 아니라면 은별이와 저 사이에 문제라고 할 만한 게 있을까요? 은별이도 저를 형 이상으로 생각할 일이 없었을 거예요.
물론 언젠가는 헤어질 수밖에 없으니 그 아이에게 영원히 형이 되어준다는 약속을 할 수는 없지만, 이제 조금만 있으면 은별이도 성인이 되잖아요. 대학 생활에 적응하고, 사회인이 되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은별이도 저에 대한 기억에서 벗어나는 날이 올 거예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기 행복을 찾겠죠.
이 정도면 완벽한 관계가 아닐까요? 피를 나눈 부모 형제라도 영원히 함께 해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후우…. 오늘의 커피와 오늘의 샐러드, 크로크무슈 나왔습니다.”
“오늘 사장님 기운이 없으시네요.”
“아, 아니에요. 맛있게 드세요.”
제 한숨에 손님 한 분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시네요. 저도 모르게 업무에 감정을 얹어버리고 말았어요. 손님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신경을 써야겠어요.
운명은 의무일까요?
언제였던가요? 은별이가 그 말을 했던 것이. 아마도 아직 조그만 녀석일 때였을 거예요. 또 이렇게도 말했었죠.
제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그처럼 행복한 일도 없다고 생각해요.
“후우….”
“야옹, 바보.”
필립이 제 다리를 꼬리로 슬쩍 ‘긁고’ 지나갔어요. 마침 내려온 로저가 필립을 안아 들었어요.
“가게 떠내려가겠네. 웬 한숨을 그렇게 쉬는 거야?”
“아, 아니에요. 로저. 은별이는요?”
“쉴 새 없이 투덜거리더니 잠들었네.”
로저가 필립을 계단 위에 내려놓았어요.
“야옹, 로저. 거실의 새장을 봤나?”
“음. 배리가 있더군.”
“야옹-”
필립은 고개를 저으며 이층으로 올라가버렸어요. 더 떠들면 손님들이 눈치챌 수도 있으니 참는다는 뜻일 거예요.
“제가 배리를 가둔 게 잘못이라는 건가요? 그 아이 때문에 은별이가 죽을 뻔했는데 벌을 받아야죠.”
“은별이가 배리를 구하려다 다친 거라고?”
“네.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니까요. 은별이가 말 안 해요?”
“안 하던데. 그냥 넘어졌다고 하더군.”
“때마침 좌표가 열려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지금 이렇게 평화롭게 여기 서서 커피나 내리고 있지 못했을 거예요.”
“좌표가 열렸어?”
저는 로저를 흘긋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종종 그래요.”
로저 역시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렇군.”
“은별이가 뭐라고 투덜거리던가요?”
“내가 온 게 영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더군. 빨리 가라고 성화였지만 나는 꿋꿋하게 환자를 보살폈네.”
“고마워요, 로저. 저기 앉아서 커피나 한잔하세요.”
“무슨 말씀을. 내가 손님인가? 온 김에 일이나 돕겠네.”
로저가 도와준다니 사실 반갑기는 하네요. 아직 알바생 오려면 멀었는데 요즘 부쩍 더 바빠져서 좀 버겁던 참이었거든요.
로저는 그동안 스킬이 아주 훌륭해져서 두루두루 도움이 많이 된답니다. 게다가 워낙 미남이라 로저가 오면 근처에 사시는 아줌마 손님이 부쩍 많아져요.
“저녁 드시고 가세요.”
“좋지.”
영업이 끝난 후 우리는 함께 저녁 준비를 하기로 했어요. 로저가 좋아하는 대구매운탕을 끓이기로 하고 슈퍼에 가서 간단하게 장을 봐왔어요.
돌아와 이층으로 올라가니 은별이가 눈을 부비며 방에서 나오고 있었어요.
“뭐야?”
은별이 얼굴이 굳어지는가 싶더니 저와 로저를 번갈아 쏘아 보네요.
“은별이 깼어? 오늘은 대구매운탕 하려고. 너도 괜찮아?”
제 물음에 은별이는 부루퉁하게 우리를 쳐다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어요.
“응.”
“금방 준비할게. 쉬고 있어.”
“배리는 왜 가둬놓은 거야?”
“벌 받아야지.”
은별이는 고개를 저으며 새장 문을 열어줬어요. 새장 앞에서 야옹거리던 필립과 미오가 입을 쩍 벌렸어요.
“야옹. 이러는 방법이 있었구낭!”
“야옹!”
배리가 구슬프게 울면서 은별이 가슴으로 파고들었어요. 저는 쳇, 혀를 차며 주방으로 들어왔어요. 로저가 팔을 걷어붙이며 봉지 안에서 냉동 대구를 꺼내고 있었어요.
“내가 손질해주지.”
“못하는 게 없으시네요.”
“못 먹을 것만 떼어내면 되는 거잖아.”
“그렇죠. 인생도 그렇게 간단하면 좋겠네요.”
“루나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인생을 가장 간단하게 사는 사람인데 왜?”
“제가요?”
로저가 대구토막들에 붙어있는 지느러미를 가위로 쓱싹쓱싹 잘라냈어요.
“루나커피라는 소우주를 경영하는 사람 아닌가? 이처럼 간단하고도 명쾌한 삶이 어디 있나?”
“형 마음이 심란한가 보죠.”
깜짝이야! 어느새 은별이가 주방에 들어와 있었어요. 배리를 어깨에 떠메고 있었는데, 냉장고 문을 열 때 보니 등 뒤에 블링과 라미도 매달려있네요.
필립도 따라 들어와 바 위에 옹기종기 앉았어요. 언젠가부터 고양이들이 저보다 은별이에게 더 들러붙는답니다.
“은별아. 나가서 기다려. 팔 불편하니까 많이 움직이지 말고.”
“아프지도 않아.”
은별이는 우유를 꺼내 절반은 포트에 붓고 절반은 자신의 잔에 따랐어요. 목이 말랐는지 한잔을 쭉 마시고는 손등으로 입을 쓱 닦았어요. 그리고는 전에 없이 터프하게 말했어요.
“쌀 씻을게.”
필립이 끼어들었어요.
“야옹, 난 싸우자고 할 줄 알았다.”
뭐가 재미있는지 고양이들이 야옹거리네요. 저건 웃는 거랍니다. 저는 못마땅하게 고양이들을 쳐다보고는 은별이에게 말했어요.
“앉아있어. 깁스하고 무슨 쌀을 씻어.”
“쌀은 한 손으로도 씻을 수 있어.”
알고는 있지만 은근히 말 안 듣는 은별이에요. 데워진 우유를 고양이들에게 챙겨주고는 멋대로 쌀통을 열고 있네요.
어느새 로저가 생선 손질을 다 마치고 뒷정리까지 말끔히 해놓았네요. 은별이가 옆에서 쌀을 씻으며 투덜거렸어요.
“아, 비린내.”
로저가 냄비에 물을 부으며 물었어요.
“매운탕 싫어하니?”
“반찬으로는요.”
“그게 무슨 말이야?”
“술안주로 먹을 수 있게 되면 좋아질 것 같아요.”
한마디 안 할 수가 없네요.
“어른 돼서 술 먹을 생각만 하는 거야?”
그러자 은별이가 꽤 매서운 눈으로 저를 돌아봤어요.
“그럴 리가 있어?”
쳇. 카리스마 부리고 난리야, 쫄게.
“야옹, 둘이 또 뭐가 잘 안 풀리냐?”
“아빠, 저녁 다 됐어요.”
“나더러 매운탕을 먹으라고?”
고양이들에게는 사료를 주고, 그럭저럭 근사한 냄새가 나는 매운탕을 주메뉴로 저녁 식탁이 차려졌어요. 로저와 저는 와인을 마셨고 은별이는 탄산수를 마셨어요. 이런 저녁이 저는 정말로 좋답니다. 할 수만 있다면 평생 매일같이 반복하고 싶어요.
“요즘도 농구 하니?”
로저의 질문에 은별이가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어요.
“아저씨는, 요즘도 글 쓰세요?”
나 원, 또 시작이네요. 쥐와 고양이 같은 관계랄까요, 둘이는 눈만 마주치면 아웅다웅이에요.
“은별아. 로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오시는데 새삼스럽게 무슨 질문이야?”
“아저씨가 먼저 했어.”
“나는 정말 몰라서 물은 거다.”
“이 팔 농구 하다 다쳤다고 했잖아요.”
“무슨 말이야? 배리 구하다가 다쳤다며.”
“젠장.”
저는 기막혀서 식탁을 톡톡 두들겼어요.
“은별이 왜 심통 부려? 매운탕이 입에 안 맞아?”
“내가 무슨 심통을 부렸다고?”
로저가 빈정거렸어요.
“하긴, 아직 어린아이에게는 너무 맵지 싶구나.”
“어우 씨.”
“은별이 라면 먹을 때 김치랑 청양고추까지 넣어 먹는 앤데 이게 맵기는요.”
그때 필립이 외쳤어요.
“좌표다!”
주방 한가운데에 좌표가 열렸어요. 로저가 좌표를 식탁 앞으로 옮겨놨어요. 워튼 씨의 모습이 보였어요. 묘한 장면이 뜨네요.
“뭐죠?”
“저거 경찰이야?”
은별이 말대로 워튼 씨가 경찰에 체포되는 것 같았어요. 장소는 공항처럼 보였어요.
로저가 말했어요.
“드골공항이네.”
“어떻게 된 거죠?”
“아무래도 저건 플럼버와는 상관없이 워튼이라는 이름 때문에 일어난 불상사 같은데.”
로저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저도 잘 안답니다. 사실 워튼 씨는 동명이인이에요.
“신분을, 들킨 걸까요?”
“그런 모양이야.”
워튼 씨는 위험한 순간을 깨닫고 우리에게 신호를 보낸 거였어요. 좌표는 일방적으로 뜨기도 하지만 이렇게 위험에 처했을 때 가족이나 지인에게 좌표 신호를 보내면 저절로 띄워지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만일의 경우 그의 정체가 들통이 나면 정말이지 큰일이랍니다.
“어쩌죠?”
“지금으로서는 워튼 씨가 조사받고 있는 기관이 어디인지, 혹시나 이상한 곳으로 끌려가지는 않는지 관찰하는 것 말고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나탈리는 워튼 씨의 비밀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요?”
“글쎄, 그것까지는 나도 들은 바가 없어서 모르겠어.”
“워튼 씨 신분이라니 그게 뭐예요?”
은별이의 질문이었어요. 저와 로저는 시선을 주고받고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은별이도 우리의 일원이고 이제 다 자랐으니 알 권리가 있다는 것에 둘 다 동의한 것이지요. 로저가 말했어요.
“이건 순전히 우연인데, 플럼버의 프레데릭 워튼이 표류하던 날 지구의 밴쿠버에 살던 프레데릭 워튼이 죽었어.”
“어… 그래서요?”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나이대도 생김새도 비슷했어. 게다가 밴쿠버의 워튼 씨는 혈혈단신이었지.”
“그래서, 신분을…?”
“그래. 완벽하게 신분세탁을 한 셈이야. 그 덕에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며 살고 있는 거지.”
“그걸 지금 들켰다고요?”
“확실히는 모르지만, 그렇지 않겠니?”
“야옹, 조르주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필립 말마따나 프랑스에 조르주가 있었다면 워튼 씨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을 거예요.
“대체 조르주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로저는 내일까지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겠다며 디저트도 먹지 않고 돌아갔어요. 그날도 불안한 나날 중 하루가 되어버렸어요.
완벽한 평화란 오로지 플럼버에만 존재하나 봐요. 어째서 저는 길을 잃었던 걸까요? 어째서 제 배필은 이곳에 있는 걸까요? 모든 게 궁금하기만 할 뿐 답은 구할 수 없네요. 루나 블랑슈의 인생은 영원히 이 모양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