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겨우 3개월 남짓 남았는데 고백 아닌 고백을 하고 말았다.
루나 블랑슈는 정은별을 사랑해.
“젠장.”
좀 더 근사하게 고백하려고 했는데. 아, 물론 진짜 고백은 아직 안 했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가. 그것까지 했으면 밤새 나를 두고 플럼버로 야반도주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을 했겠지. 그게 뭐냐고?
당연히 정은별은 루나 블랑슈를 사랑한다, 이거지. 시시한가? 지구의 인간이 80억이라고 치면 79억 9천 9백 99명에게는 시시해도 상관없다. 단 한 명, 나의 루나에게만 진심이 통하면 되니까.
아무튼 확실한 건, 이제 루나는 엄마 같고 누나 같은 연상녀에게는 관심 없다는 것. 어여쁜 연하녀에게도 관심 없다는 것. 뭣보다 어제 그가 보여준 태도와 필립의 대화로 미루어 그는 내 곁에 여학생들이 벌떼처럼 꼬이는 걸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그게 질투가 아니면 뭐야?
“혜리가, 그렇게 예뻐?”
…라는 내 질문에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큼직한 은회색 눈동자에는 들키고 싶지 않지만 들키지 않고서는 풀리지 않을 의혹이 깃들어있었다. 그렇게 오묘한 눈빛을 어떻게 아느냐고? 정확히 내 눈빛과 똑같았으니까.
“네 눈에는 안 예뻐?”
루나는 영리한 사람이다. 루나는 거짓말을 못 한다. 이 두 가지 성향은 서로 충돌한다. 그러니 그로서는 최선의 반문을 한 것이리라.
그가 내게 구원의 손을 뻗었던 날로부터 나는 세상 최고로 행복한 아이가 되었다.
반면 그 행복만큼은 아니지만, 나는 상당 부분 초조하고 힘들었다. 마치 루나 블랑슈라는 달을 바라보는 달맞이꽃 같은 신세였다. 달빛을 받을 수는 있으나 닿지는 못할 그를 바라보는 신세 말이다.
그래서였다. 그 순간 나는 그를 조금 애태우고 싶어졌다. 심통이 났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아주 조금만, 상대에 대한 일방적인 열망이 얼마나 외로운 희망 고문인지를 루나도 조금은 알았으면 싶었다.
“예뻐. 딱 내 취향이야.”
정은별의 시신경에는 우월영 한정 초정밀 카메라가 장착되어있다. 그 렌즈에 루나의 동공이 딱 잡혔다. 심각한 지진이 일어났다!
그걸 들킬까 봐 그는 서둘러 생선을 뒤집었다. 그런데 직전에 이미 뒤집은 것을 또 뒤집는 바람에 생선은 엉망으로 부서져버렸다.
“아, 젠장! 다 망쳤어!”
사실 그것부터 웃기는 일이었다. 루나는 생선을 처음 굽는 게 아니므로 플럼버인의 마법을 쓰면 되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는 그 능력을 쓰는 일 자체를 잊어버린 것처럼 행동할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지금 그걸 지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보다 더 해보고 싶은 일이 생각났다.
나는 은근슬쩍 그의 등 뒤로 가 섰다. 그리고 그의 두 손을 잡았다. 그의 하얀 목덜미가 내 뺨에 닿았다. 그에게서 풍기는 달맞이꽃 향기가 주방에 퍼진 생선 냄새를 장악해버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같이 해보자.’
그 순간 나는 루나의 심장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내 심장 소리가 아니었냐고? 내 심장은 그 전부터 힘차게 뛰고 있었고 거기에 새로운 심장 소리가 보태진 거였다. 내게 잡힌 루나의 손이 가늘게 떨려왔다. 심장으로부터 오는 떨림이었다.
내 손이 그의 손을 잡고 신중하게 움직였다. 뒤집개를 생선 아래로 밀어 넣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미 망가진 생선은 점점 더 엉망이 될 뿐이었다. 평소의 그라면 한 마디 쏘아붙였을 것이다. 너 때문에 더 망쳤잖아. 장난 좀 치지 마.
그러나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창문으로 비쳐든 석양이 우리를 감싸주었다. 주방이 온통 오렌지색이었다. 그의 뺨도 오렌지색으로 물들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기댄 채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석양의 빛 속에 서 있었다. 모처럼 완벽한 저녁이었다. 생선은 초토화되었지만.
*
“야.”
“드르렁….”
이 한심한 놈. 이제 10분만 있으면 시험 시작인데 내 짝꿍이자 같은 농구부원인 지동현 이 자식은 그 시간마저도 알뜰하게 챙겨서 취침 중이다. 체육고의 경우 고3 2학기 시험은 그다지 중요한 의미가 없기는 하지만, 이 녀석은 중요한 의미가 있을 때도 쳐 자는 놈이다. 여러모로 이선호와 비슷한 놈이라 아무래도 내 주변에는 이런 놈만 꼬이는 것인가 싶어 기분 싸했다.
나는 지동현의 이마를 따각, 손가락으로 튕기고는 재빨리 턱을 괴고 앉았다.
“아얏!”
불시에 잠에서 깬 녀석이 벌떡 일어나 조그만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몹시 수상쩍다는 듯이 내 옆통수를 노려보았다.
“정은별, 네가 나 때렸냐?”
“아니.”
녀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마를 문질렀다. 나는 무심한 투로 말을 던졌다.
“갑자기 말수가 줄었어.”
“누가, 내가?”
“그동안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조잘거리던 사람이 말수가 줄고 어딘지 어색해해. 그거 질투지?”
“뭘, 질투할 일이 뭐가 있어?”
“여자애들이 꽃다발 들고 쫓아다니는 거.”
지동현은 잔뜩 부은 눈두덩을 손바닥으로 쓱쓱 비벼댔다.
“근데 정은별, 네 얘기야? 너 여친 있어?”
“있다고 치고.”
“아무래도 여친 입장에서는 그런 거 기분 나쁘지.”
내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렇지?”
이 부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질투란 한 가지뿐이다. 루나가 내 인기를 질투할 리는 없으니까. 지동현이 내 밝은 얼굴을 오해하고 쏘아붙였다.
“너 이 새끼야. 여자들한테 인기 좀 있다고 여친 우습게 보는 거 아냐?”
“미친놈이 뭐래.”
단추 구멍만 한 눈을 가늘게 뜨고 지동현이 나를 째려보았다.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동현 너, 그 눈으로 뭐가 보이기는 하냐?”
“내 시력이 좌우 1.5거든. 이 배신자 새끼. 너 지난달인가, 우리 집 놀러 왔을 때도 여친 없다고 했잖아.”
“그랬나?”
“미현이가 물어봤을 때, 생각 안 나?”
미현이는 지동현과 꼭 닮은 여동생이다. 키가 아주 크고 눈이 아주 작다. 지동현네 집에 놀러 간 게 딱 두 번인데 그때마다 미현이가 집에 있었다. 나는 그 아이가 ‘딴 맘’을 먹지 않기를 바랐는데 아니었나 보다. 하긴 이 키에, 이 미모에 그건 너무 소박한 꿈인가.
옳다구나, 하는 얼굴로 지동현이 여동생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네가 보는 눈이 없어서 모르나 본데, 우리 미현이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알아? 내 동생이라 하는 말이 아니라 애가 볼수록 귀엽다니까. 말할 때 눈웃음치는 거 봤냐? 완전 귀욤 포텐 터지지 않냐? 너 천생연분은 오빠 친구 동생인 경우가 많아. 우리 엄마 아빠도 누나 친구 동생으로 만났거든. 지금부터 역사를 쌓다 보면….”
“야, 이거나 먹어라.”
어쩔 수 없이 녀석의 입에 아까운 바나나우유를 물려주었다.
“우와, 대박.”
단세포 같은 녀석, 금방 쪽쪽 빨며 싱글벙글 이다.
“지동현 너 다음번에 이선호 만날 때 끼워줄게 와라. 너랑 저세상 형제 같은 놈이거든.”
“얼굴 허여멀건해가지고 키 요만한 녀석 말이야?”
“역시, 꿈에서 본 적 있지?”
“네 핸드폰에서 봤잖아. 이선호.”
“너랑 결이 아주 같아.”
“이 새끼가 어디서 약을 팔아? 어딜 내가 그 쥐방울이랑 닮았냐?”
마침 수업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중간고사 마지막 날이었다. 입단과 동시에 체대에 들어갈 애들은 사실상 이게 모든 지필 시험의 마지막이기도 했다.
“자! 핸드폰을 비롯해 스마트 기기 다 가방에 넣고!”
*
“재수 없어.”
다음 날이었다. 엊그제 자전거 수리를 맡겨서 버스를 탔는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하마 같은 얼굴과 마주쳤다. 최지환이었다. 녀석은 학교와 집이 가까워서 걸어 다니는 모양이었다.
씨발, 저 새끼 얼굴은 언제쯤 안 보고 살 수 있나. 대학에 들어가면 안 보고 살려나? 설마 대학까지 쫓아오는 건 아니겠지? 생각만 해도 재수 없어서 오금이 저렸다.
그나마 반이 달라서 다행이랄까. 고등학교에 들어온 후로는 본격적으로 붙어본 적은 없지만 체육관에서는 수시로 마주쳤다. 그때마다 서로 못 볼 꼴 봤다는 표정을 교환하고는 시선을 돌려버리는 정도였는데 그런 걸 도화선이라고 한다. 언제든 불만 붙이면 폭발해버릴 관계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조금 기대하고 있었다. 이번에 걸리면 녀석은 국물도 없을 거였다. 얼마 전부터 내 키가 녀석의 키를 추월한데다가 고등학교에 와서는 근력 훈련도 하고 있어서 제법 근육이 붙은 터였다. 한번 들이대기만 해라, 코를 납작하게 해줄 테니.
그렇게 벼르고 있는데 이 치사한 자식이 질 게 뻔하다는 걸 알아서인지 예전처럼 섣불리 시비를 걸어오지를 않았다. 내가 먼저 싸움을 걸어올 리는 없다는 것도 잘 아는 놈이었다. 아주 질 나쁜 새끼.
녀석이 잰걸음으로 걷기에 나는 일부러 느릿느릿 걸었다. 아침부터 저 녀석과 마주쳤으니 온종일 재수가 없을 것 같았다.
엄청나게 지각한 탓에 등교하는 놈들은 하나도 없었다. 원래 나도 지각은 잘 안 하는 편인데 오늘 아침에는 넋이 좀 나가서 뒷마당 벤치에 한동안 앉아 있느라 그랬다. 어제의 여운 탓이었다.
루나와 나는 분명 어제 뭔가 좀 깼다. 얇은 막 같은 것이 깨졌다는 뜻이다. 그건 분명 관계의 재정립에 대한 희망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이상하게 희망조차 없을 때보다 훨씬 더 목이 말랐다.
그렇게 넋을 잃고 있는 나를 필립이 깨웠다. 필립 아니었으면 아마 해질 때까지 어제 일을 곱씹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나왔으니 당연히 지각인데, 어쩐지 지각도 저 녀석 탓인 것 같았다.
“뭐야, 새끼…?”
빠릿빠릿하게 걷던 녀석이 슬슬 걸음을 늦추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급기야 교차로 앞에 나란히 서게 됐다. 크크, 척 봐도 이제 내가 이 녀석보다 훨씬 크다. 녀석은 아니라고 우기겠지만. 엄청난 우월감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플럼버의 달에는 인어가 산다네….”
녀석이 슬쩍 쳐다보는 게 곁눈으로 보였다. 나 역시 질 수는 없어서 녀석을 돌아보았다. 눈에 힘을 주고 휘파람을 불었다. 녀석의 눈썹이 쫘악 올라갔다. 내 눈썹도 쫘악 올라갔다. 녀석의 입꼬리가 쓰윽 올라갔다. 내 입꼬리도 쓰윽 올라갔다. 우리는 동시에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건너편 인도를 걷던 고등어 얼룩 고양이 한 마리가 갑자기 차로로 뛰어들었다.
“어어…?”
내 눈이 절로 오른쪽을 향했다. 스쿨존이지만 꼭 저런 차는 있었다. 시속 70km로 달려오는 차 말이다. 아무래도 속도를 줄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두면 고양이는 깔려 죽을 것 같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다. 달려오는 자동차를 멈춰 세울 방법이 없을까 얼핏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고양이가 배리라는 것을 안 순간 내 몸이 저절로 튕겨 나갔다. 그와 거의 동시에 누군가의 비명이 귓전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