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루나를 만난 후 내 인생은 행복이라는 바다를 순항 중이다.
하지만 루나커피로 인해 맺어진 많은 인연들은 예상과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뜻밖의 순간에 헤어지고,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하고, 그 과정에서 나는 생각지도 못한 슬픔에 빠졌다.
준이와 로저의 이별, 라라와 미오의 사별.
그들이 아픈 만큼 똑같이 느낀다고는 못하겠지만 내게도 상당한 고통을 안겨주는 사건들이었다. 어느새 그들은 내게도 가족이고 친구였다. 우리는 같은 마음을 나누며 그 시간을 견뎌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내 청춘의 서막은 끝나가고 있었다.
*
질긴 인연이다. 최지환 저 새끼는 고등학교까지 날 따라와서는 하고많은 스포츠 중에 하필 또 농구를 하고 있었다. 중학교 때 분명 야구로 전향할 거라고 떠벌리고 다녔는데 말이다. 포지션까지 센터라 사사건건 걸림돌이었다. 안 그래도 그 몸집에 어울리게 녀석의 장기는 철벽 수비였다.
이번 구 대항전은 고등부 마지막 경기였다. 지난 학기 동안 두 번의 정식 경기가 있었는데, 경기 전체를 놓고 보면 나쁜 성적은 아니었지만 제대로 된 슛을 넣지 못했다. 그때마다 루나는 그래도 잘했다며 좋아했지만 나는 그에게 근사한 슛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러니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야 했다. 이건 내 열여덟 청춘의 마지막 경기인 셈이니까.
기회는 찾아왔다. 후반전이었다. 날개 쪽에 슈팅 포인트가 생겼다. 허점을 캐치한 나는 포지션을 잡았다. 크로스오버로 페이크를 주자 단번에 수비망이 뚫렸다. 젭스텝으로 다가간 다음 드림쉐이크로 뛰어올랐다.
드림쉐이크는 상대를 속이기 딱 좋은 스킬이었고 그게 내 주특기였다. 마이클 조던의 경기 동영상을 수백 번 돌려보며 익힌 기술이기도 했다. 내 키는 180cm가 훌쩍 넘었지만 마이클 조던만큼 자라려면 아직도 멀었다. 언젠가 조던만큼 자라면 이 정도는 껌이겠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는 운을 기다려야 했다.
다행히도 오늘은 드물게 운 좋은 날 중의 하나였다.
내 몸이 탄력을 받아 공중으로 떠올랐다. 왼손에 들러붙은 공을 그대로 골대에 내리꽂았다. 착지를 위해 한 바퀴를 돌 때 나는 환희로 반짝반짝 빛나는 루나의 얼굴을 보았다. 내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완벽한 착지와 동시에 나는 우레와 같은 함성을 내지르는 군중을 향해, 아니 정확히는 그들 속에서 열렬히 박수를 보내고 있는 루나를 향해 하트를 날리며 뛰었다. 곧장 그에게 달려 올라가 그를 번쩍 안아 들고 백 바퀴쯤 돌고 싶었는데 중간에 부원들에게 잡혀버렸다.
젠장, 루나 대신 이 시커먼 놈들을 얼싸안고 부둥켜안고, 윽, 뭐냐, 언놈이 내 목에 뽀뽀했어! 씨발, 욕을 씨부리며 아무 놈의 대가리나 마구 두들겨대며 무식한 세리머니를 끝냈다. 그렇게 내 10대 시절의 한 장도 막을 내렸다.
*
“정은별!”
교차로에서 누군가 설레발을 치며 뛰어왔다.
“이선호.”
선호는 근처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나는 버스로 여덟 정거장 떨어진 예술체육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예전처럼 자주는 못 보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은 녀석이 루나커피로 찾아왔다. 혼자 올 때도 많지만 간간이 친구들을 달고 왔는데, 오늘은 새로운 녀석과 함께였다.
같은 학교 교복을 입었고 동그란 얼굴에 단발머리, 키가 큰 여학생이었다. 내 시선에 선호가 여학생을 소개했다.
“인사해. 임혜리. 우리 반 톱이야. 이쪽은 전 학군을 뒤흔들고 있는 고딩 스타 정은별.”
“스타는 무슨, 미친놈.”
“인사하라니까 쌍욕을 씨부리냐.”
나는 마지못해 임혜리를 향해 고개를 까딱해보였다.
“안녕.”
“야, 그게 다야? 얘 정은별 네 팬이래.”
앙탈을 부리는 선호를 임혜리가 막아섰다.
“만나서 영광이야, 정은별.”
우쭐한 것은 아니지만 턱이 절로 올라갔다.
“뭘 또 영광씩이나.”
“이선호가 너랑 친하다고 해서 내가 소개해달라고 막 졸랐어.”
쓸데없는 짓은. 나는 도끼눈으로 선호를 흘겨보며 말은 임혜리에게 건넸다.
“그 정도로 친하지는 않은데.”
“아, 존나 우월한 놈.”
“아무튼 여기까지 찾아와준 손님이니, 들어가자. 우리 루나커피 핫 메뉴로 내가 쏠게.”
“우와!”
좋아서 서로 팔을 두들기고 찔러대는 두 녀석을 달고 루나커피로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루나와 알바생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를 보자, 늘 그렇듯 그가 환한 달처럼 웃었…. 다가… 점점 찌그러져 초승달이 된 저 미소는, 뭐지…?
“은별아. 루나 사장님 소개해줄래?”
임혜리가 내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나는 좀 찡그리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새를 못 참고 푼수 같은 이선호가 설레발을 쳤다.
“월영이 형! 저 왔어요.”
내가 잘못 봤나? 루나는 좀 전의 찌그러진 표정을 거두고 이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선호 오랜만이네. 공부하느라 힘들지?”
“공부할 때 머리를 안 쓰니까 별로 힘은 안 들어요.”
나는 별로 재미있지도 않은 농담을 떠벌리고 다니는 이선호의 수작을 잘 알기에 비웃음을 금치 못했다.
“헛소리 그만하고, 형. 얘는 임혜리라고, 이선호….”
“안녕하세요, 임혜리입니다.”
“임혜리 얘가 정은별한테 홀딱 반해가지고 저를 달달 볶아서… 합!”
“조용히 해. 지금 루나 사장님이랑 얘기 중이잖아.”
임혜리가 이선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팍 치고는 루나를 향해 눈웃음을 살살 쳤다. 내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저 여기 종종 왔는데.”
“어, 정말? 그러고 보니 낯이 익는 것 같기도 하네.”
“정말요? 제가 좀 흔한 얼굴이라서 기억 못 하실 것 같은데.”
“아냐. 흔한 얼굴이라니, 기억나. 혹시 지난주에 친구들이랑 와서 오렌지 블라썸 같은 거 시키지 않았어?”
“왓! 대박! 그걸 기억하세요?”
“그럼.”
쳇, 루나는 플럼버인이거든. 뭐든 한 번 보면 다 기억저장소에 입력된다고. 딱 보고 알아보지 못하는 건 관심이 없어서 히스토리에 묻힌 거고.
“저,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으면 안 돼요?”
나는 재빨리 루나 앞을 막아섰다.
“우리 형은 지금도 인기가 너무 많아서 골치 아파. 안됐지만 음식 사진이나 찍어라.”
임혜리는 실망한 얼굴로 애교를 부렸다.
“아이, 똑땅하네. 아라쪄.”
이선호가 흥분했다.
“임혜리, 너 왜 이렇게 끼를 부리냐? 평소 캐릭터랑 너무 달라서 내가 좀 힘들거든.”
“싸장님. 저 은별이랑 친하게 지내도 되죠?”
“야, 정신 차려. 정은별 보기보다 눈 높아.”
나는 이선호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쫙 밀었다.
“야야, 저기 창가에 자리 났다. 가서 앉아있어. 임혜리, 넌 오렌지 블라썸이 취향이야?”
“아니. 오늘은 사장님이 추천해주시는 거 먹을래.”
두 녀석이 테이블로 향하자 나는 가방을 풀어 사무실에 던져놓았다.
“형. 그냥 내가 골라가지고 가져다줄게.”
“어, 그래.”
카운터로 들어가 알바생에게 인사를 건넨 후 손을 씻었다. 음료수를 만들고 디저트를 꺼내는데 카운터 아래 선반에 묘한 물건들이 있었다.
“이건 웬 꽃다발이지?”
바쁘게 움직이던 루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참. 아까 명성여고 학생들이 몰려와서 놓고 갔어. 네 팬이래.”
“또?”
인기가 있다는 건 기분 나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곤란했다.
“영업장에 몰려오면 안 되는 건데.”
“뭐 그렇게 방해되지는 않았어. 음료수 사 들고 나갔고, 매너도 좋은 아이들이었어.”
“그래도.”
“한 아이는 선물도 가져왔더라. 박스 안에 편지도 들었대. 올라갈 때 가져가.”
“네에-”
“혜리가 아주 예쁘구나.”
“뭐라고요?”
“키도 크고 날씬하네. 요즘 남자애들은 키 크고 날씬한 여자 좋아한다며.”
“무슨 말이야. 나는….”
“아, 어서 오세요. 주문하시겠어요?”
루나가 내 말을 뚝 자르며 막 들어온 손님을 향해 인사했다. 손님이 많아서 그러나? 어쩐지 루나가 삐진 것처럼 보였는데, 설마…. 질투?
“헤?”
루나가, 질투를?
그 생각은 무지 신박한 것이었다. 생각도 해본 적 없는 일이라서 나는 좀 색다른 의미로 충격을 받았다. 이건 일종의 신호가 아닌가. 그토록 기다리던 균열의 신호.
주문을 입력한 루나가 돌아서다가 멀뚱하니 서 있는 나를 보았다.
“왜?”
“응…? 뭐가?”
“친구들 기다리는데 거기서 뭐 하냐고.”
“응? 아, 그래.”
나는 쟁반을 들고 친구들이 앉은 자리로 향했다. 이선호와 임혜리는 게임 레벨을 두고 열렬히 떠들어댔다.
“배경지식이 있어야 재미있는 거야. 내 전공이 실마릴리온이거든.”
“너 우등생이 무슨 구닥다리 비디오게임을 해.”
나는 두 녀석 앞에 쟁반을 턱 내려놓았다. 임혜리가 즉각 화려한 리액션을 선보였다.
“우와! 딸기 오믈렛! 이거 먹고 싶었는데 가격이 좀 세서 망설이던 거였어.”
이선호가 이때다 하고 끼어들었다.
“얘네 아빠가 로펌 대표인데 종소세가 십억 나와서 살림살이가 팍팍하단다.”
“처먹기나 해라, 응? 우왕, 맛있어. 정은별 넌 좋겠다.”
“뭐가?”
“저렇게 잘생긴 형을 둬서.”
“응, 쫌 좋아.”
“나 여기서 알바할 수 없을까?”
나는 커피를 쪽 빨며 임혜리를 쳐다보았다. 딸기 크림을 입에 잔뜩 묻히고 먹는 게 딱 봐도 사랑스러운 척하려는 심산인가 본데, 그 의도가 궁금했다. 이럴 때는 솔직한 게 미덕이다.
“임혜리. 우리 형한테 관심 있냐?”
“당연히 있지.”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이성으로서 관심 있냐고.”
한입에 딸기 오믈렛을 먹어 치운 이선호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내가 심리학을 좀 아는데.”
“뻥 치시네.”
“뻥 치시네.”
“내가 보기에 임혜리가 진짜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정은별 네가 아니라 월영이 형이었어.”
내 미간이 바짝 쪼그라들었다. 그걸 오해한 임혜리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네 팬이기도 해. 너 농구 하는 거 보고 홀딱 반했거든. 그런데 루나 사장님 동생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어.”
나는 몹시 못마땅해서 커피만 쪽쪽 빨았다. 그러다 문득 카운터의 루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그가 전에 없이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뭔가 알쏭달쏭했다. 처음에는 질투인 줄 알았는데, 임혜리에게 예쁘고 날씬하다고 한 말이 그 생각을 방해했다.
어색한 기류는 저녁 식사 때까지 이어졌다.
우리는 주방에 나란히 서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저녁 식사 준비를 거드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대항전 훈련 때는 학교에서 저녁까지 먹고 들어왔고, 훈련이 끝난 후에는 중간고사가 있었다.
나는 콩나물을 다듬었고 루나는 생선을 구웠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특히 식사 준비할 때면 루나는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편인데 오늘은 통 말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루나의 수다가 조금 줄었던 것 같다. 그게 언제부터였지?
“형.”
“응…?”
“나한테 뭐 화난 거 있어?”
“내가? 왜?”
“그냥, 요즘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거 같아서.”
“그럴 리가 있니.”
대화는 다시 끊기고 지글거리는 소리와 수돗물 소리만 주방을 울렸다. 나는 끓고 있는 냄비에 다 씻은 콩나물을 집어넣고 뚜껑을 탁 소리 나도록 덮고는 싱크대에 기대어 섰다.
루나는 곁눈으로 나를 힐긋 보고는 생선을 뒤집었다. 그런데 아직 덜 익은 탓에 살이 으스러졌다. 마법을 쓰면 간단할 텐데 왜 저러나 싶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건 곧 잊어버렸다.
나는 루나의 새침한 옆모습을 흘긋 보고는 생뚱맞거나 말거나 질문을 툭 던졌다.
“혜리가, 그렇게 예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