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75화 (75/103)

<75화>

무슨 꿍꿍이인지 이모는 한 대 맞은 사람처럼 눈동자만 살살 굴려대더니 급기야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잘못했다, 은별아!”

다들 깜짝 놀랐을 것이다. 이모가 내게 무릎을 꿇어서가 아니라, 그 순간 준이가 엄청난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던 탓이다. 나는 그다음 수순을 아주 잘 알았다. 준이는 평소에 얻어맞지는 않지만 이모는 이런 식으로 울어 젖히는 꼴은 못 본다. 무의식적으로 손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모는 오히려 마룻바닥에 이마를 대고 더욱 납작 엎드렸다.

“한 번만 용서해줘.”

준이는 여전히 숨넘어가게 울어댔다. 나는 준이를 꼭 끌어안고 달랬다.

“준이 데려가게 해다오.”

이모는 엎드린 채 애원했다.

“내가 재범의 위험이 크고, 애비는 앞으로 최소 10년 동안 감옥에서 썩을 거고, 나한텐 가진 돈도 없어서 준이를 시설로 보낸다고 하더라. 이렇게 훌륭한 분이 데려간다고 하면 양육권이 어떻게 될지 나도 몰라. 그런데 난 준이 없으면 안 돼.”

급기야 이모는 울음을 터뜨렸다. 묘하게도 그녀가 울자 준이가 울음을 그쳤다. 나는 궁금한 마음에 로저를 돌아보았다. 그가 리딩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을 테니까. 그가 내 시선의 의미를 알아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모를 향해 말했다.

“알겠습니다.”

로저의 목소리에 이모가 몸을 일으켰다. 눈물 콧물로 범벅된 얼굴은 추하다 못해 안쓰러웠다.

로저가 말했다.

“준이를 위해 장학금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 정말이세요?”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로저와 루나에게 창피한 마음이 들었다.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자존심이라고는 없는, 아니 수치심이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이모였다.

“대신 당신이 아니라 준이에게 직접 주겠습니다. 온전히 아이 학비나 양육비로 쓰일 수 있게 변호사가 확인하도록 조처하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꼭 아이를 위해서만 쓸게요.”

준이는 내 목에 얼굴을 묻은 채 꼼짝하지 않았다. 아마도 눈물을 참고 있을 것이다. 루나가 침울한 얼굴을 하고서 준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오늘 당장 데려갈 거예요?”

이모가 멍한 눈으로 루나를 보았다. 그 눈빛에는 확실히 예전과 같은 가시는 보이지 않았으나 그게 빠져나가니 이제 멍청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 그럼 언제 데려갈까요…?”

루나가 로저를 돌아보자 그가 대답했다.

“우리도 작별 인사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주말까지만 데리고 있으면 안 될까요?”

이모는 두말없이 수긍했다.

“그, 그러세요. 저도 지금 지낼 곳이 변변치 않아서 월세방이라도 알아봐야 해요.”

“제가 적당한 집을 얻어드리죠.”

나는 좀 걱정이 되어 로저를 보았다. 이모나 이모부는 잘해주면 더 발라먹으려고 대드는 인간들이니까. 그런 내 맘을 읽은 로저가 고개를 살짝 끄덕여보였다. 걱정 말라는 뜻이었다.

“그럼 식사하시죠.”

로저의 말에 루나가 테이블의 벨을 눌렀다. 인터넷으로 미리 주문해놓은 덕분에 음식은 금방 나왔다. 이모는 며칠 굶었는지 와구와구 음식을 먹었다.

월요일 오후에 로저의 집에서 만나기로 하고 우리는 식당 앞에서 헤어졌다. 준이는 마지막까지 이모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이모는 로저와 루나에게 굽실굽실 인사를 하고는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갔다.

루나커피에 도착한 우리는 잠시 뒷마당 정자에 앉았다. 함께 가지 못한 필립이 로저의 무릎 위에 냉큼 올라와 앉았다.

“이모가 하는 말 진심인가요?”

내 질문에 로저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래. 준이밖에 없다는 말은 진심이더구나. 아마 교도소에서 어지간히 외로웠던 모양이야.”

“오늘 이모는 그랬을지 몰라도 이모부가 석방되면 얼토당토않은 욕심을 부릴 거예요. 준이 도와주시는 건 고맙지만 신중하셔야 해요. 그게 준이를 위하는 게 아닐 수도 있잖아요.”

준이는 내내 내게 안긴 채 말이 없었다. 칭얼거리지도 않고 울지도 않았다. 로저가 그런 아이의 뒤통수를 응시하며 말했다.

“걱정 마라. 그 정도는 해결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사실 그때까지 우리가 여기에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는 일 아니냐.”

그 와중에도 나는 어김없이 불안감을 느꼈다.

“야옹, 로저가 준이를 아들처럼 아꼈는데 애석하군.”

“필립. 쓸데없는 소리 말게.”

“저도 도울 일 있으면 말해주세요.”

“고맙네, 루나. 하지만 자네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아저씨.”

로저에게 한 번은 제대로 말하고 싶었다. 당연히 그래야 했다.

“고맙습니다.”

내 말에 로저가 씁쓸하게 웃었다.

“너한테 고맙다는 말을 다 듣고,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그렇게 말하며 로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봐야겠네.”

루나가 서둘러 말했다.

“그렇지, 내일 루나커피 쉬는 날이잖아요. 준이 데리고 다 함께 소풍 가면 어때요?”

“소풍?”

“네. 그냥 가까운 공원 가서 도시락이나 까 먹자구요. 준비는 우리가 다 할 테니 로저는 준이만 데려오시면 돼요.”

“그거 좋군. 고맙네.”

로저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자, 준이 이리 다오.”

어쩐지 준이가 내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면 로저에게 가기가 싫은 거든지. 로저를 올려다보는 눈에 원망 혹은 실망의 빛이 어려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두려움인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사람과 영원히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아직 어린 나이라서 그 감정이 사뭇 막연하겠지만 막연해서 더 무서울 것이다. 준이의 그 마음이 정확히 현재의 나와 같아서 기분이 두 배로 엉망이 되는 것 같았다.

떼를 쓰거나 울어 젖힐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준이는 입술을 꼭 다문 채 선선히 로저에게 안겼다.

*

다음날 우리는 미니밴을 타고 교외로 달렸다.

필립과 얼룩이들도 케이지에 태우고, 가는 길에 동물병원에서 라라와 미오도 데려왔다. 로저와 준이는 일찌감치 루나커피로 와서 함께 출발했다. 준이는 어제와 달리 밝은 표정이었다. 루나가 준이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귀여운 모자를 써서 그런가? 우리 준이가 기분이 좋아 보이네.”

“네. 좋아요.”

동네 공원에 가려던 어제의 계획은 수정되었다. 준이와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시간이니 제대로 된 곳으로 가자는 게 루나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놀이공원이 추억의 장소로 낙찰되었다.

우리는 온갖 놀이기구를 섭렵하며 신나게 놀았다. 고양이들 때문에 제재를 많이 받았지만, 순간이동의 기술을 적절히 사용해 케이지 안을 잠깐 비우는 식으로 통과하고는 했다.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지만, 모처럼 나는 준이와 비슷한 수준이 되어 즐겁게 놀았다. 준이도 나도 놀이공원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보다 더 좋아라 하는 사람이 있었다. 루나였다.

“너무 짜릿해! 준아, 은별아, 로저! 한 번씩 더 타요. 로저는 싫다고요? 준이도 싫어? 그럼 우리 둘이 타자!”

“네? 나요?”

나는 한 번으로 충분했는데 루나가 나를 끌고 두 번이나 회오리차에 올랐다. 어지러운 것보다 루나의 비명에 귀가 따가워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겨우 놀이기구 순례를 마치고 나니 배가 고파졌다. 우리는 호숫가 잔디밭에 커다란 돗자리를 깔았다. 짐과 고양이들을 풀어준 후 도시락을 먹었다. 루나가 준비한 도시락은 김밥과 샐러드, 과일, 초콜릿 퍼프였다. 김밥은 나와 준이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는 말을 듣고 루나가 제안한 메뉴였다. 덕분에 새벽부터 우리는 열심히 김밥을 말았고, 장장 두 시간이나 걸렸지만 무척 재미있었다.

준이는 아무런 걱정도 없는 아이처럼 시종일관 해맑게 웃었다. 로저는 잘 웃지 않았는데, 평소에도 잘 웃지 않는 사람이라 별 차이 없을 법도 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슬퍼보였다.

디저트까지 알뜰하게 먹어 치운 후 루나와 나는 자전거를 타러 가기로 했다. 로저와 준이에게 둘만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 겸사겸사 자리를 피해준 것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자전거를 타다 왔는데도 로저와 준이는 호숫가에서 떠나지 않은 채 오리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우리는 두 사람에게 시간을 더 주고 싶었다. 그래서 고양이들과 잔디밭을 헤집으며 한동안 정신없이 놀고 있는데, 루나가 내 목덜미를 턱 잡고는 버드나무 뒤로 숨었다.

“왜?”

“저기.”

어느새 우리를 따라온 필립과 고양이들이 나무둥치를 오르내리며 야옹거렸다.

“야옹,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이산가족이 저기 있네.”

“쉿!”

로저와 준이는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준이는 늘 그렇듯 로저의 목에 매달려 얼굴을 폭 파묻고 있었지만 아이가 울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준이는 그렇다 치고….

“설마, 로저도 우는 거야?”

루나가 놀라 물었다.

“그런 것 같아.”

“야옹, 실망이네.”

“뭐가요, 아빠?”

“로저는 딱 봐도 저런 짓 안 하게 생겼잖아. 난 캐붕 안 좋아해.”

“뭔 소리야.”

그때 준이의 목소리가 우리 귀에도 들렸다. 눈물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아이는 웅얼거렸다.

“아저씨, 고맙습니다…. 준이는 잊지 않을 거예요. 준이는 열심히 살 거예요. 아저씨처럼 훌렁한 남자 될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 아저씨한테 올 거예요.”

루나가 내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오 마이 갓…. 저 불쌍한 아이를 어쩜 좋으니…. 흑.”

“야옹, 그런데 훌렁이 뭐냐?”

필립의 질문에 나와 루나가 동시에 대답했다.

“훌륭이요.”

루나는 내 정수리에 입을 맞추며 눈물을 흘렸다. 나는 울지 않기로 했다. 사나이가 이 정도로 울면 안 되는 거였다. 준이 저 녀석은 잘 자랄 거다. 로저처럼 멋진 롤 모델이 생겼으니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녀석은 행운아인 셈이다.

나는 그런 생각으로 위안을 삼으며 내 목을 껴안고 있는 루나의 팔을 쓰다듬었다. 우리는 함께 있으니까, 우리는 그동안 함께였으니까, 비록 당장에라도 루나가 플럼버로 떠날 가능성은 남아있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헤어지지 않을 테니까.

준이는 다음 날 이모가 와서 데려갔다.

로저는 대리인을 시켜 금성시 시내에 방 두 개짜리 연립을 얻어주었다. 약속대로 준이는 매달 식비와 장학금 명목의 용돈을 받게 되었다. 이모는 매달 그 돈을 사용한 영수증과 계좌의 내역을 변호사에게 제출하기로 했다. 준이를 위해 사용했는지 점검하기 위한 절차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마지막이었다. 준이는 로저를 만나지 못했다. 아주 오랫동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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