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2년 전이나 지금이나 준이는 달라진 게 별로 없어 보였어요. 키도 별로 자라지 않았고 말도 잘하지 못했어요. 아이의 큼지막한 눈동자는 여전히 겁먹은 토끼 같았어요. 그렇잖아도 로저는 휴대폰에 준이 번호를 ‘6월 토끼’라고 설정했어요. 6월생에 토끼띠이기도 하고, 생긴 것도 토끼 같고요. 가끔 로저는 토끼야, 토끼야, 부르기도 했는데 언제 봐도 참 잘 어울리는 별명이에요. 그런 애칭으로 아이를 부르면서 로저의 마음에 변화가 없었다면 이상하겠죠.
“로저는요? 준이, 보내고 싶으세요?”
제 질문에 로저는 한동안 입을 꾹 다문 채 저를 응시하더니 준이에게로 시선을 돌렸어요. 그 시선에는 번민이라는 감정이 또렷한 궤적을 남겼어요. 그런데 로저의 그 끈끈한 눈빛보다 제 눈길을 잡은 것은 준이였어요.
어째서 준이는 저를 낳아준 부모보다도 로저와 살고 싶은 걸까요? 부모도 부모 나름이니 아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준이는 로저를 만나자마자 좋아했던 것 같아서 볼 때마다 신기해요.
은별이 말로는 자기 엄마 목소리만 들어도 빽빽 울어대던 아이라고 하니 평온한 성격의 로저가 좋은지도 몰라요.
하지만 엘리아 말대로 아이 부모가 있는데 로저가 계속 데리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일 거예요. 게다가 로저는 철저할 정도로 개인적인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거든요. 오죽하면 지구에서 사용할 이름을 시계 브랜드의 이름으로 지었겠어요? 전혀 상관없는 얘기지만, 우리 중 누구도 그의 본명을 모른답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오래 아이를 데리고 있었던 것만으로도 놀랄 노 자죠.
역시나 로저의 입에서는 짐작한 말이 흘러나오네요.
“엘리아 말대로 아이 엄마가 데려간다는데 내가 말릴 방법은 없네.”
“야옹….”
실망한 필립이 곧추세웠던 꼬리를 툭 떨어뜨렸어요. 준이의 커다란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어요. 그럼에도 딴에는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푹 숙이네요. 그 모습을 보니 제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어요.
저는 은별이를 쳐다봤어요. 은별이의 얼굴에는 감정이 보이지 않았어요. 냉랭하다고 할까, 조금 화가 난 것 같아 보였어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요?
“저 준이랑 잠깐 얘기 좀 할게요.”
은별이가 준이를 안아 들고 일어났어요. 둘이 주방을 나설 때까지 우리는 그저 쳐다보고 있었어요. 제 입에서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어요.
“어떻게 된 사람들이길래…. 아이가 부모한테 가는 걸 저렇게 두려워하는 거죠?”
“야옹, 로저. 정말 그렇게 간단하게 돌려보낼 건가?”
필립의 말에 엘리아가 얼른 덧붙였어요.
“당연히 돌려보내야 한다니까요, 필립.”
“로저, 그새 정드신 거죠?”
잠자코 있던 아치볼트가 알은체하며 끼어들었어요.
“한국에는 사랑보다 더 무서운 게 정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두 분, 한국에 사시는 것도 아닌데 잘도 아시네요.”
“루나도 알지? 그 조그만 초코케이크, 그거 봉지에도 한자로 써 있잖아. 정.”
“그 과자를 아치볼트가 좋아해요. 입맛이 저렴하거든요.”
“엘리아. 저렴한 게 아니라 소박한 거야.”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엘리아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아치볼트는 회원 중 유일하게 루나커피의 빵과 디저트를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그게 바로 흔히 말하는 ‘저렴한 입맛’이라는 증거였어요. 뭐, 개인적 취향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아침에 일어나면 토스트 한쪽에, 태우거나 덜 익은 계란 프라이.”
저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아치볼트가 그렇지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죠.
응? 그런데 그건 아치볼트가 아니라 로저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어요. 로저가 넋두리처럼 말을 늘어놓았어요. 지금 그게 문제는 아니지만, 계란 프라이도 태울 수 있군요. 덜 익는 건 그렇다 쳐도 뭘 어떻게 하면 계란 하나 부치는데 그걸 태우죠? 아무튼.
“고작 그거 먹여주고 나는 책상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해. 점심때가 될 때까지 거의 움직이지 않지. 그 시간 동안 아이는 소파에서 동화책을 읽거나 졸고 있다네. 질리지도 않는지 가끔 나를 쳐다보고 방긋거리지. 나한테 방해될까 봐 쉬하러 갈 때도 살금살금 다녀. 그러다 점심도 먹고 산책도 할 겸 아이를 데리고 동네 한 바퀴 돌고, 단골 식당에서 식사하고, 돌아와 또 글을 쓰고, 저녁을 시켜 먹고, 각자 씻고 자는 거야. 가끔 루나가 저녁 식사에 초대해주면 나만큼이나 준이도 행복해하지.”
“그렇게까지 따분하게 사세요?”
아치볼트가 눈치도 없이 묻자 엘리아가 쏘아붙였어요.
“조용히 해, 아치볼트.”
“내가 뭘?”
“로저는 지금 작가잖아요. 따분하게 사는 게 당연하지.”
“무슨 소리야, 엘리아. 작가라고 왜 다 따분하게….”
저는 참다못해 조금 언성을 높였어요.
“엘리아, 아치볼트! 죄송하지만 부부 싸움하시려면 집에 가서 하세요.”
“우리 아직은 부부 아니야.”
“야옹, 다들 시끄러워. 로저, 그래서? 계속해봐.”
로저는 침울한 얼굴로 말을 이었어요.
“그렇게 따분하게 사는데도….”
“거봐. 로저도 알고 계시잖아.”
“야옹!”
필립이 험악하게 털을 세우자 아치볼트가 입을 다물었어요. 로저는 꿋꿋하게 침울한 얼굴로 말을 이었어요.
“그런데도 아이가 좋아해.”
“뭘요?”
“나랑 사는 거.”
“굉장히 신기한 아이네요오오옷! 아파, 엘리아. 왜 꼬집고 그래?”
로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침울한 얼굴로 말을 이었어요.
“괜찮아, 엘리아. 아치볼트를 꼬집지 말게. 내가 생각해도 나는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니까. 플럼버에서도 나는 참으로 따분하기 짝이 없는 공무원이었어. 그때도 사귀던 사람이 하품을 하면서 헤어지자고 했으니까.”
지금 뭐라고 한 거죠? 사귀는 사람?
제 머리에서 안테나가 돋아났어요. 물론 진짜 돋아났다는 건 아니지만요.
“사귀던 사람이 있었어요? 어떤 분이었는데요?”
“야옹, 루나. 닥쳐.”
저도 모르게 아치볼트마냥 푼수를 떨었네요. 로저의 연애담이 은근 궁금해서, 실수였어요.
“그런 나를, 저 아이는 참 잘도 따라주더군. 내 눈치만 슬슬 보던 아이가 얼마 전부터는 곧잘 말도 하는 거야.”
“준이가요? 뭐라고 하는데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생긴 아저씨라고 하더군.”
“에이, 설마.”
“왜 설마라는 건가, 루나?”
“아니, 로저가 잘생기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준이가 설마 그런 말을 했겠냐는 뜻….”
“야옹, 준이가 나 인간일 때 모습을 봤어야 하는데.”
“아빠. 닥치세요.”
“야옹, 비겼다.”
어쨌든 결론은, 준이를 제 친엄마에게 보내기로 했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하지만 그 여자의 전적이 있기 때문에 인성이 어느 정도인지 한번 확인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모두 동의했어요.
리딩 한두 번 슬쩍 하는 것으로 그 사람의 사상까지 단번에 파악할 수는 없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별이를 통해 그녀와 점심 식사를 함께하기로 하고 약속을 잡았어요. 그 파렴치한 여자를 우리 보금자리에 들이고 싶지는 않았기에 식당을 예약했지요.
로저와 저, 은별이는 준이를 데리고 약속장소인 한식당으로 갔어요. 방에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시간보다 15분쯤 늦게 권미옥이라는 여자가 도착했어요. 한번 보기는 했지만 제대로 얼굴을 대하는 건 처음이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보자마자 한 대 치고 싶었어요. 그녀는 준이도 준이지만 은별이를 보고 무척 놀라는 것 같았어요.
“네가 은별이니? 어쩜, 그새 청년이 다 됐네!”
반갑다는 듯한 인사에도 은별이는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보기만 했어요.
이 자리에서는 제가 대표나 마찬가지라서 먼저 입을 열었어요.
“은별이를 납치한 사람의 부인 되시는 분과 이렇게 마주 앉아 식사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만, 아무튼 기이한 인연도 인연이니 잘 오셨어요.”
권미옥이 교활한 눈을 이리저리 굴렸어요. 준이는 그녀를 똑바로 보지도 않았고 은별이에게서 떨어지려 하지도 않았어요. 두려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수상쩍은 반응인 것은 사실이네요. 권미옥은 사과나 변명은 할 마음도 없는 것인지 우리를 둘러보고는 준이에게 두 팔을 벌렸어요.
“준아. 엄마야. 2년 만에 만나는 건데 엄마 보고 싶지 않았어? 엄마한테 와야지?”
그러자 준이가 은별이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어요. 그 순간 권미옥의 표정이 험악해졌어요. 아마 로저는 리딩을 하고 있을 거예요. 슬쩍 눈치를 보니 과연 그가 권미옥의 눈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게 보이네요.
은별이가 싸늘하게 말했어요.
“준이가 이모랑 같이 살기 싫은가 봐요.”
“정은별. 그게 무슨 말이야? 준이는 내 자식이야.”
“그러니까요. 이모 자식인 준이가 왜 이모랑 살기 싫어할까요?”
“그래서, 여기 이 멀끔한 양반이 우리 준이를 입양이라도 한대?”
은별이와 저는 로저를 쳐다봤어요. 로저가 입을 열었어요.
“준이가 원한다면요.”
오, 우리는 조금 놀랐답니다. 로저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요. 말했듯이 로저는 사생활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거든요.
생각해보니 아이 부모와 타협을 해서 정식으로 입양을 한다면 엘리아가 말한 말썽은 없을 것 같았어요.
은별이와 저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나누었어요. 권미옥도 놀랐는지 로저를 빤히 쳐다봤어요. 은별이 목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준이도 로저를 쳐다봤어요. 로저가 그런 준이를 보며 말했어요.
“혹시 금전적인 대가를 원하신다면 말씀해보시죠.”
그 말에 권미옥의 조그만 눈동자가 흔들렸어요. 한동안 우리 네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기만 하던 그녀가 기묘한 행동을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