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70화 (70/103)

<70화>

“오… 저 녀석….”

은별이가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궁금하기는 하지만 굳이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저절로 좌표가 둥실 뜨네요.

“야옹! 은별이 쟤 지금 농구 하는 거냐?”

“아, 아뇨. 로저네 집에 갔는데 준이가 문을 안 열어주는지 저렇게….”

문을 두들기던 은별이가 갑자기 로저네 집 담장에서 멀찍이 물러났어요. 일방적으로 좌표를 띄우면 소리는 들리지 않기 때문에 저는 뭘 하려는 건가 하고 지켜봤어요. 그런데 치타인가 싶을 만큼 빠르게 달리더니 그대로 벽을 밟고 뛰어오르지 뭐예요! 그리고는 장대높이뛰기 선수처럼 몸을 눕힌 자세로 담을 넘었어요. 덩크슛 날릴 때처럼 날개가 달린 아이 같았답니다. 정말이지 심장 멈추는 줄!

“장대높이뛰기 선수도 아니고 어떻게 저런 걸 하죠?”

“야옹! 녀석이 점점 날 닮아가네.”

“아앗!”

제가 소리를 지른 건, 은별이가 담을 넘기는 했는데 엉덩방아를 찧어서였어요. 다행히 화단에는 가시 없는 꽃나무가 많아서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조심 좀 하지, 애가 너무 팔딱거려서 걱정이에요. 저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야옹, 그런데 왜 저렇게 급해?”

은별이가 초조하게 현관 도어록을 푸는 걸 보며 저는 앞치마를 벗었어요. 전화를 걸자니 제 도움이 필요할 것 같다는 강력한 예감이 들었거든요.

“아무래도 제가 가봐야겠어요.”

그때 제 앞치마에서 벨이 울렸어요. 휴대폰을 꺼내보니 은별이네요.

“그래, 은별아.”

- 여기 엘리아가 와 있어.

“누가 왔다고?”

- 엘리아 폭스.

이게 무슨 소리죠? 엘리아가 로저 집에 있다니.

“야옹, 애스터코드가 약간은 성공한 건가?”

- 근데 엘리아 상태가 좀 이상해. 어쩌지?

“지금 갈게.”

- 가게 바쁜 시간이잖아. 로저가 오시면 좋겠는데.

“다행히 세윤이가 와 있잖아. 30분만 부탁하고 갈게.”

세윤이는 아직 가게에 있었어요. 염치없지만 잠깐 부탁했더니 세윤이는 흔쾌히 받아줬어요. 모처럼 재미있겠다며 앞치마까지 두르고 즉시 카운터로 가네요. 어쩐지 차가 필요할 것 같아서 순간이동 대신 미니밴을 타고 로저네 집으로 향했어요.

로저의 집에 도착해 거실로 들어서니 준이는 책상 뒤에 숨어 머리만 빼꼼 내놓고 있었어요. 은별이는 엘리아 앞에 서 있었고요.

그런데 분명 엘리아는 엘리아인데 상태가 영 이상했어요. 소파도 있고 스툴도 있고 하다못해 테이블도 있는데 엘리아는 벽에 딱 들러붙어 서 있었거든요. 얼핏 카멜레온 생각이 났기에 저도 모르게 인사 대신 질문이 튀어나왔어요.

“엘리아. 지금 벽인 척하는 거예요?”

엘리아는 대답 대신 눈동자를 굴리기만 했어요. 그 얼굴은 유령처럼 창백했죠.

은별이가 설명했어요.

“말을 걸어도 안 들리는 것 같아. 꼭 여기에 없는 사람 같지 않아?”

“그러게. 뭔가에 엄청 놀란 것 같은데. 무슨 일을 겪었던 거지?”

저는 엘리아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어요.

“엘리아. 몸은 괜찮아요? 대체 어디에 있다가 온 거예요?”

엘리아의 눈동자는 여전히 허공을 헤맸지만, 뭐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어요.

“우린 다 죽을 거야…. 결국 다 죽을 거야….”

“엘리아. 저 누군지 알아보시겠어요? 루나예요. 루나 블랑슈.”

“루나….”

“네. 루나요. 기억나요?”

그제야 엘리아의 동공에 빛이 들어오는 것 같았어요. 마침내 눈에 초점이 잡히더니 그녀가 나를 쳐다봤어요. 깜짝 놀란 듯 그녀가 벽에 붙여놨던 몸을 제게로 돌렸어요.

“설마, 진짜 루나야?”

“그래요. 여긴 로저네 집이에요.”

“오, 세상에!”

엘리아가 저를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렸어요.

“루나! 다시는 못 볼 줄 알았어!”

“일단 루나커피로 가요. 장사하다 말고 와서 얼른 가야 해요. 로저가 돌아올 때까지 우리 집에서 쉬고 계시는 게 좋겠어요.”

우리는 엘리아와 준이를 데리고 루나커피로 돌아왔어요. 은별이가 엘리아와 준이를 맡았고 저는 가게로 들어갔어요. 세윤이가 잘 봐주는 바람에 별 차질 없이 저녁 장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어요.

앞치마를 벗은 세윤이가 이노마 대표의 명함을 건네며 말했어요.

“대표님이 은별이가 마음에 들었나 봐요. 꼭 얘기 나누고 싶다고 한가할 때 전화 달래요.”

“우리 은별이를? 왜?”

“그야 스카우트 제의하려는 거겠죠. 우리 대표님 하는 일이 그거예요. 캐스팅요. 길거리든 여행지든, 늘 안테나를 켜고 다니시는 분이거든요.”

“하지만 우리 은별이는 농구선수가 되겠다고 했어. 저기 동영상 봤지? 우리 은별이가 어제 근사한 덩크슛을 날리는 바람에 체육관이 떠나갈 정도로 박수가 쏟아졌거든.”

세윤이는 제가 가리키는 곳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못 봤는데?”

“어? 노트북 어디 갔지? 내가 저기에 놔뒀는데.”

아무튼 더 이상 느긋하게 얘기를 나눌 처지는 아니라서 저는 세윤이가 눈치채지 못하게 말머리를 돌렸어요. 세윤이가 급료는 한사코 거절했기에 케이크를 선물했어요.

“우와! 이 귀한 딸기 생크림을! 잘 먹을게요.”

“또 놀러 와. 그땐 안 부려먹을게.”

“저 사장님이 부려먹는 거 너무 좋아요.”

세윤이가 가게를 나간 후,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기는 했지만 나머지 손님들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어요. 대충 정리하고 올라가보니 거실에 모두 모여 있었어요.

“아! 다들 오셨네요.”

워튼 씨와 에릭도 와 있었어요. 누구보다도 아치볼트, 그는 소파에 앉지도 않고 벽난로에 기대선 채였어요. 무척 매서운 눈으로 엘리아를 노려보고 있었죠. 엘리아는 그와 눈도 맞추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어요.

은별이는 준이와 주방에서 먹을 걸 만들고 있네요. 피곤할 텐데.

아무튼 오늘 저녁은 난데없이 플럼버 모임이 되어버렸네요. 제가 나타나자 에릭이 손을 흔들었어요.

“어이, 오랜만이야, 루나.”

“얼굴 좋아지셨네요, 에릭.”

“그런가. 내가 보기에는 워튼 씨가 더 좋아진 것 같은데.”

과연, 워튼 씨도 신수가 훤해지셨어요. 반면 아치볼트는 무척이나 초췌해보였어요. 마지막 봤을 때보다 수염을 더 기르고 있어서 길에서 만나면 알아보지 못할 것 같았어요. 요즘 술에 절어 살거든요. 여자도 되는대로 만나고 다녀서 로저와 걱정을 많이 했답니다.

은별이가 샌드위치와 차를 날라 왔어요. 준이도 조그만 손으로 과일을 깎아 가지고 나오네요. 저는 준이를 반짝 안아 로저에게 건넸어요. 로저는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저를 쓱 보고는 준이를 받아 안았어요.

“나는 이 여자를 다시 받아줄 마음이 없습니다!”

“야옹-”

“으앙-”

아치볼트의 말이었어요. 지나치게 큰 목소리라서 깜짝 놀란 고양이들과 준이가 새된 비명을 질렀어요.

저는 조용히 소파에 앉았어요. 은별이가 제 옆에 앉아 제 손을 잡았어요. 이건 이 아이의 습관이에요. 나란히 앉으면 손을 잡는 것 말이에요. 언제 이런 습관이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마 제가 드라마를 보면서 은별이를 물고 빨고 하던 때부터인가 봐요. 그때 은별이는 정말 앙증맞고 귀여웠거든요. 강아지 인형처럼 말이죠.

아무튼 그때부터 우리는 함께 앉으면 당연하게 손을 잡는답니다. 솔직히 그것처럼 제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행위도 없는 것 같아요. 저도 모르게 은별이와 눈을 맞추고 미소를 지었어요. 은별이는 늘 그렇듯 예쁜 미소를 보여줬어요.

그런데 갑자기 옆쪽이 쎄한 느낌이 들었어요. 은별이도 그랬는지 저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렸어요. 순간 딸꾹질이 나왔어요. 너무나 매서운 눈으로 엘리아가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거든요. 왜죠?

은별이도 그녀의 시선이 이상하게 보였는지 나를 슬쩍 보며 눈빛으로 물었어요. 왜 저래?

당연히 저도 모르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어요.

아치볼트가 우렁찬 목소리로 떠들어댔어요. 이번에는 고양이들과 준이도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나 봐요. 다들 조용히 앉아서 아치볼트를 쳐다보기만 하네요.

“모두 이 여자가 어떤 여잔지 아시죠? 이 여자는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돼요.”

아치볼트의 말에 에릭이 난감하다는 듯 말했어요.

“하지만 아치볼트. 우리는 이 지구별에 있는 이상 서로 안 볼 수가 없지 않나? 우린 동지야. 싫다고 영영 내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야.”

“그건 에릭 말이 절대적으로 옳아. 우린 개인적인 관계를 떠나 하나의 공동체일세. 조그만 구명선에 함께 탄 보트 피플이란 말이야.”

워튼 씨도 단호하게 말했어요. 로저 역시 한마디 했어요.

“이 행성에 있는 한 우리에게는 서로를 미워할 권리가 없어.”

“오….”

저는 좀 감동 받았어요. 그 말이 무척 낭만적으로 들렸거든요. 작가라서 그런지 가끔 그 티를 내는 것 같아요. 은별이도 감동 받았는지 제 손을 꼭 잡네요.

하지만 역시 이 자리에서 가장 궁금한 건 엘리아의 생각 아니겠어요? 정말이지 저는 엘리아가 무슨 말을 할지 너무나 궁금했답니다. 그래서 물었죠.

“엘리아. 왜 아치볼트를 뿌리쳤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오해가 있다면 풀어야죠. 그동안 아치볼트가 무척 괴로워했거든요.”

“루나 말이 맞아. 우선 두 사람 감정 문제를 해결한 다음 좌표가 꼬인 문제 얘기로 넘어가는 게 좋겠어. 둘이 화해하지 않으면 편하게 의논하기가 힘들지 않겠나?”

워튼 씨의 말에 엘리아는 눈을 내리깔았어요. 앞머리가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표정이 어떤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당연히 저를 비롯한 회원들은 그녀가 아치볼트를 볼 낯이 없어서 그런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녀가 한 말은 우리들의 생각이 번지수가 완전히 틀렸음을 일깨워줬어요.

“당신은 정말이지 지겨운 남자야, 아치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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