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한 이틀 돌보지 않았더니 비품실이 엉망이 되었어요.
“아이참, 왜 설탕 봉지가 여기에 있는 거야?”
선반마다 엄연히 이름표가 붙어 있는데 알바생들이 영 신경을 쓰지 않네요. 너저분한 선반 꼴을 보니 심란했어요.
필립이 하는 말 다 알아듣는다고.
“하!”
밤새 잠이 오지 않았어요. 새벽녘까지 뒤척이다 생각해보니 저도 모르게 은별이가 한 말을 내내 되새기고 있었어요.
필립이 하는 말을 다 알아듣는다니, 그것도 거의 처음부터라니.
나 형의 배필이잖아.
“젠장!”
사랑해.
“에잇! 통조림은 아래쪽에 라벨이 있는데 왜 꼭대기에 놓아둔 거야.”
루나 블랑슈는 정은별 거다!
당연히 제가 코흘리개의 재롱을 귀담아들을 이유는 없었어요. 은별이는 나름 자신이 다 컸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천만에요. 아시다시피 키가 컸다고 어른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은별이는 여전히 어린애예요.
“젠장! 능력을 쓰면 되잖아.”
저는 뒤늦게 깨달았어요. 지구에 적응이 너무 잘 된 예일까요? 여기는 아무도 없는 비품실이니 플럼버인의 능력을 쓰면 되는 거였어요. 이런 걸 잊어버리다니 아무래도 건망증인가 봐요. 플럼버인은 건망증이라는 걸 모르니 이것 역시 지구에 너무 적응한 예일 거예요. 그것도 나쁜 예.
“아직 애야, 애. 너는 애라고.”
어젯밤 일은 그냥 어린애 애교였어요. 은별이는 은근 애교가 많은 아이잖아요.
“야옹, 루나.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개? 당근인 줄.”
“깜짝이야! 내, 내 얼굴이 빨갛다고요? 그럴 리 없어요.”
“야옹, 뭐가 그럴 리 없어? 빨갛다니까.”
여느 때처럼 필립은 어느새 기어 들어와 제 발치를 쓰윽쓰윽 서성이고 있었어요.
“그나저나 아빠는 알고 있었어요? 은별이가 아빠 말 다 알아듣는다는 거.”
“야옹.”
“뭐야, 언제부터 알았어요?”
“썩 오래되지는 않았어.”
“그게 언젠데요.”
“나이가 들어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해.”
얼버무리며 눈치를 살피는 게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게 확실하네요. 분명 나를 놀려먹을 생각에 그랬을 거예요.
“아빠가 그러고도 내 아빠 맞아요? 알았으면 즉시 나한테 말을 해줬어야죠!”
“야옹, 이렇게 네가 화낼까 봐 그랬지.”
“은별이가 네임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요.”
“야옹, 그건 당연한 거 아냐?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어도 대충 알았겠지. 눈치 빤한 녀석인데.”
“어떻게요?”
필립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푸른 눈을 깜빡였어요.
“어떻게냐니, 간단하잖아. 그럼 남의 이름이 몸에 새겨졌는데 그게 빚쟁이 이름이겠냐?”
“어유, 아빠랑 말을 섞는 내가 바보지.”
“나야말로 야옹이다.”
필립은 흥, 콧김을 내뿜고는 나가버렸어요. 저도 필요한 것을 챙겨 비품실에서 나오는데 마침 반가운 손님이 카페로 들어왔어요.
“사장님. 혹시 알바생 안 구하세요?”
이게 누구야! 저 역시 반가운 마음에 장단을 맞춰봤어요.
“일 잘해요? 예전에 잘생기고 일 잘하는 알바생이 두 명 있었는데, 그 후로는 하도 자주 바뀌어서 힘들거든요.”
“그런 알바생이 흔한 건 아니잖아요.”
대뜸 나타나 하하 웃으며 능청을 떠는 이 친구는 다름 아닌 세윤이에요.
세윤이는 올해 초 겨울방학이 끝날 즈음에 루나커피를 떠났어요. 그 후로도 간간이 놀러 왔는데 지난봄부터 뜸했거든요. 그때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면서요. 작은 역할이라도 맡게 되면 인사하러 온다고 했었어요.
“사장님은 여전하시네요. 잘 지내셨죠?”
“세윤 씨야말로 얼굴이 환한걸. 좋은 일 있구나.”
세윤이가 밝게 웃는 걸 보니 제 마음도 밝아지네요.
“실은, 조연이지만 고정 배역을 맡았어요.”
“와, 진짜? 대단하네. 정말 축하해.”
“소식도 전할 겸, 제가 여기서 일했다고 하니까 대표님이 사장님 한번 뵙고 싶다고 해서 왔어요.”
“응? 대표님이 나를?”
“대표님도 어쩌다가 루나커피 소문을 들으셨대요. 유명 인플루언서가 빵지순례 글 올린 게 있어서, 잠깐만요.”
세윤이가 휴대폰을 꺼내 들고 제게 내밀었어요.
“이거요.”
누군가의 SNS네요. 분명 루나커피의 빵과 커피를 찍은 사진이었어요. 그런데 제목이….
[빵 맛이 흐뭇하고 사장님이 달콤해요.]
“뭐, 뭐야. 이 제목은!”
“댓글이 장난 아니에요.”
세윤이의 손이 화면을 쓱쓱 밀어 올렸어요. 수도 없는 댓글이 달렸네요.
└ 달콤한 사장님 인정!
└ 저도 가봤어요. 점심때가 피크인 줄도 모르고 한참 줄 섰는데 덕분에 사장님 얼굴 실컷 봄.
└ 예전에 사장님 사진 못 찍게 하던 포악한 꼬마가 있었는데.
└ 그 꼬마 폭풍 성장했어요. 잘생김 주의.
└ 저도 가봐야겠어요. 친구들이 레알 비보이 형제라고. 뷰티풀 보이즈.
└ 처음엔 둘이 무슨 사이일까 되게 궁금했는데.
└ 무슨 사인데요?
└ 둘이 너무 잘 어울려요.
└ 이쯤 되면 저도 안 가볼 수가 없네요. 주말에 고고씽.
└ 일요일 휴무예요. 참고하세요.
제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댓글 중에 ‘둘이 너무 잘 어울려요’라는 글이 제 시선을 강탈했어요. 무, 무, 무슨 뜻일까요? 잘 어울린다니. 세윤이한테 물어볼 수는 없었어요. 왠지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뭐 그런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에요.
“너, 너무 과장된 것 같은데….”
세윤이는 ‘둘이 너무 잘 어울려요’는 관심도 없는 듯 그저 발랄하게 웃었어요.
“전혀 과장되지 않았죠. 오히려 더 유명하지 않은 게 신기한걸요. 그리고 저희 대표님도 빵돌이시거든요. 제가 사장님 빵 칭찬을 하도 했더니… 엇, 저기 오시네요.”
종소리와 함께 165cm 정도의 키에 동그랗게 생긴 남자분이 가게로 들어왔어요. 얼굴도 몸도 호빵을 연상시키는 분인데 인상이 아주 좋네요.
“대표님, 오셨어요?”
“미안, 늦었어.”
“사장님, 저희 대표님이세요. 이쪽은 루나 사장님.”
“와! 말로만 듣던 루나커피 사장님을 뵙게 되네요. 연예인 보는 기분입니다! 하하하!”
쾌활한 인사에 웃지 않을 수가 없네요. 말투도 얼굴도 단번에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 같아요. 세윤이도 웃음을 터뜨렸어요.
“우리 사장님 진짜 미인이시죠?”
“엇! 세윤아. 이제 너에게 우리 사장님은 나 아냐? 그럼 내가 미인이라는 뜻이 되는 거다. 하하하!”
“그런가? 알고 보니 제가 사장님 복은 좀 있나 봐요.”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는 별개로, 물 흐르듯 이어지는 대화 때문에 저는 말을 걸 틈을 놓치고 말았어요. 늦은 감은 있지만 떼어먹을 수도 없어서 인사를 건넸어요.
“안녕하세요, 우월영입니다.”
“앗, 이런. 잠깐만요. 지갑이 어디 있지? 오, 여기 있군.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제 손에 건네준 명함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어요.
황금달 엔터테인먼트
대표 이노마
“반갑습니다, 이노마 대표님. 우리 세윤이 잘 부탁드려요.”
“세윤이가 사장님 칭찬을 얼마나 하던지. 빵 맛 칭찬도요. 엇! 이건 무슨 냄새죠?”
“지금 굽고 있는 빵 냄새 말씀이세요? 주방에서는 초콜릿 타르트를 굽고 있고요, 여기서는 저쪽 손님이 주문하신 치즈 토스트를 굽고 있어요.”
이노마 대표의 조그만 눈이 반짝거렸어요.
“저는 초콜릿과 치즈라면 사족을 못 씁니다. 저도 둘 다 주세요. 세윤이 것도요. 커피는 추천해주실래요?”
“루나커피를 드시죠. 콜롬비아 원두의 더블샷 아메리카노요.”
“좋습니다!”
세윤이가 이노마 대표를 한갓진 자리로 모셔갔어요. 저는 주방의 알바생에게 카운터를 맡기고 두 사람에게 빵과 커피를 직접 서브했어요.
“우리 세윤이 잘 봐달라고, 서비스입니다.”
“엇! 이렇게 안 하셔도 잘 봅니다. 하하하!”
“그럼 말씀 나누세요.”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없을까요?”
“저하고요?”
“네! 잠깐이면 됩니다.”
저는 자리에 앉았어요. 이노마 대표가 사람 좋게 웃으며 말을 이었어요.
“카페 일이 바쁘실 줄은 압니다만, 정말 좋은 마스크를 갖고 계세요.”
“마스크… 얼굴요?”
“네네. 연기 쪽은 생각 안 해보셨어요?”
“연기…라면 드라마 같은 데에 출연하는 거 말씀이세요?”
“드라마도 있고 영화도 있고요. 지금 이야기할 건 드라마가 되겠네요.”
“저 드라마 보는 게 취미예요. 물론 영화도 좋아하고요. 극장에 갈 시간은 별로 없어서 집에서 주로 보지만요.”
세윤이가 빵을 우물거리며 말했어요.
“맞아요. 우리 사장님 드라마광이세요.”
“잘됐네요! 이번 드라마는 저희 회사가 제작하는 거거든요. 해외 올 로케이션이에요. 거기 주인공이 스웨덴으로 입양된 대학생인데, 그 주인공이 입양된 가정에서 만난 오빠를 짝사랑하는 부분이 있어요. 굉장히 미남이고 금발에….”
세윤이가 손바닥으로 탁자를 두들겼어요.
“와! 진짜 딱이네요.”
“그치그치? 내 안목이 이 정도라니까, 하하하!”
저는 좀 흥분했어요. 이건 그동안 드라마에서 봐온 것과는 또 색다른 이야기네요. 게다가 짝사랑이라니 완전 제 스타일!
“정말 재미있겠네요. 그 오빠랑은 그래서 짝사랑으로 끝나나요?”
“아마 그럴걸요? 아무튼, 그런데 그 오빠 역할에 사장님이 딱이란 말이죠!”
“오옷, 말도 안 돼요. 드라마 내용이 완전 제 스타일이기는 하지만.”
“진짜요? 그럼 오디션 한번 보실래요?”
“네…. 오디션? 제가요?”
“네네. 오디션은 그냥 형식적인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아시다시피 연기란 연습의 산물이니까요. 대사만 읊을 수 있으면….”
정신없이 타르트를 먹고 있던 세윤이가 끼어들었어요.
“사장님 나오시면 대박 터질 거예요. 대표님, 저도 그 드라마에 나오게 해주시면 안 돼요?”
“그래그래. 사장님 친구 역할을 한번 만들어볼게.”
저는 서둘러 두 사람의 대화를 중단시켰어요.
“아, 뭔가 오해가 있으신가 봐요. 저는 루나커피 일만으로도 벅차답니다. 게다가 드라마라니, 저는 보는 것만 좋아한답니다. 직접 연기하는 건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 없어요.”
이노마 대표는 제 말에 무척 상심한 것 같았어요. 이 시점에서 저는 그 사람의 생각을 슬쩍 리딩해봤어요. 고백하지만, 한새 엄마 사건 이후로 저는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가끔 리딩을 해요. 로저 말이 완전히 틀리지는 않는 것 같았어요. 세윤이가 소속된 회사이니 이분이 보이는 것처럼 진실한 분인지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다행히 이노마 대표는 보이는 것과 속이 똑같은 사람이네요. 처세술이 대단하지만 악의는 없었어요. 저에게도 일에 관련해 호감을 갖고 있을 뿐이에요.
저는 그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고, 대신 제 입으로 말하기는 뭣하지만 둘이 먹다가 둘 다 까무러쳐도 모를 만큼 맛있는 레몬 크림 타르트를 서비스로 가져다드렸어요. 세윤이는 테이블 위의 풍경을 백 장쯤 찍었어요.
두 사람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본 후 저도 제 포지션으로 돌아와 열심히 일했어요. 그러던 중 제 휴대폰에서 알림 소리가 들렸고, 그와 동시에 조그만 좌표가 뜨더니 은별이가 뒷마당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어요.
[깨물고 싶게 귀여운 은빛아가별] 집에 왔어. 씻고 내려갈게.
제 입가의 미소가 조금 흐트러졌어요. 이제 ‘깨물고 싶게 귀여운 은빛 아가별’이라는 이름은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언젠가 은별이도 이걸 보고는 반발했었죠.
“내가 어디를 봐서 아가별이야?”
왠지 조금 울적해져서 묵묵히 커피를 내리고 있는데 뒷마당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어요.
“으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