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67화 (67/103)

<67화>

내가 생각해도 덩크슛은 환상이었다.

골대에 매달린 순간 루나와 눈 맞춤을 한 것 역시 환상이었다. 내 생애 최고, 아니 두 번째 최고의 순간이었다. 가장 최고의 순간은 바람산 기슭에서 루나를 처음 봤던 날 밤이었으니 그다음.

그런데 그 두 번째 최고의 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 경기는 그 후로도 진행되었는데, 이 미친 최지환 새끼는 더 이상 반칙은 하지 않았지만 나를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게 분명한 플레이를 계속했다. 심판이 파울을 선언하기 애매할 정도만 약 올리는 식이었다. 열 받은 내가 반칙하게 만들려는 게 뻔했지만 당연히 나는 말려들지 않았다.

결국 그 녀석은 마지막 쿼터에 제 꾀에 제가 넘어졌다. 공을 내 머리 위로 보내 약 올리려다가 드리블 시간을 넘기고 말았던 것이다. 거기에 내가 쏜 공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골텐딩을 하려다가 경고를 먹었다. 그것으로 퇴장이었다. 덕분에 나는 그냥 뒀으면 안 들어갔을 슛으로 득점했다.

더 이상 덩크슛은 나오지 않았지만, 우리 팀의 승리로 경기는 끝났다.

그런데 끝나자마자 루나에게 달려가기 위해 관중석으로 향하다가 ‘꿀벌’들한테 잡히고 말았다. 나를 졸졸 쫓아다니는 여학생들 무리 말이다.

“정은별! 덩크슛 끝내줬어!”

“우리랑 사진 한 장 찍을 수 있어?”

당연히 나는 거절했다.

“안 돼. 고맙지만 좀 꺼져라. 약속 있단 말이야.”

꿀벌들이 발을 구르며 외쳐댔다.

“나쁜 남자!”

“은근히 매력 쩔지 않아?”

자식들,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싱글거리고 있으려니 이번에는 코치 샘이 불렀다. 씨발, 왜 이렇게 훼방꾼이 많은 거야. 마음이 급해진 나는 루나가 있는 쪽을 올려다보았다. 실수였다. 내 시선을 꿀벌들이 쪼르르 따랐다.

“와악! 루나다!”

“루나커피!”

당황한 나는 뒤늦게 외쳤다.

“야야, 꿀벌들! 사진 찍자! 사진 찍어줄게!”

그러나 늦었다. 꿀벌들은 붕붕거리며 스탠드 석으로 몰려가려는 중이었다. 나는 서둘러 루나에게 손짓했다. 빨리 집에 가!

내 손짓에 루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간다는 의미로 뒤쪽을 가리켰다. 그가 사람들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후 나는 부원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40분쯤 후에 나는 학교를 벗어날 수 있었다. 루나커피까지 한달음에 자전거를 달렸다. 루나커피에 들어서자 박수가 쏟아졌다. 단골손님들이었다.

“은별아. 덩크슛 날렸다며!”

“대단하다.”

“너 코흘리개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애들은 정말 금방 크네요.”

나는 의아해서 물었다.

“방송에 나간 것도 아닌데 어떻게들 아세요?”

매일 퇴근 시간마다 들르는 단골손님이 대답해주셨다.

“형이 말해줬어.”

“네에?”

나는 카운터 쪽을 돌아보았다. 루나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하긴, 루나가 은근 수다쟁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배낭을 사무실에 던져 넣고 카운터로 들어갔다.

“손님들한테 자랑한 거야?”

싱글거리는 내 얼굴을 흘긋 보고는 루나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동영상도 보여줬어. 조-기.”

그가 가리킨 곳은 굿즈 진열대였다. 루나커피의 커피잔과 주전자, 차와 원두 봉지들 사이에 노트북이 놓여있었다. 화면에는 휴대폰으로 촬영한 농구경기 동영상이 무한 반복 재생 중이었다.

“헐!”

내 감탄사를 오해한 것은 아닐 텐데 루나가 키들거리며 헛소리를 지껄였다.

“화면이 너무 쪼꼬맣지?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대형 TV를 걸어놓을 걸 그랬어.”

“형! 왜 그랬어?”

“저런 걸 아무나 넣니? 저런 건 자랑해야지. 손님들 반응도 좋잖아.”

“미치겠네.”

“안 피곤해? 올라가서 씻고 쉬어.”

“학교에서 샤워하고 왔어.”

나는 바로 소매를 걷어붙였다. 이제 지금부터 퇴근 시간까지가 제일 바쁜 시간이었다. 알바생이 두 명이나 있지만 예전보다 더 장사가 잘되어서 피크타임 때는 손이 모자랐다. 게다가 오늘은 손님마다 내 덩크슛 얘기를 건네는 바람에 더 정신이 없었다. 루나가 주방에 들어간 사이 나는 재빨리 노트북을 치웠다.

이윽고 손님들이 하나둘 나가고 저녁 장사도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다. 가게를 치우고 있는데 로저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은 준이와 둘이 저녁을 먹었으니 다음에 보자는 내용이었다.

전화를 끊은 루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깜빡했는데, 오늘 네 이모가 또 준이한테 전화했어.”

“이모가? 어디서?”

“형무소에서.”

로저가 준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자 이모는 악을 바락바락 쓰며 나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단다. 내가 선처를 바라지 않는다고 하는 바람에 사면도 못 받는다는 것이다.

루나는 내가 걱정할까 봐 말해주지 않았는데 며칠 후 로저가 이모와 통화했다는 말을 해주었다. 준이를 보살피고 있다는데도 이모는 고마워하기는커녕 강짜를 놓았단다.

“당신 우리 준이 앵벌이 시키려는 거지? 무슨 꿍꿍이인지 내가 나가서 다 밝힐 거야. 눈곱만한 애한테 핸드폰까지 사주고 뭘 시켜먹으려는 거야?”

적반하장이라는 말은 강도가 너무 약하다. 머리통에 뭐가 박혀있으면 그런 말이 나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당연히 나는 이모나 이모부 따위 무섭지는 않았지만 찜찜했다. 언제 우리 앞에 나타나 엉뚱한 짓을 벌일지 걱정되기도 했다.

“형이 좋아하는 가수 중에 존 뭐라는 사람이 있었지?”

그날 늦은 저녁, 우리는 오랜만에 뒷마당 정자에 식탁을 차렸다. 루나는 캠핑용 간이 테이블에 식탁보까지 깔고 화병에 달맞이꽃도 꽂아놓았다. 고양이들도 신이 나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필립은 고양이들을 바라보며 정자 안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릴에 스테이크와 채소를 굽고 있었다.

내 질문에 식탁을 차리던 루나가 돌아보았다.

“존 레논?”

“응. 그 사람, 팬한테 살해당했다고 했지?”

“그랬지.”

“그런 건 계획조차 할 수 없잖아.”

“응?”

“존 레논은 분명 그날 저녁에 뭐든 계획이 있었을 거야. 와이프랑 식당에 간다든지, 하다못해 집에서 TV를 본다든지.”

“그랬겠지.”

루나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인생무상, 그런 말을 하면 루나는 비웃겠지. 나는 설명을 그만두고 마당 쪽을 가리켰다.

“레몬이랑 딜 좀 따다 줄래? 내가 레몬 소스 만들게.”

“우리 은별이가 소스도 다 만들고?”

“주방 개 3년이면 라면도 끓이잖아.”

그럭저럭 식탁이 차려졌고, 루나는 나를 위해 특별히 만든 산딸기 크림 케이크에 노란 초를 꽂고 불을 붙였다.

“에이, 쑥스럽게.”

내가 촛불을 끄자 루나는 환호와 함께 박수를 쳐주었고 고양이들은 시끌벅적하게 야옹거렸다. 예전에 필립에게 이 시끄러운 소리는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니 노래를 부르는 거라고 했다. 늘 생각했지만 가능하면 고양이들이 노래는 안 부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은별아. 오늘 멋있었어. 형은 네가 잘 자라줘서 얼마나 흐뭇한지 몰라.”

“쳇.”

“뭐?”

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루나를 힐금 보고는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내 반응에 루나도 눈을 흘기고는 식사를 시작했다.

“레몬 소스 훌륭하네! 우리 은별이 요리사 해도 되겠어.”

“됐습니다.”

“하긴, 우리 은별이는 농구선수지.”

“그것 좀 안 하면 안 돼?”

“뭘?”

“우리 은별이, 우리 은별이.”

“왜?”

“내 키가 178.3cm인데 아직도 우리 은별이야?”

내 말에 루나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내가 그에게 처음으로 이름을 가르쳐주었을 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그거랑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음료수를 들이켰다.

“됐어.”

“야옹, 얘들아. 사랑싸움 시작인가 보니까 우린 들어가자. 소고기 한 점씩 챙겨.”

“아니, 아빠. 그게 무슨 말이에요? 거기 그냥 계세요. 얘들아. 앉아서 먹어.”

그러나 필립과 고양이들은 입에 고깃덩어리를 하나씩 물고 기차놀이를 하듯 열을 지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멍하니 지켜보던 루나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 은별… 아니, 은별이 요즘 툭하면 신경질이야. 형한테 뭐 화난 거 있어?”

나는 심통 난 사람처럼 루나를 쏘아보았다. 그가 불안한 듯 내 표정을 살폈다.

“오늘 나 어땠어?”

내 질문에 루나의 은회색 눈동자가 순간 빛을 발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오늘 밤 잠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리라 마음먹었다.

“끝내줬지. 그러니까 형이 손님들한테 자랑한 거잖아.”

“아니, 형 말이야. 난 형만의 생각이 알고 싶다고.”

루나가 정면을 바라보며 잠시 뜸을 들였다.

“저렇게 멋진 녀석이 진짜 우리 은별이 맞나, 대체 언제 저렇게 자랐지? 그것도 세상 멋진 놈으로 자라버렸어.”

“진짜로?”

“진짜로.”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 정도면 됐다는 뜻으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뭐가?”

나는 식탁에 팔을 괴고 그를 빤히 보았다. 이번에도 달빛에 잠긴 듯한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순간 나는 그 의미를 알았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떤 개사이코 같은 녀석이 갑자기 끝장낼 수도 있는 게 인생이잖아.”

루나는 귀여운 미간을 살짝 좁히고는 내 입술과 눈을 번갈아 응시했다.

“내일이라도 그런 녀석한테 어이없이 당하지 말란 법 없단 말이야. 그러니 인생은 할 수 있을 때 뭐든 해야 해. 안 그래?”

그제야 내가 하려는 말을 짐작했는지 긴장한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아. 하고 싶은 일 있으면 부지런히 다 해봐야 해.”

“그래서 하는 말인데, 고백할게.”

또다시 긴장의 빛을 품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렇구나. 루나는 불안한 거였다. 예측 가능한 일만 하고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변화였다. 할 수만 있다면 그는 시간을 묶어두고 100년쯤 똑같은 하루를 살아가고 싶을 것이다.

“나 필립 말 알아들어.”

이번에도 멍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던 그가 수초 후에 외쳤다.

“뭐라고?”

“필립이 하는 말 다 알아듣는다고.”

이제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격한 동공 지진이 일어났다. 그 진동은 과거 어느 시점으로 후진했다가 빠르게 거슬러 올라오고 있을 것이다. 필립과 루나와 내가 있던 시간을 거치면서 말이다.

“언제부터?”

“거의 처음부터.”

“너, 너….”

루나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지만 나는 한가롭게 히죽거렸다.

“미안.”

“정은별, 너….”

“나 형의 배필이잖아.”

백짓장이 된 얼굴로 루나가 눈동자와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

“사랑해.”

루나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한번 깨물고는 파슬리 조각을 내게 던졌다. 나는 손바닥으로 블로킹했다.

“너! 이 엉큼한 녀석! 형이 신사적으로 리딩도 안 하고 최선을 다해 곱게 키웠는데, 이렇게 배신을 해!”

나는 그가 던진 감자 조각, 레몬 조각, 브로콜리, 방울토마토, 산딸기, 포크, 나이프 등을 차례로 쳐내며 신나게 떠들었다.

“오늘 나 덩크슛 쏜 날이자 형한테 찐 고백한 날이다!”

“시끄러! 입 닥쳐! 일루와!”

급기야 우리는 쫓고 쫓으며 뒷마당을 헤집고 다녔다. 나는 플럼버의 달을 향해 외쳤다.

“루나 블랑슈는 정은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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