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야옹, 앙큼한 녀석. 왜 졸졸 쫓아오는 거야?”
내가 귀찮은지 필립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루나는 요 며칠 필립이 말수가 줄었다며 은근히 걱정 중이었다. 그래서 내가 대화를 시도해볼 생각이었다. 이렇게 따라다니면서 보니 걸음걸이도 어딘지 기운이 없어보였다.
“루나가 내 나이였을 때 어땠어요?”
“그걸 또 묻는 거냐?”
“네.”
“지금이랑 똑같았어.”
“어떤 면에서요?”
“아주 따분한 녀석이었다고.”
나는 으음,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필립을 번쩍 안아 들었다.
“야옹! 이 버릇없는 놈이 누굴 감히 들어 올려?”
안아 들고 정자 안 벤치에 앉으니 필립의 투덜거림도 잦아들었다. 뒷마당에는 달맞이꽃이 만발이었고, 키 낮은 꽃나무들 사이를 고양이들이 스윽스윽 지나다녔다.
“어떻게 따분했는데요?”
“야옹, 이미 알 만큼 알잖아. 뭐가 그리 연속적으로 궁금하냐?”
“정은별은 루나 블랑슈를 알기 위해 사는 거니까.”
“야옹.”
“정은별의 인생은 루나 블랑슈라는 이름을 갖게 된 후부터 시작되었으니까요.”
신이 내게 루나 블랑슈라는 이름을 주셨을 때, 그때부터 정은별의 인생은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것이 내 인생 최고의, 단 하나뿐인, 앞으로 어떤 축복도 그보다 더할 수는 없을 만큼의 행운이었다.
“어떻게 따분했어요? 인형 옷 만드는 것 말고 또 따분한 짓을 했나요?”
“루나는 뭐든 반복되는 일을 좋아했어. 규칙적인 생활, 어제와 같은 오늘. 그러니 커피숍 일이 아주 잘 맞았지.”
“변화를 싫어한다는 뜻인가요?”
“아마도.”
“그건 아빠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아빠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말썽꾸러기라서….”
“야옹!”
“앗, 죄송. 아무튼 그래서 안정감 있는 생활을 추구하려는 심리가 아니었을까….”
“좀 컸다고 심리학자 흉내를 내?”
“이제 후회하시는 거죠?”
“닥쳐.”
평소처럼 쏘아붙였지만, 앞발에 얼굴을 묻는 품이 어딘지 쓸쓸해보여서 나는 필립을 내려다보았다.
“요즘 무슨 일 있어요?”
“야옹.”
“있다고요?”
“그냥, 늙나 봐.”
“오, 갱년기?”
“야옹!”
요즘 나는 필립에게서 그전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진지한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줄 알았는데 어쩌면 그게 의도치 않았던 누군가의 가스라이팅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말하자면, 루나에게 너무나도 강하게 박혀있는 필립에 대한 고정관념이 루나의 말을 타고 내 머릿속에도 주입되는 식 말이다.
“캐롤린을, 사랑하셨어요?”
“야옹. 뭔 소리야.”
“그런데 왜 바람피우고 다녔어요?”
이번에는 닥치라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필립의 등을 쓰다듬으며 대답을 기다렸다. 무지 궁금했지만 재촉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어쩐지 중2병에 걸린 게 아닐까 싶기도 했으니 말이다. 중2병에 걸린 고양이, 그것도 애인의 아빠인 고양이라니 어떻게 대해야 할지 좀 난감했다.
한숨만 포옥 쉬던 필립이 고개를 들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인간이었던 그의 얼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착시치고는 너무 선명한 착시였다.
“루나한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
“어… 그건….”
“야옹.”
필립은 단번에 원래 있었던 앞발 사이에 다시 머리를 묻으려 했다. 나는 서둘러 대답했다.
“알았어요! 말 안 할게요.”
“야옹, 말하면 네가 내 말 다 알아들어놓고 못 알아듣는 척했다고 꼰지를 거야.”
“아, 알았다고요.”
“말이 나온 김에 묻겠는데, 너 네임에 대해 우리가 떠들어댄 것도 다 알아들었어?”
나는 히죽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가릉거렸다.
“그래서, 밤고구마 시절에도 그걸 알았다고?”
또 고개를 끄덕이자 꼬리로 내 뺨을 찰싹 때렸다.
“아야….”
“앙큼한 놈! 그러니까 넌 그때부터 루나를 배필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냐?”
“당연하죠.”
“와, 진짜 야옹이네.”
“아이참, 빨리 하려던 말이나 해줘요.”
필립은 꼬리로 내 양 볼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러고 나서야 이야기를 시작했다.
필립의 이야기는 정말 뜻밖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나자 어째서 필립이 처음부터 내 편을 들었던 건지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왜 루나한테 사실대로 말하지 않아요?”
“야옹, 부질없어.”
“부질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루나는, 그야말로 곱게 자랐어. 온실 속의 화초나 다름없지. 내가 아빠 노릇을 못 한 거 빼고는 루나에게 아픔이란 네가 아는 그 정도뿐이야. 너도 알겠지만 그건 누구나 겪는 아픔 중 하나지. 인복이 있다고 하나, 그 아이 주위에는 늘 좋은 사람들이 있었어. 지금도 그렇고 말이지.”
“그래서요?”
“뭐가 그래서야. 원래부터 내가 건달이었던 건 사실이니까, 그냥 그 정도로 퉁치면 돼.”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네. 뭘 퉁쳐요? 내가 아무리 듬직하게 루나를 지켜주더라도 필립은 아빠잖아요. 내가 아빠 자리까지 대신할 수는 없어요.”
“야옹, 듬직 좋아하시네.”
필립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내 무릎 위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내 몸이 전 같지 않아서 해주는 말이야. 루나 잘 지켜주라고.”
“어디 아프세요?”
“야옹, 이제 나도 늙었다고. 굳이 말 안 해도 넌 네임에 대해서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으니 잔소리는 이 정도로 생략하마.”
“당연하죠. 그게 내 전부인데.”
필립은 그 말이 마음에 드는지 야옹 소리를 길게 빼면서 돌아섰다. 긴 꼬리를 우아하게 흔들며 그가 계단을 올랐다. 어쩐지 나는 좀 착잡해졌다.
“늙었다고? 필립이?”
만약 필립이 없다면, 루나는?
둘이 투덕거리는 걸 가만 보고 있으면 그게 부자간의 깊은 애정의 표현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늘 재미있었다. 엄마 일로 원망이 남았는지는 몰라도 루나는 필립을 사랑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런 루나 곁에 필립이 없다니, 과연 괜찮을까?
“아니.”
전혀 괜찮지 않을 것이다. 슬퍼할 루나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파 왔다. 그러나 모든 생명은 끝이 있는 법, 그걸 막을 방법은 없으니….
“내가 좀 더 잘해야 해.”
좀 더 빨리 자라서, 필립이 정말 떠나가는 일이 생겼을 때 루나가 조금이나마 그의 빈자리를 덜 느끼도록, 빨리 멋진 남자가 되어야 해!
*
나의 루나가 좋아하는 것.
1. 정은별 (희망 사항)
2. 필립과 고양이들
3. 루나커피
4. 로저와 친구들
5. 플럼버
6. 드라마
7. 수다
8. 요리
9. 채소
10. 자전거
11. 스포츠
이 열 가지 중에서 내가 싫어하는 건 채소 하나뿐이다. 루나 혼자 먹으면 좋을 텐데 자꾸 내 입에도 넣어준다. 특히 당근이나 브로콜리를 넣어주면 아주 잠깐이지만 울고 싶다. 그런데 이제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그깟 채소 먹는다고 죽냐? 루나 말로는 채소를 먹어야 건강하게 잘 산단다. 그러니 좋아해야지.
루나도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나 때문에 억지로 좋아하게 된 거 아닌가. 한번은 프로야구경기 중 9회 말 끝내기 홈런이 터진 순간에 루나가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든 바람에 입틀막하고 속으로만 환호했던 경험이 있다.
가끔 생각할 때가 있다. 루나는 나와 함께 하고 싶어서 스포츠 중계를 보는 걸까? 내가 루나와 함께하고 싶어서 드라마를 봤던 것처럼. 분명 그랬다. 그래서 비록 10위권 밖이기는 해도 페이버릿 목록에 스포츠가 등극한 것이다. 알고 보면 우리는 서로에 대한 배려심까지 천생연분으로 닮았다.
“몇 시까지 가면 된다고 했지?”
텅! 소리를 내며 토스트가 토스터에서 튀어 올랐다. 내 접시에 샐러드를 담아주던 루나가 물었다. 나는 토스트에 잼을 바르며 되물었다.
“정말 올 거야?”
“당연히 가야지.”
“가게는, 괜찮아?”
“로저가 봐준댔어.”
“그럼 2시까지 오면 돼.”
“덩크슛 넣는답시고 무리하지 마. 부상이라도 당하면 큰일이니까.”
“걱정 마.”
나는 빙그레 웃으며 샐러드를 입안에 욱여넣었다.
*
지금 루나는 우리 학교 체육관 관람석에 앉아있다. 관객은 물론이고 경기를 앞둔 선수들과 코치 및 선생님들까지 죄다 그에게 시선 집중인데 본인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오늘의 내 목표는 덩크슛이다. 농구부에서는 아직도 나는 단신에 속하는 형편이라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목표지만 꿈은 꾸라고 있는 거니까.
내 포지션은 3번 스몰 포워드, 사실상 전령수이니 드리블과 패스만 잘 해주면 된다. 내 키가 190cm만 되었어도 활약다운 활약을 해볼 수 있었을 텐데, 젠장.
중요한 건, 오늘 상대 선수 중에는 최지환이 있었다. 중학교가 달라 다행이다 싶었는데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이렇게 또 보게 되었다.
녀석은 여전히 하마 같았다. 그동안 키가 조금 더 크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초등학교 때 살면서 클 키가 다 커버린 것 같았다.
녀석은 나의 늠름한 모습에 당황한 것 같았다. 아니면 실어증 걸린 하마가 됐든지. 심기가 뒤틀렸는지 이 미친 새끼가 경기 내내 고의라는 걸 숨길 생각도 없이 나를 공격했다. 계속 경고를 먹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게 어릴 때나 지금이나 무뇌충 같은 하마 새끼였다.
녀석은 포워드라서 나보다 공을 잡을 기회가 훨씬 많았다. 공을 잡았으면 공격을 하든지 드리블을 하든지 해야 하는데, 이 미친놈이 내 대가리를 향해 속공을 쏘아댔다.
심판이 퍼스널 파울을 세 번이나 외쳤는데도 깨닫는 게 없는 눈치였다. 급기야 녀석과 나는 몸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이 새끼야! 경기 말아먹을 거면 꺼져!”
“난쟁이 너나 꺼져!”
“내가 어디가 난쟁이야! 이 하마 새끼야!”
경기는 순식간에 개싸움의 현장으로 번졌다. 그 와중에 내게 공이 날아왔다. 가드가 잘못 던진 모양인데 하마가 쇠가슴으로 나를 팡팡 쳐대는 바람에 놓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나는 녀석의 공격을 지렛대 삼아 한 바퀴 돌아 그 공을 잡았다. 그 순간에 루나의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 바람에 내 능력치가 최고로 레벨업 되었다. 탄력을 받은 내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두 번째 회전은 아주 잠깐이지만 비상의 느낌마저 받았다. 나는 크게 도약했다. 그리고 곧 말도 안 되게 높은 지점에서 골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속력으로 낙하한 나는 골대의 그물망에 공을 ‘꽂아’ 넣었다.
골대에 매달린 나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헷갈렸다. 내 심장이 요란하게 쿵쾅거렸다. 루나의 얼굴만이 조명을 켜놓은 것처럼 빛났다. 그의 놀란 얼굴은 언제 봐도 볼만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벌떡 일어난 그가 당구공만 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활짝 웃었다. 저 얼굴을 보고 안 웃을 도리가 있나. 바닥에 착지한 후에야 귀청이 터질 것 같은 함성이 귀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