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64화 (64/103)

<64화>

이러면 안 되는데 말입니다.

이제 은별이는 어린애가 아니니 그럴 필요가 없는데, 저는 여전히 은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면 몰래 좌표를 띄워보고는 한답니다.

물론 은별이가 이런 걸 싫다고 한 적은 없어요. 좌표를 띄워보건 말건 그 녀석은 제가 하는 일에 불만스러워한 적이 없답니다.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분명한 건, 어른인 제가 알아서 이런 행위를 그만둬야 한다는 겁니다. 아무리 보호자로서 불안감을 느껴서, 라고 변명하려 해도 변명은 변명이죠.

솔직히 저는 늘 은별이가 궁금해요. 아마도 습관성이 아닐까 싶어요. 처음 왔을 때부터 쌈박질부터 했던 녀석이니까. 어딜 가든 꼭 맞고 다니는 아이였으니 걱정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제 은별이는 더 이상 밤고구마가 될 때까지 맞고 다닐만한 아이가 아니랍니다. 어느새 저보다 키가 무려 1cm나 더 커져서는! 말이 되나요? 비록 1cm지만, 그 코흘리개 꼬마가 저보다 크다니! 어깨도 꽤 넓어지고 손발도 커졌고요, 얼굴은 더 예뻐졌지 뭐예요. 세윤이가 부러워할 정도로 말이죠.

아무튼 더 이상 일일이 걱정할 필요는 없는데도 가끔 ‘초인종’이 울릴 때면 저도 모르게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나 봐요. 일부러 하지 않아도 좌표가 둥실 떠 있기도 하니까요.

아, ‘초인종’이 뭐냐고요? 아마도 네이밍이 된 사람끼리 연결된 감각 신호가 아닌가 싶어요. 은별이에게 무슨 일이 있거나 은별이 심기가 불편하면 제 신경도 날카로워지거든요. 보통 ‘촉이 온다’고 하죠. 처음엔 그게 그런 건줄 몰랐는데 은별이가 ‘우린 뭔가 굉장히 잘 통한다’고 떠드는 일이 많아지다 보니 저도 인식하게 되었답니다. 특히 은별이가 위험에 빠지면 자동인가 싶게 좌표가 뜨고는 하니까요. 지금도 그래요.

“쟤들 뭐야!”

한 무리의 여학생이 은별이를 부르며 쫓아가고 있었어요. 또 다른 무리가 은별이 자전거를 막아섰어요. 은별이는 그 애들을 피하다가 결국 넘어지고 말았어요.

다행히 은별이가 다치지는 않았지만 화가 안 날 수는 없네요. 여학생들이 호들갑을 떨며 은별이한테 몰려들고 있어요. 은별이가 눈곱만할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애들이 번듯한 중딩이 되니까 저렇게 난리를 치며 쫓아다니네요.

다행히 은별이가 눈곱만할 때부터 좋아해줬던 친구들이 은별이를 발견했어요. 선호랑 나리예요. 그 친구들 덕분에 은별이가 무사히 교실이 있는 건물로 들어갔어요. 제 손가락이 조금 짜증스럽게 좌표를 쓸어버렸어요.

“야옹, 또 낭군 감시하냐?”

저는 눈을 위아래로 까뒤집으며 으름장을 놓았어요.

“필립. 한 번만 더 낭군 같은 소리 하면 이채영 씨한테 아빠 정체를 밝히겠어요.”

“야옹, 이채영이 누구야?”

“헐! 자기가 작업 거는 여자 이름도 몰라요?”

“작업 관둔 지 오래됐다.”

“그 여자 집에까지 드나든 걸 내가 아는데 거짓말을 해요?”

필립은 야옹거리며 슬금슬금 밥솥 위로 올라갔어요. 거기는 필립이 주방에서 제일 좋아하는 자리예요.

“그 여자가 날 데려간 거야. 내가 작업 걸린 거라고.”

“아빠가 꼬리를 살살 치니까 그러죠!”

“야옹!”

“뭐가 야옹이에요?”

“말 버르장머리를 그냥!”

“나 혼자 생각이 아니에요. 로저도, 은별이도, 심지어 준이도 그렇게 생각한다고요.”

더 이상 대꾸할 말이 없는지 필립은 앞발 사이에 얼굴을 묻었어요.

“요즘 우울증이야. 말 시키지 마.”

은별이가 예전에 한 말이 생각나서 무심코 물어봤어요.

“이채영 씨가 엄마랑 닮았어요?”

즉시 돌아올 상용구가 돌아오지 않았어요. 야옹, 말이에요. 저는 손질하던 채소를 개수대 안에 내려놓고 밥솥을 돌아봤어요. 필립은 몸을 한껏 둥글게 말고 있었어요.

“아빠. 내 말 못 들었어요?”

“야옹.”

“은별이가 그러던데요. 내 방에 있는 엄마 사진들요, 이채영 씨가 엄마랑….”

“야옹-”

그제야 밥솥에서 내려오네요.

“어디 가세요?”

“쉬 마려.”

필립은 싱크대에서 폴짝 뛰어내리더니 어슬렁거리며 주방을 나갔어요.

“왜 저래? 답지 않게.”

그날은 유난히 바빠서 정신없이 지나갔어요. 알바생이 아파서 나오지 않는 바람에 더 바빴죠. 세윤이와 희상이가 그만둔 후로는 마음에 드는 알바생을 구하지 못했답니다.

세윤이는 졸업해 직업 연기자로 활동하고 있어요. 언젠가 드라마에 주인공 친구의 동생으로 출연한 것을 본 적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드라마여서 무척 신기했죠. 요즘도 가끔 놀러 온답니다. 전보다 훨씬 잘생겨졌어요.

희상이는 에릭과 잘 살고 있어요. 지난 크리스마스 때는 둘이 루나커피에 왔답니다. 누가 봐도 커플인 것을 알 정도로 티를 팍팍 내면서 말이죠.

희상이가 은별이에게 유명한 영국제 고릴라 인형을 선물하는 바람에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던 게 기억나네요. 희상이는 마지막 통화했을 때만 해도 은별이의 폭풍 성장을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에요. 은별이는 그 인형을 벽난로 위에 놓아두었는데, 어느덧 고양이들의 쿠션이 되어버렸어요.

“바쁘다, 바빠.”

저녁에 로저와 준이를 초대했기 때문에 식사 준비를 슬슬 시작해야 해요. 저는 서둘러 가게 문을 닫고 옆집 슈퍼에서 장을 봐온 다음 텃밭의 채소를 땄어요.

전골 요리는 재료 준비만 하면 별로 할 게 없어서 잠시 후 로저가 약속 시간보다 일찍 들어왔어도 별로 당황하지 않았어요.

로저와 준이는 이제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콤비가 되었어요. 준이는 원래 어리광스러운 성격 같은데 억지로 성장했다고 해야 할까요, 의젓한 척하는 게 귀엽기도 하고 여전히 안쓰럽기도 해요.

언젠가 로저에게 준이를 조금 더 살갑게 대해주면 애가 눈치 보지 않을 거라고 했더니, 이 무뚝뚝한 아저씨가 굉장히 고민스러운 얼굴로 묻더군요.

“그게 뭔가?”

“살가운 거 몰라요? 살가운 거?”

“살이, 가려운 건가?”

순간 로저가 외계인처럼 보였어요.

저는 고민에 빠졌어요. 이 아저씨를 어떡하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으니 패스할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도 준이는 로저가 좋은지 볼 때마다 바위의 전복처럼 딱 들러붙어 있어요.

“루나. 오늘도 초대해줘서 고맙네. 이건 선물일세.”

로저가 손에 들고 있던 꽃을 제게 내밀었어요. 노란 장미 스무 송이네요. 예쁘긴 하지만 조금 떨떠름했어요. 저 스스로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많은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예 없지는 않았나 봐요.

“고마워요. 그런데 너무 예뻐서 아깝네요. 이런 꽃다발은 어여쁜 애인에게 주셔야 하는데.”

로저는 싸늘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었어요.

“자네도 독신이면서 은근 독신을 갈구려 들더군.”

“엇. 로저, 독신이에요?”

“뭐, 지금으로서는 그런 셈이지.”

“확실하게 말씀하신 적 없잖아요.”

“루나. 나는 말일세….”

“헤에, 츄-!”

준이가 재채기를 했어요. 저는 서둘러 준이를 안아 들고 벽난로 옆에 앉혔어요.

“추운가 봐요. 감기 기운 있는 거 아닐까요?”

“글쎄.”

“따끈한 코코아라도 먹여야겠어요.”

제 말에 준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어요.

“괜찮아요. 감기 안 걸렸어요.”

준이는 커다란 눈을 끔벅이며 제 눈치를 보았어요. 능청스럽고 뺀질뺀질한 은별이와는 달리 이 아이는 매사에 주눅이 들어있는 것 같아요.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부끄러운지 제 시선을 피하네요.

그때 요란하게 계단을 울리는 발소리와 함께 은별이가 나타났어요.

“형! 저 왔어요.”

그런데 집에 돌아온 은별이는 제 손에 들린 꽃다발이 무색해질 만큼 엄청난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제 노란 장미꽃다발이 더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닐 테고, 은별이 제 얼굴에서 손으로, 준이에게서 로저로 시선을 재빨리 옮기더니 이내 떨떠름한 얼굴을 하네요.

“형아.”

준이가 은별이에게 쪼르르 뛰어갔어요. 이제 은별이는 준이를 번쩍 안아 들 정도로 늠름해졌지만, 꽃다발 때문에 아이를 안을 수가 없었어요. 은별이는 준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로저에게 턱을 까딱해보였어요.

“오셨어요?”

“그 꽃다발은 또 여학생들이 준 거냐?”

“네.”

“은별이가 학교에서 인기가 많은가 보군.”

은별이가 떠넘기듯이 꽃다발을 제 가슴에 안겨줬어요.

“왜 날 줘?”

“형 주려고 가져온 거야. 아니면 버렸지.”

로저가 눈치도 없이 쏘아붙였어요.

“남이 준 선물을 재활용하는 거냐?”

은별이가 미간을 잔뜩 좁히며 로저를 쳐다봤어요.

“형이 꽃을 좋아하니까 가져온 것뿐이에요. 꽃은 죄가 없잖아요.”

이런 식으로 분위기가 흘러가면 둘이 식사 시간 내내 투덕거릴 확률이 크답니다. 얼른 끊어줘야 해요.

“로저, 필립 좀 불러줄래요? 아마 마당에서 고양이들과 놀고 있을 거예요. 은별아, 식탁 차리는 거 도와줘.”

“아참, 형! 모레 시간 있어?”

“모레? 왜?”

“중등부 대회 결승 있거든.”

은별이는 농구부예요. 운동 삼아 하는 줄 알았는데 중등부 결승이라니.

“중등부?”

“응. 이번 경기 끝나면 체대 진학 진지하게 생각해보려고.”

“진짜?”

로저가 주방으로 쓰윽 들어가면서 쌀쌀맞게 쏘아붙였어요.

“잘 생각해라. 지금 그 키에서 멈추면 농구 말고 플라이급 권투로 가야 할지도 모르니까.”

“또 악담이세요!”

은별이가 이를 드러내며 가릉거렸어요. 그 얼굴이 필립과 너무 닮아서 깜놀했지 뭐예요. 준이도 키들거리네요.

단란한 저녁이었어요. 전골도 맛있었고요. 로저와 은별이가 맞수도 아니면서 아옹다옹하는 것도 재미있었죠. 아직 눈치를 보기는 하지만 준이의 얼굴에서도 그늘이 없어졌어요. 고양이들도 즐거워하네요. 이런 시간이 영원히 이어지면 좋겠어요. 그런데….

필립만 어울리지 않는 청승을 떨었어요. 물만 홀짝거리면서 한숨을 포옥 쉬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 요즘 말수도 줄고, 뭔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았던 것 같아요. 믿어지나요? 필립이 생각에 잠기다니.

“아빠. 소고기가 마음에 안 들어요?”

“다이어트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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