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가끔 나는 키 130cm가 조금 넘는 하늬 초등학교 5학년 2반의 전학생으로 되돌아갈 때가 있었다. 기분이 그렇다는 게 아니다. 정말로 눈높이가 줄어든다. 잠에서 깨면 그게 꿈이라는 걸 깨닫고 두려움에서 빠르게 벗어나지만, 뭔가 그 기분이 아니면 못할 것 같은 일을 다시 하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그래서 다시 꼬마가 된 정은별은 베개를 끌어안고 루나의 방으로 가고는 했다.
그다음은 모두 전자동 시스템으로 흘러가게 되어있다. 새근거리는 루나의 숨소리부터 익숙한 가구의 위치, 시트의 감촉까지. 어느새 나는 루나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있었다. 뜨거운 커피에 설탕이 녹는 것처럼 너무나 부드러운 잠의 너울이 금세 나를 감싸준다. 그리고 찬란한 아침이 밝을 때까지 단잠에 빠지는 것이다. 그 시절 꼬마 정은별만이 누릴 수 있었던 행복이었다.
“정은별!”
“커억…?”
어? 큼직한 은회색 유리구슬이 시야를 막고 있었다. 자명종 시계인가.
“아항…. 루나 눈이구나. 왕 커.”
“정은별, 너… 네가 꼬마야? 초딩이야?”
맞다. 어젯밤 악몽에 시달리다가 이 방으로 왔었지.
“아, 형…. 나 왜 여기서 자고 있어?”
“너… 그 말 27번만 써먹으면 백 번이야.”
“설마…?”
나는 최대한 꾸물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상체를 좌우로 조금 흔들었다. 일종의 방어기제랄까, 이제 막 베개 공격이 퍼부어질 차례니까.
“이 녀석! 이 능청맞은 녀석! 키는 커다래가지고 징그럽게!”
“앗! 아파, 형!”
사실 하나도 안 아프다. 베개 따위로 맞아봤자 내 단단한 머리가 아플 리 없었다. 그런데 엄살 좀 피우면 금세 넘어가는 게 또 루나니까, 크크.
“진짜 아파?”
“웅….”
눈물을 그렁거리는 척하면 금방 울상을 하고 안아준다. 어우, 좋아. 이 맛에 내가 살지.
“그러게 왜 멀쩡한 방 놔두고 여기까지 기어 들어와…?”
“우웅….”
아, 루나 냄새. 지난 2년 3개월 동안 중독이 되어버린 냄새다. 냄새만으로도 내게 평화를 안겨주는….
짝!
“아야야….”
“또 뭐 하고 있어!”
등짝을 처맞고 나서야 정신 차리는 척하는 것도 지난 2년 3개월간 써먹은 수법. 그런데 이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침대에서 튀어나올 시간이었다.
“새벽 훈련 지각이다!”
이건 진짜였다. 곧 시합이라 농구부 훈련을 빡세게 풀가동 중이었다.
“너 때문에 형도 늦었어!”
“얼른 씻을게!”
나는 후다닥 루나의 방을 나오다가 깜빡 잊은 것이 있어서 고개를 들이밀었다.
“사랑해, 형.”
루나는 웃음이 번진 얼굴로 베개를 던졌다. 맞는 척해주는 것도 내 역할이다. 내 방으로 돌아와 러닝과 파자마를 훌훌 벗으며 욕실로 직행, 그대로 샤워기 아래에서 물을 맞았다.
언제부터 내가 그 말을 하기 시작했지?
“사랑해요, 형.”
그래. 분명 미오와 라라의 결혼식 날 밤이었다. 그날 나는 세상에서 미오가 제일 부러웠다. 아, 차라리 나도 고양이였다면 좋았을걸. 루나의 반대가 있기는 했지만, 그 누구도 두 사람, 아니 두 고양이의 엄청난 나이 차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참고로, 미오와 라라는 지금도 아주 잘 살고 있다. 덕분에 루나커피의 고양이는 필립을 포함해 총 아홉 마리가 되었다. 라라가 미오와 결혼 전 낳았던 새끼 세 마리 중 한 마리는 샘이 엄마네 집에서 기르고 있고, 나머지 두 마리가 우리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다음 해 봄 둘 사이에 얼룩 고양이 한 마리가 태어났다. 큼지막한 푸른 눈, 새하얀 털에 유독 까만 얼룩무늬를 가진 수컷으로 여간 예쁘게 생긴 놈이 아니다. 이름은 필립이 블링이라고 지어줬다.
신비롭게도 고양이들은 자기 구역과 활동 시간이 나름 정해져 있어서 마치 교통신호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뭔가 딱딱 들어맞게 생활한다. 그래서 가끔 고양이들끼리 단체로 싸움이 붙는 걸 빼면 예전보다 더 복잡해진 건 별로 없었다.
플럼버 회원들도 지난 2년간 여러 가지 일을 겪었다.
엘리아는 실종된 채 연락이 두절되었다. 아치볼트는 엘리아가 있을 법한 곳을 헤매다가 돌아왔는데, 그 후로 사람이 점점 더 이상해졌다. 그는 한동안 이렇게 주절거렸다.
“어떻게, 스무 개도 넘는 추억의 장소 중 단 한 군데에도 없을 수가 있어?”
그는 엘리아가 마음대로 나다닐 만한 상황이 아닐 거라는 로저의 설명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뭣보다 바람기가 생겨서 그동안 열 명도 넘는 여자와 사귀었다. 루나는 지구인과 되는대로 만나고 다니는 그의 행동을 맹렬히 비난했다.
워튼 씨는 나탈리가 사는 프랑스로 이주했는데, 나탈리의 남편이 세상을 떠나서 두 분은 정식으로 결혼했다. 덕분에 이민절차가 매우 수월했다고 한다. 워튼 씨는 루나가 잔소리할까 봐 그러는지 그 부분을 여러 번 반복해 설명해주었다.
희상이 형은 에릭과 함께 런던으로 건너가 동거를 시작했다. 요즘도 메일이나 전화로 자주 소식을 주고받는다. 간간이 보내주는 사진이며 영상통화로 보아 에릭의 아파트는 궁궐처럼 화려했다. 그래서인지 희상이 형도 볼 때마다 세련되어지는 것 같았다.
희상이 형이 우리 일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확실히 모른다. 로저 말로는 다 알고 있는데 모른 척하는 거라고 했다. 어쨌거나 둘은 깨를 한 말씩 볶고 사는 것 같았다.
솔직히 나는 미오만큼이나 희상이 형이 부럽다. 에릭과 희상이 형의 나이 차는 루나와 내 경우보다 거의 두 배나 더 많았다. 그런데도 둘은 저렇게 당당하게 동거를 하고, 나는 아직 내 마음을 제대로 표현조차 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필립은 언젠가부터 여자들 꼬시는 것보다 손자들과 노는 걸 더 즐거워하는 눈치였다. 그가 꾸준히 관심을 갖는 여자는 은행원 이채영 씨였다. 처음에는 그저 예뻐서 그러나보다 했는데 곧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루나의 방에 있는 사진 중에서 그녀와 닮은 얼굴을 발견했던 것이다. 바로 루나의 어머니 캐롤린 블랑슈였다. 캐롤린은 키가 크고 날씬한 스타일에 은발에 가까운 금발과 은회색 눈동자를 가진 미인이었다.
루나의 밝은 금발과 은회색 눈동자는 분명 모계에서 이어진 특징이었다. 캐롤린의 길고 우아한 목선도 루나와 많이 닮았다. 하지만 정작 루나의 얼굴은 캐롤린보다는 필립과 많이 닮아있었다. 인간이었을 때 필립은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미남이었다. 반짝거리는 금발과 새파란 눈동자 때문에 혼자서만 조명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이채영이라는 아가씨가 어딘지 캐롤린을 닮았다고 했더니 루나는 팔팔 뛰었다.
“우리 엄마가 백배는 더 예쁘거든!”
그럴 때 루나는 딱 열두 살 꼬마처럼 보인다. 무지하게 귀여워서 뽀뽀라도 해주고 싶지만 분하게도 나는 아직 그것조차 맘대로 하지 못한다.
그나저나 지구 나이로 열두 살 무렵의 루나는 인형인가 싶게 예뻤다. 밤고구마였던 내 열두 살 시절을 상기하면 달콤 쌉쌀한 커플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캐롤린이 몸져누웠을 때도 바람을 피우고 다녔다는 필립이 이제 와서 아내와 닮은 얼굴이라고 이채영을 좋아할 리는 없을 것 같지만 아무리 봐도 닮기는 닮았다.
*
“우유 줄까?”
교복을 챙겨 입고 주방으로 들어가니 루나가 아침상을 차리는 중이었다. 작년부터 내 요청에 따라 아침에는 빵을 먹기로 했다. 그동안 나도 루나커피의 빵에 길들여져서 희상이 형만큼이나 빵돌이가 되었기 때문에.
“커피, 커피.”
“커피 반, 우유 반.”
오늘도 커피 협상과 함께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오늘 아침 빵은 리크 브레드였다. 부추가 잔뜩 들어간 번인데, 채소를 잘 먹지 않는 나를 위해 루나가 개발한 것이다. 시험 삼아 가게에서 팔았더니 벌써 중독증상을 보이는 손님이 생겼다.
루나는 먹음직스럽게 거품이 이는 밀크커피를 따라주었다.
“오늘 일찍 와?”
“농구부 훈련 있는데 금요일이라 좀 일찍 끝날 거야. 자습하는 애들 있어서.”
“로저랑 준이랑 저녁에 오라고 했거든. 너 좋아하는 전골 할 거야.”
“우와. 그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찍 올게.”
“무리하지는 말고.”
내가 농구부에 들어간 것은 중학교 1학년 2학기 때였다. 1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된 후부터 단 두 달간 내 키는 무려 40cm가 자랐다. 하루 자고 나면 세상이 조금씩 낮아졌다. 발이 쑥 나오는 바람에 하룻밤 새 멀쩡한 이불이 무릎담요가 되어버리기도 했고, 바지가 짧아져서 루나 바지를 빌려 입었던 날도 있었다.
지금 내 키는 178cm니까, 루나보다 딱 1cm가 크다. 물론 앞으로는 그렇게 쑥쑥 자라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1년에 2cm 정도는 자란다고 치면 5년 후 대학생, 즉 성인이 될 때쯤에는 지금보다 10cm는 더 자라있을 것이다.
이 계산을 하면서 나는 뒷마당 벽에 분필로 줄을 그어놓고 매일 키를 재고는 했다. 그 표식을 볼 때면 지금도 감회가 새롭다. 그런데도 아직 나는 키 때문에 고민이었다. 농구선수가 되려면 키가 더 커야 하는데, 앞으로 10cm가 더 자라도 190cm가 안 되니 말이다.
“이런!”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다 보니 또 늦어버렸다. 나는 커피를 마저 마시고는 서둘러 일어났다.
“다녀올게.”
“친구들이랑 싸우지 마.”
“친구들이랑 왜 싸워. 친구 아닌 놈들이랑 싸우지.”
“친구 아닌 놈들하고도 싸우지 마.”
“나 아무 때나 쌈박질하고 다니는 그런 놈 아니야. 알면서.”
루나는 밉지 않다는 듯 눈을 흘겼다. 그 얼굴이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이내 딱딱한 표정이 되어서는 부루퉁하게 말했다.
“가요.”
“왜 그래?”
“뭘?”
“왜 갑자기 울상이야?”
“울상 아니거든. 갈게.”
“자식이, 사춘기니?”
쳇! 예쁘면 뭐해, 맘대로 뽀뽀도 못 하는데. 투덜거리며 뒷마당으로 내려오니 정자 벤치에서 미오, 블링과 해바라기 중인 필립이 보였다.
“야옹, 학교 가냐?”
“네. 일찍 올게요.”
“맘대로 해라.”
“저녁에 준이랑 로저 온대요. 메뉴가 자그마치 전골이에요.”
“야옹.”
“블링, 형아 다녀올게.”
“냐-”
블링은 아직 야옹 소리를 내지 못한다. 내가 필립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사실은 아직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이다. 생각보다 필립이 비밀을 잘 지켜주어서 뜻밖이었다.
하늬 중학교는 하늬 초등학교 바로 옆에 있고 자전거로 15분 정도 걸린다. 정문을 통과해 자전거 주차장이 있는 수돗가 근처까지 달리는데, 누군가 득달같이 쫓아오고 있었다. 그걸 돌아보는 바람에 앞을 막아서는 무리를 보지 못했다.
“야야야! 비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