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61화 (61/103)

<61화>

루나에게 전화한 사람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제주도에서 아치볼트를 무참히 버리고 혼자 도킹해버려 우리 사이에서 어느새 ‘악의 감염자’가 되어버린….

“엘리아. 정말 엘리아예요? 지금 어디예요?”

- 모르겠어…. 나 너무 무서워, 루나.

“모른다니, 무섭다니, 대체 무슨 일이에요?”

- 여기 그냥 동굴이야. 끝도 없이 동굴만 있어.

“그런데 전화는 어떻게 하는 거예요?”

- 몰라. 좌표는 안 띄워지는데 자동충전이 되는지 핸드폰이 아직도 살아있는 거야. 생각지도 못했는데 전화가 걸렸어. 그런데 그것도 너무 무서워.

우리는 루나의 휴대폰에 귀를 바짝 대고 있었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루나는 휴대폰을 로저에게 건넸다.

“엘리아. 나 로저야. 지금 뭐가 보이나?”

- 종유석이요.

“그럼 혹시 아직 제주도인가?”

- 몰라요. 그때 소용돌이에 휘말렸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동굴 안이에요. 서너 시간쯤 헤매다가 핸드폰이 살아있는 걸 발견하고 전화한 거예요.

“서너 시간이라니, 그날로부터 벌써 3주나 지났는데.”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마, 말도 안 돼. 제가 그럼 이 빌어먹을 동굴에서 3주나 있었단 말이에요? 배고프고 목도 마르지만 굶어죽을 정도는 아닌데요?

우리는 잠시 시선을 공유했다. 로저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눈치였다. 로저가 통화하는 동안 루나는 허공을 문질러 좌표를 띄웠다. 0.145, 3.134, 6.114 등등의 숫자들이 어지럽게 위아래로 스크롤되었다. 루나가 다급하게 말했다.

“어느 방향에서도 엘리아가 보이지 않아요. 지구별에 없는 거 아니에요?”

로저는 계속 통화 중이었다.

“엘리아. 계속 동굴이라면 끝이 안 보인다는 뜻인가? 어두워? 바닥에 물이 있나? 기온은? 추워, 더워?”

- 모든 게 이상해요. 칠흑같이 어두운데 앞은 보여요. 물은 없고, 추운지 더운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온화하다거나 적당하다는 뜻은 아니에요. 솔직히 말하면 전화하는 내가 정말 엘리아 폭스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대체 무슨 말이야?”

그때 엘리아가 비명을 질렀다.

- 악! 저게 뭐야! 으악! 살려줘! 안 돼!

“엘리아! 엘리아!”

전화가 끊겼다. 우리는 겁에 질린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준이까지 눈을 댕그랗게 뜨고 있었다. 필립이 기분 나쁜 침묵을 깼다.

“야옹, 살해당했나?”

“아빠! 재수 없는 소리 말아요.”

루나는 질색했지만, 로저는 음산하게 말했다.

“하지만 필립 말이 맞는 것 같지 않나…?”

나 역시 필립과 같은 생각이었다.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바로 그 상황 같다고 말이다. 루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어, 어떡해요?”

“우선 아치볼트에게 알려야겠네.”

루나가 띄워놓은 좌표의 어느 곳을 톡 건드리자 아치볼트의 얼굴이 둥실 떠올랐다. 아치볼트는 자다가 깼는지 얼굴이 부석부석했다. 머리에는 새집을 지었고 러닝셔츠 차림이었다. 장소는 주방으로, 냉장고 문을 막 열고 있었던 것 같다.

“아치볼트! 지금 엘리아한테서 전화가 왔었는데요.”

- 플럼버에서?

딴엔 농담이라고 던졌는지 아치볼트는 제가 말해놓고 요란하게 웃어댔다.

“아뇨! 아치볼트! 웃을 일이 아니에요.”

루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치볼트의 안색이 변하는가 싶더니 이내 단호한 표정이 되었다.

- 루나, 로저. 엘리아는 내가 반드시 찾을 테니 두 분은 신경 끄세요.

“네에? 아니 아치볼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신경을 끄라니.”

루나와 로저는 곤란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로저가 말했다.

“아치볼트. 엘리아가 위험하다니까. 우리가 다 함께 의논해야 할 것 같으니까….”

-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아서 그래요, 로저. 찾으면 연락할게요. 안녕.

“앗! 아치볼트!”

“아치볼트!”

로저와 루나가 목청껏 불렀지만 교신은 끊어졌다.

“무슨 일이죠?”

로저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어딘지 알 것 같다고 했지?”

“네. 무슨 뜻일까요?”

“야옹, 부부싸움 하다가 지진 내는 거 아냐?”

로저와 루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여러 가지 경우의 수에 대해 토론을 벌였지만 결국 모두 신통치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로저는 워튼 씨와 에릭에게 얘기하겠다며 준이를 데리고 돌아갔다.

겨우 조용해지자 우리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다음 날이 미오의 결혼식이라 준비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나와 필립, 고양이들은 방으로 향하는 루나를 비엔나소시지처럼 따라 들어왔다. 루나가 울적하게 말했다.

“엘리아가 살해당했는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결혼식 준비를 하다니.”

“어쩔 수 없죠, 뭐. 당장 할 일도 없잖아요.”

“아치볼트가 뭘 알고 그러는 거겠지?”

“그럼요. 둘만의 이야기가 있을 거예요. 그런데 고양이 결혼식에는 뭐가 필요해요?”

루나는 옷장을 뒤지고 있었다.

“낸들 아니? 나도 고양이 결혼식은 처음이야.”

“그냥 결혼식은요?”

“음, 그것도 처음이지.”

“그럼 지금 뭐 찾고 있어요?”

루나는 한들거리는 스카프를 찾아내 펼쳐 들었다.

“옷감. 면사포 만들어주려고.”

“우와!”

“야옹-”

필립을 위시해 고양이들이 미오를 둘러싸고 일제히 떠들어댔다.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루나는 반짇고리와 큼직한 스카프를 챙겨 들고 거실로 다시 나왔다. 이번에도 나와 고양이들은 줄줄이 그의 뒤를 따랐다. 우리는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은별이도 하려고?”

“네.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줘요.”

“그래? 좋아. 잘 봐. 일단 본격적으로 박음질하기 전에 요 시침 핀으로 고정해놔야 해. 천이 얇으니까 두 번 접어.”

“한 번, 두 번.”

“그 위에 시침 핀을 꽂는 거야.”

“이렇게요?”

“잘하네. 넌 그쪽 끝에서 시작해. 중간에 만나면 되겠다.”

“근사하다.”

“결과물도 그래야 할 텐데.”

루나와 나는 소파 양쪽 끝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고양이들이 우리 사이에 앉아 스카프 아래에서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형은 재봉틀도 잘 다룰 것 같은데, 재봉틀이 없어서 손바느질하는 거예요?”

“그보다 한 땀 한 땀 손으로 지어주고 싶어서.”

“와…. 어쩜 형은 마음도 예뻐요?”

“야옹! 정은별 꼬마. 닭살 돋는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필립이 일부러 꼬마라는 말을 해서 나를 도발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던 것이다. 시치미를 떼고 있는 내가 기막힌지 필립이 두 손, 아니 두 발로 머리를 마구 쓸어내리는 시늉을 했다. 나는 그를 향해 눈을 찡긋해보였다. 그러자 그가 카펫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멋모르는 고양이들도 아빠를 따라 데굴거렸다. 그게 너무 웃겨서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식으로 작업하던 우리는 중간에서 딱 만났다.

“오작교 같다.”

“자, 이제 본격적인 바느질이야. 한 땀씩 뜨면서 끝으로 가는 거야. 그리고 그 아래로 1mm를 똑같이 한 땀씩 뜨면서….”

“다시 중간에서 만나요!”

루나는 훗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다시 소파 끝을 향해 한 바늘씩 움직였다. 어느새 소파 양 끝에 다다르자 중간에 다시 만날 생각에 기대가 되었다.

“그런데, 고양이 면사포인데 스카프가 너무 큰 거 아니에요?”

“주름 잡아야 하니까. 조그만 아기 옷 한 벌 만드는 데도 천이 꽤 많이 필요해.”

“형은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알아요?”

루나가 내 눈치를 슬쩍 살폈다.

“비웃지 않는다면 말해주고.”

“내가 왜 형을 비웃어요?”

“실은…. 나 어릴 때 인형 옷 만드는 취미가 있었어.”

“야옹- 진짜 그때 나는 네가 딸인 줄 알았다.”

“아빠는 그즈음 두세 달에 한 번 집에 들어올까 말까 했잖아요. 그러니 내가 딸인지 아들인지 기억이나 났겠어요?”

“야옹, 암튼 말하는 거 보면 그냥 확.”

“인형 옷 만드는 취미를 갖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내 질문에 루나가 창밖의 달을 쳐다보며 말했다.

“할머니가 바느질을 좋아하셨어. 그래서 자연스럽게 배웠지. 그런데 내게는 그게 마음의 병이 될 수도 있었던 상처를 꿰매는 역할을 해줬어.”

루나는 엄마와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는 할머니가 계셨으니까 조금은 나았던 것 같아. 그때 슬퍼하는 내게 할머니가 그러셨어.”

네 마음이 슬픔 때문에 찢어졌구나. 우리 함께 꿰매볼까?

“그러면서 당신이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오래된 인형을 꺼내놓으셨지. 그 아이 옷을 만들자고 하시면서.”

“박바라 님은 역시 현명하셔.”

“아무리 어려도 그 말이 엉터리라는 것쯤은 나도 알았어. 슬픈 마음이 바느질로 나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바느질은 도움이 되었지. 지루할 정도로 규칙적인 일이었거든. 살다 보면 그런 일이 도움 될 때가 있다는 걸 알았지. 그래서 지금도…. 엇, 아빠. 슬그머니 어디 가세요? 또 밤마실 가는 건 아니죠?”

“야옹, 아니거든!”

필립은 꼬리로 물결을 만들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마도 루나가 엄마 이야기를 하니까 자리를 피하는 것 같았다. 루나가 이죽거렸다.

“흥! 양심은 있어서, 그래도 찔리기는 하는가 보다.”

미오가 면사포 아래로 기어 들어오더니 루나의 무릎 위에 올라앉았다. 루나는 미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바느질을 계속했다.

“그래서 지금도, 뭐요?”

“응? 음, 무슨 말 하려고 했더라? 아! 그래. 그래서 지금도 미오를 그 뚱보 아줌마한테 보내야 하는 마음을….”

“야옹!”

“미오가 뚱보라는 말을 알아듣나 봐요. 하지 마세요. 외모 비하는 좋지 않아요.”

“흥! 좋아, 뭐. 나도 그만하려고 했어.”

“그래서요?”

“뭐가?”

“아이참! 라라한테 보내야 하는 마음을, 뭐요?”

“아하. 라라한테 보내야 하는 마음을, 꿰매듯이 다스리려는 것이지.”

시작은 좋았는데 끝은 좀 야비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나 역시 의외로 바느질이 재미있었다.

우리는 소파 양 끝으로부터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가운데 땅’에서 만났을 때 루나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은별이가 이걸 도와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가운데 땅에서 딱 만났으면 키스를 해야 하는 건데 머리 쓰담쓰담이라니. 젠장, 두고 봐요, 루나.

아무튼 오늘은 신부의 면사포까지 만들었으니 내일의 주인공을 위해 겸허하게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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