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59화 (59/103)

<59화>

준이가 로저를 정말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형으로서 그 아이의 소망을 이뤄주고 싶었다. 사람을 좋아하고 그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는 게 어떤 건지 너무나 잘 아니까.

비록 내 연적이기는 해도 로저가 멋진 남자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눈곱만한 준이가 사람 볼 줄 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로저라면 그냥 아무것도 안 해도 준이에게 좋은 영향을 줄 것 같았다.

그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냉정한 마음으로 저울질해본 결과 로저가 혼자 사는 자유로움을 잠시 포기하는 것이 준이가 시설로 버려지는 불행을 겪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로저가 거절하면 더 이상 내가 해줄 일은 없었다. 로저가 평소의 남자다운 얼굴로 돌아와 단호한 투로 하던 말을 이었다.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어. 내가 여기 있는 한 준이를 버리는 일은 없다. 됐니?”

루나와 필립이 탄성을 터뜨리며 서로 끌어안았다.

“와악!”

“야옹!”

루나와 필립도 나만큼이나 그 대답을 고대했던 것이다. 그러니 내가 터무니없는 욕심을 낸 것은 아닐 것이다.

준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로저의 목을 꼭 끌어안는 게 어지간히 정이 든 모양이었다. 나는 부러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김준! 또 우냐? 안 운다며!”

그러자 준이가 히끅 소리를 내며 울음을 삼켰다.

“안 운다, 형아. 안 우러. 준이는 안우꼬야.”

“바보.”

“준이 바보 아냐!”

“바부팅.”

“바부팅 아냐!”

바부팅이라고 한 번 더 놀려줄 셈이었는데 루나가 내 입을 턱 막았다.

“자! 동생 좀 그만 놀려. 로저. 제가 이렇게 말할 자격은 없지만요, 정말 생각 잘하셨어요. 청승맞게 혼자 사시는 것보다는 귀여운 아가와 아빠처럼….”

“야옹, 루나. 입은 네가 막아야겠다.”

“아, 아니, 제 말은… 아이랑 살아보니까 좋은 점이 한둘이 아니라는….”

루나까지 나를 준이 또래 취급하고 있다! 그 말에 내 인상이 팍 구겨졌다. 로저의 표정도 굉장히 싸늘했기에 루나는 나와 로저를 번갈아 보다가 마른 침을 삼켰다.

“꿀꺽. 저, 저희는 이만 돌아갈게요. 내일 봬요.”

“내일부터는 육아하느라 바쁠 것 같으니 보게 될지 안 될지 모르겠군.”

“아, 네. 도움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오세요.”

“멀리 안 나가겠네.”

“네네! 은별아, 가자! 준이 안녕!”

“야옹, 안녕-”

로저는 흥, 콧소리를 내면서 이층 계단을 올랐다. 그의 어깨너머로 준이가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속없는 녀석, 내가 쌀쌀맞게 군 것도 잊었는지 촉촉한 눈망울로 날 보며 방긋거렸다.

우리는 날듯이 로저의 집을 나왔다. 미니밴에 올라타자 루나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쌕쌕…. 요새 왜 이렇게 로저한테 말실수를 하는지 모르겠네.”

“야옹, 원래도 은근히 말이 많았는데 요즘 보면 진짜 왕수다야.”

“네에? 그런 말은 420년 살면서 처음 들어요. 그렇지, 은별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준이랑 한 묶음으로 취급하려던 게 아직 기분이 상했기 때문이다. 내 굳은 표정을 살피며 루나가 중얼거렸다.

“마, 말이 좀 많아지기는 했나....”

아무튼 요란한 하루가 겨우 지나갔다. 그동안 해결된 것은 준이 문제뿐이라서 화창하던 루나커피의 하늘에는 여전히 먹구름이 낀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루나커피의 지붕 아래에 누우니 뭐든 다 잘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덕분에 아주 달콤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로저만큼 커다란 어른 남자로 자랐고 루나가 내 목에 매달려 울먹였다.

‘로저가 때려쪄, 은별아. 로저 미버.’

‘내가 때려줄게, 루나. 울지 마.’

자면서도 나는 크크크 웃었던 것 같다.

*

“정은별! 살아있어서 기쁘다.”

“다행이야. 소식 듣고 얼마나 걱정했나 몰라.”

루나커피의 문이 열리자마자 이선호와 개나리가 들이닥쳤다. 정황을 파악하려는 형사들이 이선호의 집에 방문한 모양이었다.

“네 키가 150cm만 되었어도 납치 같은 건 안 당했을 텐데.”

“이 자식이, 아침부터 재수 없게.”

루나의 하해와 같은 배려로 우리는 루나커피의 ‘로얄’석인 창가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초콜릿 아포가토를 먹었다. 모두 아침을 먹은 관계로 신중히 고른 메뉴였다.

잘도 먹는 녀석들에게 내가 쏘아붙였다.

“얼른 먹고 가라.”

“약속 있냐?”

“당연하지.”

“뻥 치지 마.”

이선호가 픽픽 웃으며 혀를 날름거렸다. 내가 주먹질하는 시늉을 했다.

“이게 아침부터 쳐들어와서, 죽을래?”

“네 키가 150cm만 되었어도 그 뻥 믿는다.”

“약속이랑 키랑 무슨 상관이야!”

개나리가 새침하게 물었다.

“여자친구?”

“뭐라고?”

“약속.”

“무슨 개소리야? 약속 있다면 그냥 있는 줄 알면 돼.”

그때 카운터에서 낭랑한 루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세, 요….”

발랄한 첫 마디와는 달리 말꼬리가 스르르 무너지는 게 이상해서 문 쪽을 돌아보니 샘이 엄마가 위풍도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루나의 말꼬리가 무너진 것은 그 아줌마가 안고 있는, 덩치 산만한 고양이 때문일 것이다. 미오의 짝, 라라.

개나리가 라라를 가리키며 외쳤다.

“와! 귀여워.”

그런데 샘이 엄마는 눈치라고는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루나의 굳은 표정에도 눈이 다 감기도록 웃으며 떠들어댔던 것이다.

“우리 라라가 미오 보고 싶어서 그러는지 밥도 잘 안 먹어요. 오늘 상견례 하기로 한 거 잊지 않으셨죠?”

순전히 식혜를 얻어먹어서는 아니겠지만 루나는 그냥 봐도 뭔가 포기한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 쪽을 보았다. 나는 얼른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은별아. 올라가서 미오 데려와.”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견례, 하려고요?”

“그래.”

나는 무심코 샘이 엄마를 돌아봤는데 샘이 엄마는 여전히 방긋거리고 있었다.

나는 루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미오를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에 번개처럼 계단을 올랐다. 층계참에서 엿듣고 있던 필립이 숨도 안 쉬고 떠들어댔다.

“야옹! 아무래도 수상해. 혹시 일일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다 허락하는 척해놓고 깽판 놓으려는 심산 아냐?”

나는 일일드라마에서 나오는 깽판이 뭐더라? 생각하며 새장 문을 열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두 배는 커진 미오가 새침하게 야옹거렸다.

“미오. 라라 왔어.”

미오의 푸른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났다. 어딘가에서 나나와 뭉크, 배리도 튀어나와 일제히 야옹거렸다.

“축하해주는 거야?”

“야옹!”

내말에 미오가 야옹거리자 필립이 야옹거렸다.

“야옹, 조용! 고집쟁이 루나가 그렇게 간단하게 마음을 바꿀 리 없어.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다. 경계심을 풀지 말도록.”

“야옹-”

나는 좀 못마땅해서 부자의 대화에 슬쩍 끼어들었다.

“필립. 루나는 고집쟁이인지는 몰라도 꿍꿍이 따위는 품지 않아요. 거짓말도 안 하고요. 아들인데도 몰라요?”

“야옹, 짝이라고 편들기는.”

“사실이 그렇….”

아뿔싸. 무심코 말을 섞던 나는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야옹! 은별이 너, 내 말 알아듣는 거야?”

“야옹.”

“뭐가 야옹이야! 네가 왜 야옹이야?”

“죄, 죄송해요.”

“언제부터 알아들은 거야?”

“루나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

“왜?”

“그냥요.”

“야옹!”

내가 말을 알아듣든 말든 미오는 그저 빨리 내려가자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야옹,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혼날 줄 알아.”

“싫어요.”

“야옹, 뭐가!”

“나중에도 안 혼날래요.”

나는 미오를 안아 들고 후다닥 거실을 빠져나왔다.

번개처럼 계단을 내려오니 마침 희상이 형과 세윤이 형도 와 있었다. 이선호와 개나리의 뒤 테이블에 루나와 샘이 엄마가 마주 앉아 있었다. 그밖에도 안면이 있는 단골손님들이 꽤 있었는데, 상견례의 분위기를 알아챈 건지 모두 루나의 테이블을 주시하며 키들거렸다.

미오와 라라는 눈이 마주치자 구슬프게 야옹거렸다. 루나가 미오를 향해 눈을 부릅뜨자 겨우 조용해졌다. 필립을 비롯한 고양이들은 재주껏 여기저기, 장식용 콘솔이나 화분, 빈 의자나 테이블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루나의 옆에 미오를 안고 앉았다.

샘이 엄마가 휴대폰을 꺼내 들고 말했다.

“우선 사진 한 장 찍어요. 기념으로!”

희상이 형이 센스 있게 나타나 샘이 엄마의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자, 상견례-”

그 말에 주변에 앉아있던 손님들이 쿡 하고 웃음을 토했다. 희상이 형은 사진을 다섯 장이나 찍은 다음 샘이 엄마에게 휴대폰을 돌려주며 자기한테도 보내달라고 소곤거렸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루나는 가느다란 눈으로 희상이 형을 쏘아보고는 낮은 어조로 말했다.

“내 눈에….”

“형! 케이크 가져올까요?”

나는 루나의 말을 중간에서 뚝 자르며 물었다. 모두 내 엄청난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나는 루나가 할 말이 뭔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일일드라마 단골 대사 말이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된다, 흙이 들어가도 안 된다, 생각해보니 흙이 안 들어가도 안 된다, 등등.

“깜짝이야. 좀 있다가. 우선 이 얘기부터 끝내고.”

달콤한 케이크를 먹으면 기분이 좀 좋아질 것 같은데 영 넘어갈 분위기가 아니었다.

“내 눈에….”

내 앞에 앉은 필립의 꼬리가 꼬물거렸다. 후우, 나는 필립의 푸른 눈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그른 것 같아요.

“…는 마냥 어린아이인 미오가 벌써 아이 아빠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네요.”

응…?

시무룩하던 미오와 라라도 귀와 꼬리를 쫑긋 세웠다. 루나는 눈을 내리깔고 말을 이었다.

“어쩌겠어요. 둘이 이렇게 좋아 죽으니, 샘이 엄마 님 말씀대로 결혼시키도록 하죠.”

“우와!”

가게 안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쳤다. 미오와 라라는 마냥 좋은지 요란하게 야옹거렸지만 박수 소리에 묻혀버렸다. 루나는 새침하게 홀 안을 훑어보고는 다시 눈을 깔았다. 소란이 잦아들자 그가 말했다.

“결혼식 장소는 저희 집 뒷마당이 좋을 것 같네요. 하객은 최소한으로 잡도록 하고, 괜찮으시면 신혼 방은 저희 집에 꾸밀게요. 혼수는 필요 없고요, 그냥 원래 쓰던 먹이 그릇에 사료 좀 더 부으면 되니까요.”

와하하, 웃음소리가 터졌다. 샘이 엄마도 정신없이 웃었다. 알바생도, 손님들도 박장대소했다. 루나와 나만 웃지 않았다.

아무래도 루나가 드라마에 지나치게 몰입한 것 같아 나는 기분이 좀 좋지 않았다. 드라마는 결국 해피엔딩이기는 하지만 과정이 지나치게 길었다. 이쯤이면 좀 이뤄져도 될 것 같은 타이밍에 뭔가 이물질이 튀어나와 둘 사이를 갈라놓고 끈질기게 지지고 볶았다. 드라마에 깊게도 몰입한 루나를 보니, 꼭 그게 루나와 내 얘기도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영 기분이 싸했던 것이다.

아무튼 오늘의 주인공은 미오와 라라이니 손바닥이 터져라 박수를 쳐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