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57화 (57/103)

<57화>

우리는 광활한 우주를 헤매는 외계인이다. 진짜로.

“경찰이 왔다.”

필립의 이 말을 시작으로 로저네 집 거실은 초신성 폭발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혼돈의 우주가 되고 말았다.

“숨어!”

“숨겨!”

로저가 준이를 안고 사라졌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돌아왔다.

“준이를 숨길 필요는 없잖아.”

“그렇죠.”

로저와 루나가 짧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아치볼트가 사라졌다. 로저가 내게 준이를 떠넘기며 말했다.

“준이는 은별이가 데리고 있어라. 내가 데리고 있으면 좀 이상해보일 것 같으니.”

“알겠어요.”

그러는 동안 루나는 에릭과 입씨름을 했다.

“어서 가시라니까요. 에릭이 여기 있으면 쓸데없이 추궁당하잖아요.”

“이제 난 여기 사람이 될 텐데.”

“지금 당장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알았어. 그럼 잠깐 루나커피로 피신해있을게. 좌표를 쓰는 것보다는 순간이동이 낫잖아.”

“이참에 런던으로 가시면 안 되나요?”

“루나. 그때 케이크 자르면서 우리를 축복한다고 하지 않았나?”

“축복이라는 말은 쓴 적 없는데요.”

로저가 두 사람의 입씨름을 중재했다.

“그만! 지금 둘이 다툴 때인가? 에릭, 어서 가.”

에릭이 뭐라 투덜거리며 사라졌다. 다 된 줄 알았는데 워튼 씨가 남아있었다.

“워튼 씨, 왜 안 가셨어요?”

“나도 잠깐 루나커피에 있는 게 좋겠어. 나이가 들어서인지 좌표로 왔다 갔다 하는 게 점점 부정확해지더라고.”

“그럼 그러세요. 뭐가 됐든 빨리요.”

잠시 멈췄던 초인종 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다분히 신경질적이었다. 황급히 워튼 씨가 사라졌고, 로저가 인터폰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이었다.

“히힝-”

놀란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던 우리는 동시에 외쳤다.

“저게 무슨 소리지?”

사라졌던 아치볼트가 계단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다락에 이상한 놈이 있는데?”

루나가 물었다.

“설마 유니콘은 아니죠?”

“정확히 그거야.”

“헐!”

로저가 사라지면서 외쳤다.

“문 열어줘. 금방 올게.”

로저와 아치볼트가 사라졌고 루나가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 보인 사람은 박 형사와 조 형사였다. 루나는 둘의 얼굴을 알지만 시간을 끌려는 심산인지 일부러 물어보았다.

“누구세요?”

- 로저 디비 선생님 댁이죠? 서부경찰서에서 나왔습니다. 잠깐 실례 좀 하겠습니다.“

루나가 문 열리는 버튼을 눌렀을 때 로저가 쌕쌕거리며 나타났다. 나와 루나는 각자 준이와 필립을 끌어안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헉!”

그때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은 루나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재빨리 탁자 위의 찻잔과 접시 세 개를 순간이동 시켰다. 주방 쪽에서 와그르르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박 형사와 조 형사가 들어왔다.

연식이 오래된 집이 대부분 그렇듯 현관문을 열자마자 거실이 눈에 확 들어오는 구조였다. 현관에 들어선 두 형사는 우리를 보자 이게 뭐지? 하는 얼굴로 말했다.

“루나 사장님 아니십니까? 여기는 웬일이세요?”

“친구 집에 놀러 오는 것도 불법이에요?”

조 형사가 루나와 로저를 번갈아 보았다.

“이분과 우월영 씨가 친구라고요? 두 분이 나이 차가 좀 날 텐데요.”

박 형사가 그 말을 받았다.

“에이. 서양 사람들은 나이 상관없이 친구 먹잖아. 영화도 못 봤어?”

“그런가. 그런데 로저 디비 씨는 나이가 몇이세요?”

조 형사의 질문에 로저가 싸늘하게 답했다.

“디비가 아니라 드뷔입니다.”

“아, 더부이.”

박 형사가 지적했다.

“바보야. 불어잖아.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뷔.”

“부이.”

로저가 좀 전보다 더 싸늘하게 말했다.

“그만 앉으시죠.”

“아 네.”

두 형사는 뻘쭘한 듯 머리를 뒤적이며 우리 맞은편에 앉았다. 로저는 1인용 소파에 다소 거만한 태도로 다리를 꼬고 앉았다.

박 형사가 나를 보며 알은체를 했다.

“꼬마야. 얼굴은 괜찮니? 많이 부었는데.”

“저 꼬마 아닌데요.”

“히야, 그래도 대단한 꼬마 아닙니까? 전 지금 병원에 있을 줄 알았는데.”

“꼬마 아니라고요.”

씨발, 이 짭새가! 루나 앞에서 나보고 자꾸 꼬마래!

“그런데 형사님들이 저희 집에는 어쩐 일이신가요?”

로저의 지적에 잡담으로 느슨해져 있던 두 형사의 표정이 이내 경직되었다. 박 형사가 나와 루나를 쓰윽 보면서 말했다.

“납치 사건과는 상관없이 로저 디비 님께 여쭤볼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만, 두 분도 계시니 더 잘 된 것 같네요.”

조 형사가 바통을 이어받은 듯 물었다. 두 형사는 그런 식으로 주거니 받거니 질문을 던졌다. 쿵짝이 잘 맞는 짝꿍 같았다.

“실례되는 질문일 수도 있는데 불쾌하게 생각지 말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로저가 냉랭하게 말했다.

“야심한 시각에 불쑥 오셔서 실례되는 질문을 하시면 불쾌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만, 어디 말씀해보시죠.”

“로저 디비 님도 그렇고 루나 사장님도 그렇고, 친인척이 한 분도 안 계시나요?”

“그렇다면 왜요. 그게 법에 걸립니까?”

“이 집에서 혼자 사시는 겁니까?”

로저가 한층 더 냉랭한 투로 답했다.

“그렇습니다만. 분명 은별이 납치 사건과는 상관이 없다고 하셨는데, 제가 형사님들 질문에 대답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두 형사가 과장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 이거,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 저희는 김병찬과 권미옥을 뒤쫓다가 우연히 루나커피를 알게 됐는데, 누가 봐도 호기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터라….”

로저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며 잘생긴 눈썹을 쫙 올렸다.

“단순히 호기심으로 일반인의 사생활을 헤집고 다니다니 당신들 제정신입니까?”

두 형사의 얼굴이 뻣뻣이 굳었다. 로저의 박력을 익히 알고 있는 우리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지만 두 형사는 당황한 것 같았다. 두 형사가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그러게 내가 그랬잖아. 루나 사장님도 일전에 화내셨다고….”

“이분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로저가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그 얼굴은 로저를 들었다 놨다 하는 내가 봐도 좀 무서웠다.

“사건 수사에 필요한 정보라면 대답해드리지요. 아니면 고소당하기 전에 당장 나가세요. 남이야 혼자서 살든 땅을 파든 상관 마시고요!”

“헉! 네!”

두 형사가 동시에 일어났다. 앞을 다투어 나가려던 두 사람은 약속한 듯 신발에 발을 끼우다가 돌아보았다. 박 형사가 대뜸 말했다.

“김병찬이 구치소에서도 계속 헛소리를 하던데, 이태리 사람처럼 잘생긴 남자가 갑자기 차에 나타나서 자길 때렸다고요.”

로저는 미간을 잔뜩 좁혔다.

“뭐가 어쨌다고요? 지금 우리 집에 와서 이탈리아인을 찾는 겁니까? 이미 알아봤겠지만 저는 고향이 벨기에입니다.”

“벨기에 분이 왜 이름은 프랑스어예요?”

“야옹, 바보.”

박 형사가 조 형사의 등을 툭 치고는 면박을 주었다.

“야! 벨기에도 불어 쓰잖아.”

“시, 실례했습니다!”

“꼬마야. 네 이모랑 이모부는 실형을 살게 될 거야. 납치는 미수라도 중형이라서 최하 10년형이고, 도박 재범도 2년 이상이란다.”

“저 꼬마 아니라고 몇 번 말해요? 그리고 폭행죄도 빼면 안 돼요.”

“어어, 그래!”

잠자코 있던 루나가 말했다.

“형사님들.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자꾸 이러시니 저희도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언론사에 제보라도 하겠어요. 경찰이 단순 호기심으로 일반인을 뒷조사하고 밤에 무대포로 찾아와 취조까지 한다고요.”

그 말에 급기야 혼비백산한 두 형사는 넘어질 것처럼 서둘러 문을 나서며 횡설수설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생각이 짧았어요.”

그때 이층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히힝-”

막 나가려던 두 형사가 귀를 쫑긋 세웠다. 순간 기분 나쁜 정적이 흘렀다. 그때 루나 무릎 위에 앉아있던 필립이 준이의 다리를 꽉 물었다. 준이가 자지러질 듯이 울어 젖혔다. 느닷없는 아이 울음소리에 깜짝 놀란 두 형사는 다시 부산하게 움직였다.

“어서 나가자, 어서!”

겨우 문이 닫히자 로저 앞에 좌표가 나타났다. 두 형사가 대문을 열고 나가는 모습이 보였고, 대문이 닫히자 좌표도 닫혔다. 루나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로저, 어쩌죠? 느낌이 안 좋아요.”

“나도 그래. 이 정도 호통으로 물러날 것 같지 않아. 아마도 우리가 반발할 것을 알면서도 와본 것 같아. 뭐라도 캐려는 심산이었겠지. 아무래도 뭔가 냄새를 맡은 모양인데….”

그때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로저에게 물었다.

“그거, 형사들한테 사용하면 안 돼요?”

“뭐 말이냐?”

“애스터코드요. 한새 엄마한테 사용했던 거요.”

로저는 심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 여자는 심적으로 굉장히 불안하고 허약한 상태였어. 뇌가 유니콘만큼이나 단순했고. 게다가 지금 이 일에는 저 형사들만 연루된 게 아니잖아. 아직 검증도 안 된 방법을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사용할 수는 없어.”

“참, 유니콘은 어떻게 된 거예요?”

“아…. 오늘 내가 벌새를 잡아서 애스터코드 노래를 주입했거든. 아마 그 코드가 먹혔나 봐.”

“어떤 코드였는데요?”

내가 묻자 로저가 당당하게 말했다.

“유니콘, 나랑 놀자.”

“헐….”

“왜?”

“하필이면 덩치 큰 유니콘을 불러내요? 다른 애는 없었어요?”

내 말에 로저의 당당한 표정이 무너지자 루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웃음을 참는 게 분명했다.

“야옹, 천재들이 저런 실수를 곧잘 하지.”

유니콘이라는 말을 듣자 준이가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형아, 유니콘.”

“네 장난감이 아니야.”

그러자 로저가 준이를 안아 들었다.

“한번 태워줘야겠다. 꼬마도 탈래?”

“진짜 이럴 거예요?”

“뭘?”

“꼬마 아니라고요.”

“자식, 알았어. 정은별.”

내가 발끈하는 게 마음에 쏙 드는지 로저는 빙긋 웃으며 사라졌다. 루나가 말했다.

“은별이 너도 타고 싶으면 올라가.”

“내가 준이 또래인 줄 알아요? 그딴 거 하나도 안 타고 싶어요.”

“으응, 그래.”

다락에서 쿵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히힝, 와악, 깔깔 등의 소음이 울리더니, 잠시 후 울음소리와 함께 로저와 준이가 나타났다.

“준이, 뚝!”

내 으름장에 준이가 훌쩍거리며 로저의 목을 끌어안았다. 루나가 물었다.

“준이 왜 울어요?”

“유니콘을 돌려보냈거든. 유니콘이 지난번 그 벌새의 뇌파에 작동하는 울음소리를 내게끔 하는 방법으로 말이야.”

“그 벌새가 플럼버로 돌아갔어요?”

“벌새는 몸집이 작으니까 교신 없이도 좌표를 건넜어.”

“그럼 성공한 거네요?”

“그렇지. 이런 식이면 연구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그런데 준이는, 어떡하죠?”

루나의 말에 준이가 움찔했다. 녀석도 눈칫밥깨나 먹어서 즉시 위기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김병찬이 10년 이상 형을 받는다잖아요.”

“야옹, 로저가 키워.”

필립의 말에 로저가 한숨을 쉬었다.

“은별이 나이 정도만 됐어도 내 일 도우면서 함께 사는 것도 괜찮을 텐데, 이 코흘리개를 내가 무슨 수로 몇 년씩이나 키우겠나. 안 그런가, 루나?”

루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데려가자, 은별아.”

“안 돼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준이가 동요하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서 더 강조했다.

“형이 무슨 신이에요? 그러면 염치없어서 나까지 루나커피에 더 못 있어요.”

완강한 내 말투에 로저와 루나는 물론이고 필립까지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로저가 말했다.

“다들 그만 돌아가서 쉬게. 준이 문제는 내가 좋은 방법을 찾아볼 테니.”

“잠만여….”

옹알이 같은 그 말은 준이의 입에서 나왔다. 준이는 로저의 품에서 빠져나가더니 소파 아래로 기어 나와 나름 다소곳한 태도로 섰다. 그 아이 입에서 나온 말은 정말 뜻밖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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