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악이라는 것에는 밑바닥이 없는 걸까요?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일까요?
은별이가 납치됐다는 필립의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어요. 다행히 로저가 오는 바람에 섣부른 짓을 하지 않을 수 있었지요. 로저가 아니었으면 그 훤한 대낮에 순간이동을 하고 말았을 거예요.
로저는 자기가 갈 테니 저더러 은별이에게 전화를 걸어 시간을 끌라고 했고, 우리는 미니밴을 타고 문제의 장소로 향했어요.
로저가 혼자 봉고차 안으로 순간 이동했고 저는 미니밴에서 전화를 걸었어요. 그 사이 희상이가 경찰에 신고했고, 에릭은 좌표를 보며 상황을 캐치하고 있었어요. 그 모든 것을 하는 데에는 10분도 걸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10분이 제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이었어요. 그 미친놈이 한순간 저지를 수 있는 온갖 만행이 제 머릿속을 휩쓸고 지나갔어요. 로저가 이미 차 안에 대기 중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죠.
납치범을 손쉽게 제압하거나 은별이를 꺼내올 수 있는 다른 방법도 있었지만 이렇게 한 이유는 로저의 설득 때문이었어요. 납치의 증거를 잡아야 한다는 거예요. 이렇게 된 이상 제대로 형벌을 받게 해야 한다고 말이죠. 그것도 필요하지만, 그러다 은별이가 다칠까 봐 저는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어요.
‘로저는 뭐 하는 거야? 언제까지 기다릴 셈이지?’
그 자식이 낫에 묶여있는 동안 로저는 자신이 등장한 3초의 시간을 지우고 재빨리 사라졌어요. 이모부라는 놈의 기억은 일부러 안 지운 것 같았어요. 확 돌게 하려고 그랬겠죠?
은별이가 손발이 묶인 채 좌석 구석에 처박힌 모습을 보니 그 자리에서 이모부라는 놈을 죽여 버리고 싶었어요. 믿어지나요?
- 야옹.
“죽여 버리고 싶었다고요.”
- 야옹.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껍데기를 홀랑 벗겨가지고 그 더러운 거죽은 악어 떼한테 던져주고, 냄새나는 살덩어리는 피라냐 떼한테 던져주고, 역겨운 뼈다귀는 흰개미 떼한테 던져주겠어요!”
- 야옹.
저는 지금 병원에서 필립과 통화 중이랍니다. 덩치가 산만 한 남자한테 두들겨 맞았으니 혹시 은별이가 응급수술이라도 받고 있느냐고요? 천만에요.
얼굴은 드래곤 프루츠가 되었는데도 애가 말짱할 뿐 아니라 뭐 하러 왔느냐, 경찰에 신고만 하지 그랬냐, 잔소리까지 하는데 제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어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우유나 하나 달라는 은별이를 정밀검사까지 해달라고 집어넣은 후 병원 휴게실에서 기다리는 중이랍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분노가 끓어올랐어요. 갑자기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악인으로 보였어요. 이 지구인들 머릿속에 뭐가 들었을까 궁금해졌어요.
그러자 로저가 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미개인들한테 뭐 하러 매너를 지키나, 리딩을 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악행을 사전에 알아채고 방지할 수 있으면 그게 선 아닌가? 지난번 그 여자가 유괴범인 줄도 모르고 정성껏 구운 빵을 대접했던 나는 바보일 뿐 아니라 다른 범죄를 도운 셈이 아닌가?
머리가 좀 헤까닥한 저는 미친 듯이 리딩을 했어요. 그때 제 앞을 알짱거리던 사람들은 죄다 뇌를 스캔 당했어요. 환자, 보호자, 의사, 간호사, 택배기사, 청소부, 몽땅 다요.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몹시 미안했지만, 그 당시의 저는 증오에 사로잡힌 한 마리의 짐승이었답니다.
저의 이글거리는 눈을 본 사람들이 슬슬 피했어요.
- 야옹?
결과는 어땠냐고요?
“어우 씨…. 눈 아퍼.”
괜한 짓을 했네요. 눈만 아픈 게 아니라 마음도 아파졌어요. 적어도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에 은별이 이모부 같은 인간은 없었어요. 그들 대부분은 그냥 걱정이 많을 뿐이었어요.
그때 간호사가 저를 불렀어요. 진료실로 들어가자 의사가 혀를 내두르네요.
“깜짝 놀랐습니다. 애가 운동이라도 했습니까?”
“네?”
“그 정도 맞았으면 애들은 물론이고 어른도 며칠 앓아누울 것 같은데 애가 멀쩡해서요.”
“그래요? 정말 아무렇지 않나요?”
“정밀검사 결과도 바로 나왔어요. 한 석 달 지켜봐야겠지만, 장기는 물론 뼈에도 지금으로서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다행이네요.”
“얼굴은 많이 부었으니 냉찜질 자주 해주시고, 혹시 머리 아프다고 하면 처방해준 진통제 먹이세요.”
은별이는 주사실이라는 곳에 누워있었어요. 간호사가 링거를 다 맞으면 돌아가도 된다고 말해줬어요.
커튼을 열고 제가 들어서자 은별이가 부은 눈으로 올려다봤어요.
“미안해요.”
“뭐가?”
은별이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허공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입술을 파르르 떨었어요.
“또 밤고구마 돼서요.”
이런 녀석이라니, 어떻게 귀여워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아무 이상 없다니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안 그랬으면?”
“그 새끼는 경찰에 잡혀가기 전에 내 손에 죽었어.”
은별이의 찌부러진 눈이 제법 커졌어요.
“와! 형이 욕했어.”
“이까짓 게 뭘 욕이야. 씨발 존나 개새끼, 이 정도가 욕이지.”
은별이 하하 웃다가 이내 얼굴을 찡그렸어요.
“아야야….”
“뭐야. 아무 이상 없다더니, 그 의사 돌팔이 아냐?”
“우와…. 이제 형이 지구인처럼 보여.”
“지구인도 다른 별 사람들한테는 외계인이지, 뭘.”
“그런가?”
“우린 다 어딘가에서는 외계인이야.”
“나도요? 나도 외계인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래. 우리는 모두 광활한 우주를 헤매는 외계인이지.”
은별이의 눈이 반짝 빛을 내네요. 퉁퉁 부은 눈두덩도 별처럼 영롱한 눈동자는 감추지 못하네요.
은별이는 제가 한 말을 또박또박 되뇌었어요.
“우리는 모두 광활한 우주를 헤매는 외계인.”
그 말은 저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어요. 요즘처럼 제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다고 느꼈던 적이 없어요. 정작 어린아이일 때도 그런 생각은 안 했던 것 같은데 말이죠.
지구별에 떨어진 후…. 이 말을 은별이가 들으면 고민하겠지만, 은별이가 루나커피에 온 후로 저는 거의 매일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새로운 감정을 느껴요. 넓디넓은 은하계보다도 저 자신, 루나 블랑슈라는 한 인간이 오히려 더 드넓은 우주처럼 느껴지는 요즘이에요. 제 안에 이토록 낯선 생각과 낯선 감정이 숨어있을 줄은 상상도 해본 적 없거든요.
은별이가 벌떡 일어났어요.
“얼른 가요.”
“링거 아직 다 안 들어갔어.”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왜 이렇게 서둘러?”
“루나커피에 가고 싶어서.”
제가 말릴 새도 없이 은별이는 야무지게 주삿바늘을 뽑아버리고 저를 와락 끌어안았어요.
“저에게 우주는 루나커피예요. 다른 우주는 알 필요도 없어요.”
저도 은별이를 꼭 끌어안았어요.
짐승 같은 어른들 틈에서 이 아이는 살아남았어요. 그저 생명을 지켰다는 뜻이 아니에요. 좀비 같은 그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으로 살아남았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은별이가 저를 안아주는 순간 제게도 그 의지가 전해졌어요.
그런 사람들 때문에 자신을 훼손시키지 말아요.
아이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요. 저 자신을 지키라고 말이죠.
우리는 미니밴을 타고 루나커피로 돌아왔어요. 필립과 고양이들이 요란하게 야옹거렸어요.
희상이와 세윤이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근무시간도 끝났는데 말이죠. 그 애들은 진심으로 은별이를 걱정해줬어요. 고마운 일이죠. 루나커피에는 이토록 좋은 사람들이 많은데 말이죠.
그런데….
“정말 다행이다! 은별이 어떻게 됐을까 봐 얼마나 가슴 졸였나 몰라요!”
희상이는 두 손을 가슴에 대고 기뻐했어요. 거기까지는 참 좋았는데 말이죠. 희상이가 은별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자연스럽게 에릭의 팔짱을 끼는 게 아니겠어요?
“은별이, 얼른 나아라. 그럼 우리는 가볼게.”
에릭이 멋진 포즈로 손을 흔들었어요. 다정하게 가게를 나서는 300살 나이 차 커플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입술이 좀 비틀렸답니다. 은별이도 불만을 토로했어요.
“형! 희상이 형이 자꾸만 내 머리를 쓰다듬어요.”
“그러게. 지가 늙었으면 얼마나 늙었다고.”
세윤이는 우리가 투덜거리는 걸 듣지 못했는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며 엉뚱한 말을 했어요.
“둘이 진짜 잘 어울리지 않아요?”
*
다음 날 저녁, 우리는 로저의 집에 모였답니다.
은별이는 데려오지 않으려 했는데 이 눈치 빠른 어린이는 회의의 안건을 이미 알고 있지 뭐예요.
“저 때문이잖아요. 저도 알아야죠.”
“너 때문이 아냐.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어.”
“저 때문에 빨리 온 거죠.”
그래서 할 수 없이 은별이도 데리고 로저네 집으로 갔어요.
에릭과 워튼 씨, 아치볼트는 먼저 와 있었어요. 그나저나 이제 로저는 준이를 떼어놓고 생각하기 힘들 것 같아요. 어쩜 저렇게 아이 업은 모습이 잘 어울릴까요?
아니, 사실 어울리는 건 아니에요. 너무 안 어울려서 어울린다는 뜻이에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안 그럴 것 같은 사람이 용케도 저걸 하고 있으니까요. 뭣보다 준이가 로저를 무척 잘 따르는 것 같아요. 은별이도 그게 신기하다고 했어요. 준이는 낯가림이 심한 아이라면서 말이죠.
우리는 거실에 모여 앉았어요. 저는 가게에서 가져온 샌드위치와 레몬 크림 파이를 내놨고, 요리에 젬병인 로저는 티백 홍차를 내놓았어요. 심지어 손님들이 티백 포장을 까서 잔에 담그는 일까지 직접 해야 했죠. 저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접대 태도예요.
그렇잖아도 에릭이 고개를 저으며 투덜거렸어요.
“차 맛이 끔찍하군.”
“닥치고 마셔.”
로저가 쌀쌀맞게 응수하며 에릭의 찻잔에 더운물을 더 부었어요. 하긴 지금 차 맛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죠.
“아침에 경찰서에 다녀왔는데요.”
제가 오전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어요. 박 형사의 전화를 받고 경찰서에 갔더니 조서라는 것을 꾸미는 데 협조 바란다고 하더군요.
“실수하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답니다. 다행히 로저가 일러준 대로 했기 때문에 제가 김병찬이 있는 봉고차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낸 경위에 대해 경찰이 수상쩍게 생각하는 부분은 없었어요.”
“그럼 뭐, 별 문제 없겠지.”
아치볼트의 말이었어요. 아, 김병찬은 은별이를 납치했던 놈의 이름이랍니다. 옆에 앉은 워튼 씨가 고개를 저었어요.
“이것저것 캐다 보면 우리에 대해서도 알려고 할지 몰라. 그러면 뭐가 됐든 낌새를 알아챌 거라고.”
“워튼 씨 말이 맞아요. 당장에 로저만 해도 그래요. 특별한 직업도 없이 사는 것도 그렇고….”
“루나. 잊었나 본데 내 직업은 소설가야.”
에릭이 중얼거렸어요.
“정확히 말하면, BL 소설가지.”
“지금 남의 직업을 폄하하는 건가, 에릭? 자네는 레알 무직이잖아.”
“나는 사랑꾼일세.”
“미치겠군.”
준이와 나란히 앉아서 눈사람 쿠키만 오독오독 씹던 은별이가 말했어요.
“경찰이고 뭐고 몽땅 다 리딩을 해서 사전에 작전을 짜요.”
“야옹”
“좋은 생각이군!”
“제법인데!”
아치볼트와 에릭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어요. 저도 턱을 살짝 올리고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런 저를 로저가 유심히 보며 물었어요.
“그건 무슨 뜻인가?”
“뭐,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고요.”
“루나가 철들었군.”
워튼 씨가 장난스럽게 말했어요. 장단을 맞추며 야옹거리던 필립이 털을 바짝 세웠어요.
“경찰이 왔다.”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정적이 흘렀어요. 준이가 재채기를 하는 것과 동시에 로저가 말했어요.
“다들 숨어요.”
우리는 일제히 쇳소리를 내뱉고는 벌떡 일어났어요. 그리고 다 같이 말했어요. 누구의 말인지도 모를 정도로 헷갈리는 상황이었어요.
“난 다락에서 뛰어내릴게요.”
“나도.”
“우리도 숨어야 할까요?”
“누가 숨고 누가 뛰어내려야 해?”
“야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