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오늘 같이 자면 안 돼요?”
은별이는 아마 모를 거예요. 제가 얼마나 은별이를 데리고 자고 싶은지.
상처 없이 말끔해진 은별이 얼굴은 깨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답니다. 휴대폰에 저장한 이름은 완전 제 진심을 반영한 것이에요. 그놈의 네임만 아니면 저 귀여운 녀석을 매일 데리고 잤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그럴 수가 없답니다. 차라리 은별이가 준이만큼 어린아이였다면 또 모르겠어요. 준이만 할 때 은별이를 알게 되었다면 지금쯤 은별이가 저를 친형처럼 생각했겠죠.
그런데 은별이는 몸집만 작을 뿐 속이 말짱한 아이예요. 그걸 모를 정도로 저도 눈치가 없지는 않거든요. 그런 아이를 제 맘껏 둥기둥기할 수는 없잖아요. 가끔 드라마를 보거나 여럿이 있을 때는 제 욕심껏 안아보곤 하지만 말이에요.
이렇게 개인적인 공간인 침실에 은별이를 들일 수는 없어요. 제 약지에 ‘재미있는 문구점표 젤리 반지’를 끼워주는 조숙한 아이를 말이죠.
“안 돼. 가서 자.”
아시다시피 은별이가 같이 자자고 조르는 게 한두 번이 아니죠. 평소엔 이렇게 안 된다고 하면 두말없이 물러나곤 했는데요, 오늘은 다른 반응을 보이네요.
“형 어릴 때 얘기 듣고 싶어요.”
“나 어릴 때?”
“네. 형은 나만 할 때 어땠어요?”
“너만 할 때…?”
조금 울적해지네요. 은별이만 할 때라, 그맘때 저는 좀 우울했어요. 제 인생 최고로 슬픈 일을 겪었거든요. 400살 때까지만 해도 입에 올리기 싫을 만큼 슬펐죠.
“그래. 이젠 얘기할 만큼 극복한 것 같아.”
“뭘요?”
“음, 사람은 상처를 입으면 온통 그…. 가만, 너 누가 들어오랬어? 아니아니, 언제 침대에 올라가 있는 거야?”
잠깐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요 녀석이 제 침대에 올라가 편안하게 앉아있네요.
“아이참, 사람은 상처를 입으면 온통 뭐요? 궁금해요!”
“허! 요게 아주 고단수야.”
“얼른얼른.”
팔다리를 흔들며 재롱을 떠니 웃음이 새어 나오네요. 이렇게 귀여우면 어쩔 수 없지요.
“너, 오늘만이야.”
“알겠어요. 어서 올라와요.”
‘오늘만’이라는 말은 좋은 말인 것 같아요. 뭔가 말려든 기분이지만 오늘만이니까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저도 침대로 올라가 은별이와 나란히 다리를 뻗고 앉았어요. 은별이가 샛별 같은 눈을 빛내며 나를 올려다봤어요.
그러고 보니 은별이 얼굴이 정말 밝아졌어요. 이제는 그늘 한 점 찾아볼 수 없답니다. 어느새 저는 그 얼굴을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너만 할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
“오….”
“지구 시간으로 한 2년쯤 병치레를 하셨어. 말년에는 우울증도 심하셨고.”
그때도 할머니가 루나커피를 경영하고 있었고, 엄마는 커피숍 일 돕는 걸 좋아하셨어요. 병이 든 후에도 엄마는 조금이나마 몸이 괜찮을 때면 루나커피에 나오고 싶어 하시곤 했죠. 병색이 완연해진 후부터 스스로 자제하셨지만요. 그때는 루나커피에도 나가지 못하고 뒷마당 정자에 앉아서 꽃들을 바라보곤 하셨죠. 그러다가 제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환하게 웃으셨어요.
“돌아가실 때도 환하게 웃으셨어. 숨이 멈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지만 난 그게 미소라는 걸 알았지.”
은별이의 까만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드네요. 저는 아이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서둘러 말을 이었어요.
“플럼버에서는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모든 생물은 다시 태어난다는 윤회설은 플럼버에서는 설이 아니라 과학적 근거에 의한 사실이거든.”
은별이는 고개를 저었어요. 저는 그게 무슨 뜻일까 궁금했어요.
“지구에서는 미신일 뿐이에요.”
“그래. 하지만 그 생각이 큰 위로가 되는 건 사실이야. 마지막이 아니라는 거, 돌고 돌아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믿음 말이야.”
“그게 언젠데요?”
“음…. 그건 형아도 몰라.”
“칫. 그럼 소용없는 거잖아요. 내가 죽은 다음에 그 사람이 태어날 수도 있고,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수도 있고요. 아무튼 전 막막한 건 싫어요.”
흠. 그 말도 일리는 있어요. 그리고 은별이와 저는 상황이 다르니까요. 조금 메마른 마음이라 해도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서 섣부른 설교는 하지 않았답니다.
게다가 저도 아직은 청춘이니까요. 누군가에게 훈계할 만큼 엄청 어른이라고 할 나이는 아니니 말이죠. 플럼버 기준으로 말이에요.
“엄마가 돌아가신 후부터 나도 루나커피 일을 돕기 시작했어. 다행이라고 할까, 엄마처럼 나도 가게 일이 적성에 잘 맞았어. 아마 루나커피가 없었다면 더 오래 슬퍼했을지도 몰라. 루나커피 일이 내게는 숙명처럼 여겨졌고, 매일 할 일이 있다는 게 축복 같았어. 그 사명감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지금과는 좀 다른 사람이 되었을 거야. 더 좋아졌을지 나빠졌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지금이 형의 가장 좋은 모습일 거예요.”
“왜?”
“루나커피처럼 훌륭한 장소는 없고, 루나커피에 형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오…. 아무래도 이 아이는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을 타고난 것 같아요.
“히히. 감동 받았죠?”
애는 애인가 봐요. 히죽거리는 게 영락없는 개구쟁이네요.
“그럼, 형은 첫사랑 있어요?”
“응…?”
“첫사랑이요. 그냥 편하게 말해 봐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형 나이에는 그런 거 하나쯤 있을 수 있는 거잖아요. 나 그렇게 쪼잔한 놈 아니거든요. 어떤 놈이에요?”
“헐…. 뭐라는 거야?”
이럴 때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마냥 웃을 수도 없고. 팔짱을 끼고 여유 있는 척 어른 행세를 하는 폼이 앙증맞네요. 결국 참기 힘들어 웃어버렸어요.
“왜 웃어요!”
“흠흠, 제대로 웃겨놓고 왜 웃냐고 하니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만, 좋아. 말해줄게.”
초롱초롱한 눈이 내 얼굴을 뚫어버릴 것 같네요.
“실은, 없었어.”
“왁!”
“왁은 뭐야?”
“거짓말이죠?”
“뭐 하러 그런 거짓말을 해? 네 말마따나 이 나이에 첫사랑 한번 못해봐서 창피한데.”
갑자기 은별이가 저를 와락 끌어안았어요.
“앗, 왜?”
“그런 걸 왜 창피해해요? 그건 진짜, 진짜… 엄청 좋은 거예요.”
“뭐가?”
“첫사랑 한번 못해본 거요. 진짜 잘했어요.”
“요게 또 뭐래.”
“형이 좋아요. 형 냄새도 좋고 완전 좋아….”
가슴에 파고들 것처럼 안겨오더니 어느새 졸고 있네요.
“그리고요…. 또 말해줘요. 형 어릴 적…. 내가… 못….”
“응…?”
“못 봤잖…. 코-”
은별이 잠들었네요. 저도 어느새 눈꺼풀이 무거워졌어요.
꿈속에서 저는 반백의 할머니였어요. 아마도 나탈리로 빙의했던 것 같아요. ‘이름’을 찾겠다며 땅을 파고 있었어요. 종일 파고 또 파고 죽어라 팠더니 두더지 한 마리가 얼굴을 내밀었어요. 그런데 다음 순간 두더지가 유니콘이 되더니 하늘을 날아올랐어요. 그 아이 등위에는 누군가가 타고 있었죠.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꿈속의 저는 그게 누군지 쉽게 알아봤어요. 너무나 황홀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어요.
‘내가 루나의 첫사랑이야.’
*
“사장님. 잠깐 얘기 좀 해도 돼요?”
다음날 오전, 손님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후 희상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게 말을 건넸어요.
“어, 그래.”
그때 은별이가 이층에서 내려오더니 카운터로 얼굴을 내밀었어요.
“선호가 같이 게임하재요. 잠깐 다녀와도 돼요?”
“어디?”
“걔네 집이요. 학교 앞 아파트.”
“오래 있을 거야?”
“딱 두 시간만.”
“좋아. 늦게 되면 전화해.”
“안 늦어요. 가게 바빠지기 전에 올 거니까. 다녀올게요!”
친구네 집에 놀러도 가고, 좋은 일 같아요. 뛰어나가는 모습이 명랑해서 좋아요.
“아. 희상 씨, 미안. 무슨 얘기야?”
“에릭 말인데요.”
그러고 보니 희상이 얼굴이 핼쑥하네요. 고민이라도 있는 걸까요?
“어떤 분이세요?”
“응…?”
“서른일곱이고, 런던에 살고, 독신이고, 미술품 투자를 전문으로 하고. 그 정도밖에 몰라서요.”
“…그 외에 뭘… 더 알고 싶은데?”
희상이는 다소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어요.
“모르겠어요. 사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알아가려면 당연히 시간이 필요하겠죠. 그런데…. 에릭은 좀 달라요. 뭔가, 안개에 싸여 있는 사람 같아요.”
“아하, 런던에서 와서 그래.”
생글거리다 보니 실수라는 걸 깨달았어요. 이딴 아재개그를 할 때가 아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저를 보는 희상이의 눈이 한껏 찌그러지네요.
“사장님은.”
“응?”
“어디서 오셨어요?”
“나? 나…는 계속 여기서 살았어.”
별로 수긍이 안 가나 봐요. 그래서 서둘러 덧붙였어요.
“할머니가 커피숍을 하셨거든. 하, 한국에서.”
“정말요? 왜요?”
헐, 땀나네.
“그, 그러게. 한국을 아주 좋아하셨나 봐. 그런데 갑자기 그런 건 왜?”
“혹시 사장님은 호모포비아세요?”
“호모…?”
“게이 커플 반대하시냐고요.”
“아니!”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어요. 그런데 희상이도 소리를 지르네요.
“진작 말씀하시지!”
“뭘?”
“아, 아뇨. 아무튼 에릭에 대해 사장님도 자세히는 모르시는 거예요?”
“그, 그렇지.”
“그럼, 게이 커플 반대하시는 것도 아닌데 왜 우리 만나는 걸 못마땅해하셨어요?”
“내가, 못마땅해했다고? 그걸 어떻게 알았어?”
“어유, 티를 엄청 내셔놓고. 처음엔 질투하시는 줄 알았어요.”
“무슨 그런! 그리고 이제 안 그래.”
“정말요? 감사합니다.”
“나한테 감사할 건 없어. 그리고 에릭에 대해 하나만 말해줄게. 에릭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
그 말에 희상이가 저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이내 웃네요. 에릭 말대로 강아지처럼 사랑스러운 웃음이에요.
두 사람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영원한 사랑을 이룰 수 있을까요? 아니면 요즘 젊은이들처럼 스낵 같은 연애로 끝날까요? 누가 알 수 있겠어요.
그리고 이처럼 확신할 수 없는 러브스토리에 우리의 정보를 까기에는 제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요.
대화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에릭이 가게로 들어왔어요. 그를 보는 희상이의 표정은 누가 봐도 사랑에 푹 빠진 얼굴이에요. 솔직히 두 사람, 예쁘기는 하네요.
그날은 그럭저럭 지나갈 줄 알았어요.
저는 나름대로 에릭과 희상, 워튼 씨와 나탈리, 두 커플의 연애담을 곱씹으면서 한가롭고도 달달한 기분에 젖어있었어요. 비품실에서 물품을 찾고 있는데 필립이 뛰어 들어왔어요.
“야옹! 큰일 났다.”
“깜짝이야! 종일 어딜 나돌아다니다가 이제 나타나시는 거예요?”
“큰일 났어! 은별이가 납치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