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남은 회의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거의 다 진행됐어요.
유니콘은 로저가 분 피리 소리를 듣고 플럼버에서 좌표를 통해 건너왔어요. 그 말은 곧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는 뜻이라는 게 로저의 생각이었어요. 저도 그 말이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했죠.
“정말 그럴듯하네요. 그럼 월식이 없을 때도 도킹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거잖아요.”
지구에서는 월식 때만 차원 사이에 틈이 생기기 때문에 그동안은 월식을 기다려 도킹을 시도해야 했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어요.
말하자면, 그동안에는 좌표가 열리기 위한 조건을 최대한 맞춰 기다려야 했다면 이제는 이동할 주체가 스스로 차원의 틈을 발견할 수 있게 된 거죠. 다만 상호교환적인 상태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지만요. 플럼버에서 교신을 보내줘야 한다는 조건 말이에요.
그래도 이제까지처럼 막연하게 월식을 기다리다가 그나마도 실패하는 것보다는 비교할 수도 없이 희망적인 거죠.
“그게 인간에게도 통해야 되는 거 아닌가?”
에릭이 국그릇을 뒤적이며 물었어요. 로저가 국을 그릇째 드링킹하고는 대답했어요.
“그건 이미 실험이 끝났네.”
로저는 아기 납치범 한새 엄마에게 했던 실험 결과를 말해줬어요. 한새 엄마한테 들려줬던 코드는 ‘자백하고 광명 찾아’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대요.
“그런데 말이야, 루나.”
에릭이 조심스럽게 말했어요.
“이 수프, 냄새가 너무 심한데 이런 음식을 먹어야 하는 이유가 있나?”
“저런, 에릭. 취향에 맞지 않으신다니 정말 안타깝네요. 우선, 이 음식은 수프가 아니라 찌개라는 거예요. 스튜에 가깝죠. 청국장은 콩을 오랫동안 발효해 만든 거라서 영양가가 아주 많아요. 위와 장에 아주 좋죠. 물론 이걸 좋아하지 않는 분들도 계시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이 식당 안에는 에릭밖에 없는 것 같군요.”
아닌 게 아니라, 은별이는 물론이고 어린 준이도, 한식의 매력에 푹 빠진 로저도, 심지어 워튼 씨와 아치볼트까지도 아주 잘 드시고 계세요.
“믿을 수 없군.”
에릭이 놀라운 눈으로 열심히 찌개를 퍼먹고 있는 회원들을 둘러봤어요.
“야옹, 에릭. 연어 캔 좀 나눠줄까?”
“돼, 됐네.”
“희상이랑 사귀려면 이런 음식도 좋아해야 할 거예요.”
저는 부러 턱을 조금 치켜들고 말했어요. 둘의 관계에 대해 중립을 지킨다고 했으니 쌀쌀맞거나 못마땅한 투로 말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랍니다.
과연, 그 말에 에릭이 귀를 쫑긋 세우네요.
“그래? 희상이도 이걸 좋아한다고?”
“아마 한국인이라면 열에 일곱은 좋아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 먹어보겠네.”
은별이는 깍두기를 넣고 쓱쓱 비벼서 잘도 먹고 있어요. 준이도 형아 옆에 앉아 잘 먹네요. 그렇게 나란히 앉아있으니 둘 다 귀여운 인형 같아요. 훗.
그런데….
“엇? 로저. 지금 준이 보면서 웃고 있는 거예요?”
“누, 누가 웃었다고….”
“야옹, 웃었어. 되게 바보 같았어. 아들 바보.”
“필립. 노총각도 총각인데 말 좀 가려서 하게.”
“야옹.”
워튼 씨가 자상한 아버지처럼 말했어요.
“로저가 애를 잘 보는 걸 보니 결혼할 때가 된 거야.”
“저는 애를 잘 보지 못합니다, 워튼 씨.”
로저의 대답에 제가 재빨리 덧붙였어요.
“그렇지도 않아요. 로저는 애를 아주 잘 봐요.”
좀 전부터 에릭과 은별이가 왜 눈을 맞추고 있을까 했는데 역시나 에릭이 은별이에게 물었어요.
“정은별 꼬마. 왜 그렇게 쳐다보지?”
“궁금한 게 있어서요.”
“나한테? 뭐지?”
“에릭 아저씨는 희상이 형이 왜 좋아요?”
에릭은 그 질문이 마음에 든다는 듯 빙그레 웃었어요.
“희상이도 그 질문을 종종 하는데, 나도 몰라.”
“야옹. 나는 희상이가 별로야.”
“필립. 그게 무슨 망언인가?”
“강아지상이잖아.”
“아항, 아빠가 고양이라서 강아지상이 싫은 거구나.”
“야옹.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희상이가 마음에 쏙 들어.”
에릭이 저와 필립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고는 은별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어요.
“희상이 인상이 귀여워서 내 눈에 띈 것은 맞지만 그 때문에 사랑에 빠진 건 아니야. 그건 그냥… 마법이었어.”
“와….”
은별이도 감탄했나 봐요. 넋을 잃은 것처럼 에릭을 쳐다보네요. 저야말로 언제 둘 사이를 반대했나 싶게 감동을 받았지 뭐예요.
“정말 낭만적이네요!”
그때 갑자기 아치볼트가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다들 꿈에서 깨어났어요. 아치볼트는 냉장고로 가 맥주를 꺼냈어요. 선 채로 한 캔을 벌컥거리더니 불퉁하게 쏘아붙였어요.
“젠장, 로저! 그래서 이 징글맞은 행성을 떠날 방법은 언제쯤 알려줄 겁니까? 복잡한 코드 설명만 잔뜩 늘어놓고, 그래서 어떻게 써먹을 건지는 말 안 해줄 거냐고요!”
“아, 미안하네. 잠깐만.”
로저가 허공을 손바닥으로 쓱 훑으니 자그마한 좌표가 열렸어요. 그리고 셔츠 주머니에서 담배만 한 피리를 꺼내 불었어요. 우리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조그만 벌새가 튀어나왔어요. 우리도 놀랐지만, 특히 은별이와 준이는 엄청 흥분해서 박수를 쳤어요.
“우와!”
“마봅사!”
주방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던 벌새는 싱크대 수도꼭지 위에 내려앉았어요. 로저가 설명을 계속했어요.
“저 벌새를 플럼버로 보내 이 음파를 실행하게 하면, 그리고 그 음파가 우리 뇌에 작동하게 할 수만 있다면, 좌표 이동이 간단하게 해결되는 겁니다.”
아치볼트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어요.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로저는 흐음, 신음을 내뱉으며 설명을 해주었어요.
“플럼버의 누군가가 해당 애스터코드를 발신하고 이곳의 우리가 그걸 수신하면 저절로 좌표가 열린다는 뜻이야.”
“말도 안 돼.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지구와 플럼버는 측정할 수도 없이 먼 거리에 있잖은가. 그러니 지구의 차원으로는 어떤 교신도 불가능해. 플럼버와 곧바로 교신이 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을 넘어선 상황이라는 뜻이야. 게다가 지구처럼 3차원 이상을 물리적으로 감지하지 못하는 행성에서는 말이지. 즉, 이 코드는 차원의 틈을 저절로 발견하게 해주는 플럼버의 기술력이야.”
워튼 씨가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그럴듯하지만, 벌새와 인간은 너무 격차가 크지 않겠나?”
“그렇기는 합니다만, 시도해볼 만은 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치볼트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어요.
“그러니까 벌새든 유니콘이든 누군가가 플럼버로 가서 그 코든지 음판지를 보내줘야 한다는 거잖아요.”
“또는 누군가 도킹에 성공한다면 더 간단하게 교신할 수 있지.”
“누가 어떻게 도킹에 성공해요?”
“지난번에 회원 두 명이 도킹에 성공한 걸 잊었나?”
“그런 행운이 언제 또 일어나겠어요? 결국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은 아니네요.”
스툴에 걸터앉아 두 캔째 맥주를 마시고 있는 아치볼트가 신경질적으로 말했어요. 저는 좀 불쾌해졌어요. 실연당한 건 당한 건데 왜 남한테 화풀이하는 느낌이 드는 걸까요? 아치볼트의 그런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아치볼트. 로저가 애써 연구 중인데 그런 식으로 따지는 건 매너가 아닌 것 같은데요.”
“루나. 나는 지금 당장 플럼버에 가야 해.”
“누군들 안 그렇겠나? 아치볼트, 플럼버인답게 품위를 지키게.”
“워튼 씨는 어차피 안 가실 거잖아요. 루나도 그렇고, 지구인 애인이 생긴 에릭 역시 이번에도 안 갈 거잖아요. 로저도 루나가 안 가면 안 갈 거고.”
로저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어요.
“내, 내가?”
“몇 번이나 그러셨으니까.”
로저는 헛기침을 흠흠 했어요. 아치볼트는 계속 주절댔고 말이죠.
“결국 이 자리에서 정말로 플럼버에 갈 사람은 나뿐인 셈이잖아요. 안 그래요?”
그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어요.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거든요. 하지만 그렇다고 아치볼트가 로저에게 따져도 된다는 뜻은 아니지요.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모두 돌아갈 걸세.”
워튼 씨의 말에 제 눈이 번쩍 뜨였어요.
“아니, 워튼 씨. 그럼 언젠가는 그 할머니와 헤어질 생각이신 거예요?”
“뭐? 절대 아니지!”
왠지 안심된 저는 동조를 구하는 의미로 은별이를 돌아봤어요. 은별이도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어요. 물론 그게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때 에릭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어요.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 같았어요.
말하건대, 저는 남의 사생활이나 염탐하는 그런 비매너 인간은 결코 아니기에 궁금한 마음을 꾹 눌러 참고 절대! 엿보지 않았답니다. 비록 에릭의 옆자리에 앉아있었기에 그가 휴대폰을 켜는 순간 저도 모르게 저절로 눈동자가 굴러가버리고 말았지만요.
물론 몹시 부끄럽게 생각해요. 1초도 안 되어 화들짝 놀라 제 자리에 눈동자를 가져다 놨습니다만….
곤란하게도 시력이 지나치게 좋은 나머지 ‘마이 스윗 포메라니안My sweet Pomeranian’이라는 조그만 글씨를 봐버리고 말았어요. 남의 사생활을 염탐한 ‘범죄’를 저지르고는 뻔뻔하게 키들거릴 수가 없어서 입술을 꼭 다물었는데요….
뭐야?
로저가 눈을 부릅뜨고 에릭의 머리통을 노려보고 있었어요. 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어요. 어쩜 저리도 아무 생각 없이 리딩을 해대는 걸까요? 은별이 말대로 해킹과 비슷한 일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하고 있으니, 이 건에 대해서는 속 깊은 논의를 해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문득 오른쪽 옆을 보니 은별이도 로저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네요. 저는 은별이와 눈을 맞추고 더 열렬히 고개를 저었어요. 정작 에릭은 로저의 ‘만행’을 눈치채고도 싱글거렸지만요.
에릭이 특유의 느끼한 투로 말했어요.
“난 잠깐만 통화 좀 하고 오겠네. 로저, 리딩 좀 그만하게. 별로 비밀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니까.”
그렇게 말한 그가 주방을 나간 직후 요란한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아치볼트가 스툴에서 굴러떨어졌어요.
“아치볼트! 왜 그래요?”
“야옹, 취했어.”
동작 빠른 로저가 아치볼트를 안아 일으키고 있었어요. 워튼 씨도 다가가 로저를 도왔어요.
“생각보다 상태가 더 안 좋은데.”
“우리 집으로 데려갈까 봐요.”
그러자 아치볼트가 빽 소리를 질렀어요.
“씨발!”
저와 은별이, 준이는 똑같이 귀를 틀어막았어요. 웬 목소리가 그리 큰지, 귀청 떨어지는 줄. 저는 짜증이 나서 쏘아붙였어요.
“아치볼트. 아이들도 있는데 욕설은 삼가주시면 좋겠어요.”
“씨발, 염병…. 나쁜 년. 내가 저한테 어떻게 했는데, 날 기만해… 엉…? 엉엉, 로저, 솔직히 말해줘요.”
“뭘 말인가?”
“나 객관적으로 많이 별로예요?”
“그렇게 생각한 적 없는데 지금 당장은 그렇군.”
“난 인간쓰레기야. 그쵸?”
“뭐라 대답할 말은 없네만 일단 그건 아니야.”
“됐어요, 날 위로할 생각 말아요. 난 인간말종이야….”
“루나, 아무래도 이 녀석 데려가서 재워야 할 것 같아.”
“알겠어요.”
로저가 은별이를 향해 말했어요.
“은별아. 준이 좀 봐줘. 금방 올 테니.”
“네.”
“이거 놔요. 루나! 술 좀 더 줘. 대체 왜 커피숍 따위를 하는 거야? 잉글리시 펍으로 업종 변경하면 내가 폭죽 쏜….”
로저가 아치볼트와 함께 사라지자 온 세상이 다 조용해졌네요.
“후유, 아치볼트가 저렇게 진상일 줄은.”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엘리아가 왜 떠났는지 이해가 되네요.
워튼 씨가 시계를 들여다보는 바람에 저는 서둘러 말했어요.
“워튼 씨. 그냥 걱정돼서 여쭙는 건데, 그분과는 어떠세요?”
“야옹, 걱정이 아니라 궁금해서 묻는 거야.”
“…좋아요. 솔직히 궁금해요. 아까 오늘 밤에 말해준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워튼 씨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어요. 옳다구나 했죠. 저 표정은 말하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은별이와 준이를 슬쩍 보더니 이내 무심한 표정을 짓네요.
“애들 앞에서 할 말은 아니고.”
“야옹, 19금인가?”
“그, 그건 아닐세.”
저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짓고 은별이에게 훠이훠이 손짓을 해보였어요.
“얘들아. 너희들 졸리지? 어른들은 할 얘기가 남았으니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도록 해.”
“로저가 금방 온다고 했는데요.”
“오, 올 때 오더라도, 그래. 오늘은 준이 데리고 자. 모처럼 형제끼리 얘기도 하고, 좋지?”
“아뇨. 나도 워튼 씨 이야기 듣고 싶어요.”
“어딜 미성년자가! 어서 들어가! 어서.”
은별이는 치잇, 입을 삐죽이며 준이 손을 잡고 일어났어요.
겨우 애들이 사라지고 어른만 남았네요. 훗.
“워튼 씨. 위스키 소다 좀 만들어올까요?”
“좋지.”
“야옹, 난 스트레이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