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다음 날 점심 장사가 끝나고 겨우 한가한 시간이었어요.
“설거지는 내가 하겠네.”
“무보수로 너무 열심히 일하시는 거 아니에요?”
“나 같은 백만장자가 알바비까지 받으면 그거야말로 자본주의의 난센스지.”
이 기막힌 대화는 에릭과 희상이 비좁은 카운터에 오전 내내 ‘들러붙어’ 나누던 대화 중 가장 덜 낯간지러운 대화였어요.
하! 누가 자기더러 설거지해달랬나? 에릭은 제가 그렇게 눈치를 줬는데도 아예 철판을 깔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못 본 척하고 있어요.
“에릭. 잠깐 얘기 좀 해요.”
하지만 더는 안 되겠어요. 세윤이 오기 전에 물어볼 게 있었어요.
“그러지. 희상, 금방 돌아올게.”
“네, 에릭.”
허! 아주 그냥 꿀이 뚝뚝 떨어지네요. 우리는 사무실로 들어와 앉지도 않고 대화를 시작했어요.
“에릭. 어제 외박하셨죠? 혹시 제가 짐작하는 게 맞아요?”
“루나, 자네가 짐작하는 게… 서로 다른 은하계에서 태어난 두 사람이 광활한 우주를 떠돌다 루나커피라는 신성한 장소에서 만나 향기로운 커피 내음만큼이나 강렬하고도 다정한 기운에 이끌려 서로에게 첫눈에 반하고, 마음뿐 아니라 신이 주신 소중한 육체까지도 합일을 이루어 마침내 생애 약 700여 년 동안 가장 아름답고 달콤한 밤을 보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러하네.”
안 웃을 수가 없네요.
“하!”
“다른 사람의 진지한 연애담에 코웃음을 치는 건 자제해주기를 바라네.”
“정확히 말해 742하고도 7년이죠. 에릭이 살아온 시간은.”
“그, 그렇게 정확히 내 나이를 외고 있었나?”
“됐고, 희상이는 이제 겨우 스물한 살이에요.”
“그건 말했듯이 서로 다른 태양계의 산술적 차이일 뿐, 곱하기 약 20을 하면….”
“말씀 잘하셨어요. 곱하기 20을 해도 희상인 420살이라고요.”
“그게 불법은 아니잖은가?”
“세상엔 법 말고도 지켜야 하는 게 있는 거죠.”
에릭은 보드라운 금발을 슬쩍 쓸어 넘기면서 곤란한 표정을 지었어요.
“루나. 난 늘 루나를 좋아했네. 나이는 나보다 훨씬 어리지만 어딘지 스승님 같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아. 아마도 바바라 님의 기운을 닮아서인지도 모르겠어. 언젠가 말했듯이 나는 바바라 님의 소설을 무척 좋아했거든.”
이런 식의 서두로 시작하는 말은 끝이 안 좋은 법이랍니다. 아마도 네가 뭔데 상관이냐는 반문으로 끝나겠죠.
“내가 예언 하나 해도 되나?”
“아뇨.”
“자네는 자네의 마음에 자네 스스로 쌓아놓은 장벽을 나보다 훨씬 멋지게 허물어뜨리는 날을 맞이하게 될 걸세.”
“뭐라고요? 자네라는 말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잘 못 알아먹겠어요.”
“아니, 자넨 알아들었어.”
“지금 제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거든요.”
“희상이에게 플럼버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을 걸세.”
“그게 되겠어요?”
“당연히 되지. 이래봬도 나는 그쪽으로는 선수야.”
“그쪽?”
“음…. 거짓말이라고 하면 좀 그렇지만, 아무튼 그쪽 말이야.”
“좋아요. 저도 남의 일에 지나치게 참견하는 건 좋아하지 않아요. 딱 하나만 여쭤볼게요. 그리고 이 시간 이후로 이 사무실에서 나가면 다신 두 사람 연애사에 상관하지 않겠어요.”
에릭은 야릇한 미소를 지었어요. 저 매력적인 미소에 순진한 희상이가 홀랑 넘어간 거겠죠.
“솔직히 나는 루나가 상관하는 게 싫지는 않네.”
“무슨 뜻이에요?”
“귀엽다고 생각해.”
“하!”
“그래, 그래. 뭘 여쭙고 싶은데?”
“자꾸 나이 얘기를 해서 죄송한데요, 그게, 돼요?”
“뭐가?”
“아니, 3백 살이나 어린 사람이랑 그 뭣이냐, 사랑이 되냐고요.”
에릭은 잘 빠진 콧날을 손가락으로 긁적이며 대답을 찾는 눈치였어요.
“자네가 어떤 대답을 기대하는지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 반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알쏭달쏭한 말씀 하지 마시고요.”
“아주 잘 되네. 희상을 만나려고 플럼버에서 이 먼 지구까지 휩쓸려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말문이 막혔어요.
“알겠어요. 이제 저는 중립을 지킬게요.”
“고맙네.”
에릭이 문을 열다 말고 고개를 돌리더니 탁자 아래쪽을 향해 말했어요.
“그만 나오게, 필립. 비밀도 아닌데 엿들을 건 없어.”
어디선가 나타난 필립이 의자 위로 폴짝 뛰어올랐어요. 저 역시 필립이 엿듣는 것에는 이골이 난 터라 뭐라 말할 생각은 없었어요.
에릭이 제게 윙크를 해보이면서 입 모양으로 말을 건넸어요. 힘내게.
그리곤 나갔는데요. 뭘 힘을 내라는 건지, 원.
“야옹, 에릭이 저렇게 사랑꾼이라니, 짐작도 못 했다.”
“왜요?”
“왜요는 뭐가 왜요야?”
“왜 짐작도 못 했냐고요.”
“에릭은 플럼버에서부터 자기가 독신주의라고 했었거든.”
“민주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만큼이나 의미가 쉽게 변하는 게 독신주의예요.”
“너도 얼마 전에는 독신주의였잖아.”
“무슨 말이에요? 전 지금도 독신주의예요.”
“너는 너 스스로 마음을 위장하고 있다는 걸 몰라.”
“그건 또 뭔 소리예요?”
“에릭도 알고, 로저도 알고, 나도 아는 네 마음을, 내가 굳이 나서서 알려주면 내 털을 뽑고 싶어질걸?”
“내 마음을 나만 빼고 다 안다는 말이에요?”
“말하자면 그렇지.”
“뭔데요? 멍청하게 나만 모르는 내 마음이.”
필립은 탁자 위로 뛰어오르더니 그 너머의 직원용 캐비닛 위로 또 한 번 폴짝 뛰어올랐어요.
“뭐 하는 거예요?”
“여기서 말하려고.”
“제가 아무렴 아빠를 때릴까 봐서요?”
“때리고 안 때린 척할까 봐서.”
“누굴 진짜 후레자식으로 아시나!”
“너 요즘 하는 꼴 보면 그러고도 남아.”
“어우 씨!”
“저 봐라, 야옹.”
“알겠어요. 어서 말씀이나 해보세요.”
“넌 누구보다 운명론자이지. 여기에 와서 은별이라는 이름이 은빛 별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네가 그랬어. 야옹, 내 이름은 루나니까 달과 별의 운명적인 만남이네요! 라고.”
“제가 언제 야옹, 내 이름은 루나니까 달과 별의 운명적인 만남이네요! 라고 했어요?”
“저놈의 자식이.”
저는 한숨을 포옥 쉬면서 의자에 털썩 앉았어요.
“맞아요. 분명히 그렇게 말하긴 했었죠. 하지만 그건 은별이를 만나기 전이잖아요.”
“어쨌거나 너희 둘은 네이밍이 된 관계니까, 그 관계를 부정하는 건 신의 뜻을 거스르는 거고 분명 고통이 따를 거다.”
“진짜 야옹이네.”
“너도 그걸 의식하니까 에릭과 희상이가 시시덕거리는 게 눈꼴신 거잖아. 넌 네 마음을 아직 마음대로 못하는데 에릭은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랑을 쟁취하니까 말이야.”
“사랑을 쟁…! 참 나, 유치해서 못 들어주겠네요.”
“야옹, 네가 재방송까지 챙겨보는 드라마보다 더 유치하지는 않거든.”
“그건 드라마죠! 드라마는 드라마라고요.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
“야옹, 길을 막고 물어봐라. 루나커피만큼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지구상에 또 있나.”
“됐어요! 장사해야 해요. 가서 꼬리나 핥으세요!”
“야옹!”
심란한 대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세윤이가 반색하고 저를 반겼어요.
“사장님, 사장님! 저 붙었어요!”
“어, 정말?”
“네! 그때 그 대기업은 아니지만요.”
“그새 또 오디션이 있었어?”
“실은 오디션 보던 날 회사 앞에서 어떤 아저씨가 명함을 줬거든요. 이 바닥엔 사기꾼이 많아서 갈 생각 없었는데, 오디션 떨어지고 하도 마음이 허해서 명함에 적힌 회사를 검색해봤어요. 그랬더니 생각보다 건실한 회사더라고요. 그래서 어제 강의 끝나고 갔는데 카메라 한번 비춰보더니 합격이래요.”
“진짜 확실한 회사 맞아?”
“네! 인터넷에 사진도 있어서 학교 교수님한테 여쭤봤는데 아역배우 출신 대표님이래요. 회사는 작아도 실력 있는 조연배우가 많이 소속돼 있어서 꽤 유명하다셨어요.”
“잘됐다! 축하해.”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자 얼굴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세윤이가 자그맣게 말했어요.
“사장님한테 제일 먼저 축하받고 싶었어요.”
“그래? 가만, 말로만 축하할 게 아니라 케이크라도 자르자.”
“엇! 아니에요.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요.”
케이크라는 말에 카운터 안에 있던 희상이의 귀가 쫑긋 서는 게 보이네요. 저는 쇼케이스 안의 케이크를 살피면서 말했어요.
“희상 씨. 에릭은 어디 갔어?”
“아, 전화 받고 오신다고요.”
“오늘 바빠?”
“저요? 아뇨. 방학인데요, 뭐.”
“그럼 세윤 씨 오디션 합격 축하도 할 겸, 좀 한가해지면 같이 케이크 자르고 갈래?”
“정말요? 좋죠!”
마침 달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은별이도 들어왔어요. 이선호라는 친구도 따라 들어오네요.
“형! 얘는 요 앞에서 만났어요. 제 친구 이선호예요. 이선호, 인사해. 우리 형.”
선호는 은별이 휴대폰 사진으로 봤기 때문에 안면이 있었어요. 날씬하게 큰 키에 세모꼴 얼굴이 귀여운 아이예요.
“안녕하세요, 이선호입니다.”
“그래, 안녕. 우리 은별이랑 잘 지내줘서 고맙다.”
“아닙니다. 제가 고맙죠.”
“마침 잘 왔다. 저기 앉아서 조금 기다릴래? 우리 알바생한테 좋은 일이 있어서 케이크 자를 건데 같이 축하해주면 좋겠다.”
은별이가 세윤이의 발그레한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어요.
“오디션 합격했어요?”
“응. 사장님이 축하해주신다고….”
“근데 얼굴은 왜 그렇게 빨개요?”
은별이의 말에 세윤이는 당황한 듯 자기 볼을 쓰다듬었어요. 음, 아무래도 주의를 좀 줘야겠어요. 은별이는 나무랄 데가 없는 아이인데 가끔 지나치게 직선적인 말을 던지거든요.
“은별아. 아무 질문이나 툭툭 던지지 좀 말고, 가서 앉아있어.”
“전 가나슈 케이크 먹고 싶어요.”
“그건 세윤이가 골라야지.”
“저도 가나슈 좋아요.”
“그래, 그럼.”
케이크를 고르고도 계속 손님이 와서 30분쯤 후에야 그럭저럭 짬이 났어요. 세윤이에게 고깔모자를 씌워주고, 생일도 아닌데 생일 축가를 불러주고, 촛불을 불게 하고 케이크를 잘랐어요.
에릭과 희상이가 다정하게 앉아있는 걸 보면서 저는 그만 생각을 떨쳐내기로 했어요. 필립 말대로 저에게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왈가왈부할 권리는 없으니까요.
제 옆에 앉은 은별이가 입에 크림을 잔뜩 묻히고 저를 올려다보네요. 눈을 맞춰주자 배시시 웃어요. 그 옆에 앉은 선호도 덩달아 배시시 웃고요.
“후우-”
“형. 왜 한숨 쉬어요?”
“응? 내가 한숨을 쉬었나? 그보다 은별이랑 선호, 우유 줄까?”
“네!”
은별이가 좋은 생각이라는 듯 손가락을 튕기며 일어났어요.
“제가 가져올게요.”
입에 크림을 잔뜩 묻힌 채 선호도 일어났어요.
“정은별! 나도 같이 가.”
“뭘 같이 가? 붙지 마, 더워. 저리 가!”
티격태격하는 게 영락없는 개구쟁이네요. 하하…. 저도 그냥 웃지요.
에릭과 희상이가 러브샷을 하며 케이크를 먹는 모습도 더 이상 저를 화나게 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은별이는 그렇다 치고 세윤이와 선호도 있는 자리에서 저런 ‘짓’이 아무렇지도 않게, 돼요? 라고 물어보고 싶었을 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