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여보세요?”
전화를 건 사람은 박 형사였다. 이모부한테서 연락이 오거나 접촉이 없었느냐고 물었다. 복잡하게 숨길 게 없으니 곤란할 것도 없어서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아뇨. 그런데 제가 몇 가지 여쭐 것이 있는데요.”
- 뭔데?
“이모한테 아들을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볼 수 있어요?”
- 아들? 아, 그 아이. 지금 그 아이 어디 있지?
“잘 있어요.”
- 골치 아프네. 부부가 구속되게 생겼는데 애를 어쩐다. 돌봐줄 친척이 있니?
“없어요.”
- 지금 돌봐주고 계시는 분이 계속 돌봐줄 수도 있니?
“안 될 것 같아요.”
- 그럼 보호시설에 가게 되겠구나.
“고아원 말인가요?”
- 비슷해.
전화를 끊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고아원.
내 책상 위에는 노트북과 새 책들이 놓여있고 휴대폰과 태블릿도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책상 앞 창문에는 월계수 가지가 기분 좋은 그늘을 만들어준다. 그 위로 언제나 나를 환상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황금빛 달이 떠 있다.
그 달을 보고 있노라면 나 자신 그때까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이야기들이 머릿속에서 튀어나온다. 근사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 말이다. 물론 다음날이면 까맣게 잊어버리기 일쑤지만.
열린 창으로 귀여운 고양이들이 드나들고, 마당의 풀냄새와 가게의 커피 향이 부드러운 바람을 타고 흘러들고, 당장에라도 내려가면 사랑하는 루나가 환한 얼굴로 손님을 맞이하고, 그런 광경을 매일 볼 수 있었다.
이곳, 여기가 내 보금자리였다. 새로운 안식처, 우리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 루나커피에 온 날 나는 먼지보다 못한 천덕꾸러기에서 세상 가장 특별한 아이가 되었다. 루나를 만난 그날부터 나는 그에게 속한 단 한 사람의 정은별이 되었다.
그 모든 것을 떠나 우리 집이 있다는 건 상상 이상의 환희였다. 또한 나를 아껴주고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그 이상의 축복이었다.
이모네 집에 있을 때 나는 수도 없이 고아원에 가게 될 일을 걱정하며 잠들었다. 자다가도 깜짝 놀라 두려움에 떨고는 했다. 그 공포는 일종의 곰팡이였다. 영혼을 갉아먹는 곰팡이.
그 끔찍한 마음을 잘 알기에 나는 준이가 그런 꼴을 당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됐든 그 아이는 내 하나뿐인 동생이었다. 비록 사촌이기는 하지만 내가 알기로 내게 형제 비슷한 아이는 그 아이뿐이었다. 게다가 준이는 제 부모와는 달리 천성이 순한 아이였다. 그 어린 것이 갑자기 알지 못하는 환경에 던져진다면, 그 충격만으로도 순한 제 성품을 지키며 정상적인 사람으로 자라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그 아이가 이 집에 들어오는 것은 싫었다. 못돼먹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 그게 그 아이 팔자라면, 나라고 별 수 없잖아.”
지금까지 지켜준 것만으로도 빚진 5만 원은 이미 갚고도 남았다.
결심을 끝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대폰을 챙겨 들고 방에서 나왔다. 거실에서는 나나와 뭉크가 온 사방을 헤집고 다니면서 결투를 벌이는 중이었고, 미오는 제주도 여행에서 돌아온 후 다시 새장에 갇혔다. 요즘 라라는 부쩍 배가 불러서 찾아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미오는 더 수척해졌다. 상사병이겠지?
가게로 내려오니 마침 라라의 주인인 샘이 엄마라는 분이 와 계셨다. 카운터 옆쪽에서 루나와 열띤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납치범이 잡혔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세상에, 우리 샘이 딱 두 살인데 고만한 아기들만 노렸대요. 그 말을 듣고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아기가 있는 집을 봐뒀다가 범행을 저질렀나 봐요. 도어록에 밀가루를 뿌려 비밀번호를 알아내서, 집이 비기를 기다렸다가 대담하게 들어가서 아기를 잡아갔다지 뭐예요.”
“세상에!”
“참, 그건 그렇고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제가 보니까 루나커피는 토요일 점심때가 제일 한가한 것 같던데 맞아요?”
“잘 아시네요.”
“좋아요, 그럼 그때 라라랑 미오 상견례해요.”
“네…?”
“토요일 오후 1시에 라라 데려올게요. 결혼식은 일요일로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아니, 샘이 엄마 님!”
“여기 뒷마당이 무척 예쁘다던데, 거기서 식 올리고 사진 찍으면 어떨까요? 부담되시면 그냥 커피숍에서 해도 돼요. 어떠세요? 참! 내 정신 좀 봐. 조금 이따 모처럼 친구가 오기로 했는데.”
샘이 엄마는 자기 할 말만 와르르 하고 총총히 나가버렸다. 카리스마가 대단하거나 성격이 아주 급한 아줌마였다. 루나는 입을 쩍 벌린 채 유리창 너머로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보고 있었다.
“형.”
“너도 봤지? 저 여자한테 식혜를 얻어먹는 게 아니었는데!”
“식혜 진짜 맛있었어요.”
“플럼버에도 그런 음료는 없어. 그런데 왜, 어디 가려고?”
“저 준이 좀 보고 올게요. 로저한테 할 얘기도 있고요.”
“할 얘기?”
“경찰에서 전화 왔는데, 준이는 보호시설로 보내야 한대요.”
“뭐? 우리가 돌보면 되지, 어떻게 시설에 보내?”
“싫다니까요!”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루나가 움찔 몸을 떨었다.
“깜짝이야…. 대체 왜?”
“루나커피가 보호시설이에요? 그러다가 정말 경찰이 이상하게 생각해요.”
“네 하나뿐인 동생이잖아. 누구보다 준이를 걱정하던 건 너야.”
“그게 제가 할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거기까지면 되는 거죠. 제가 뭘 더 어떻게 해요? 준이한텐 준이 운명이 따로 있는 거잖아요.”
루나는 굉장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좀 있다가 희상이 오면 가게 맡겨두고 같이 가. 내가 로저한테 부탁해볼게.”
“싫어요. 로저한테 더 신세 지기도 싫어요.”
“얘가 진짜 왜 이래. 너 그러고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어?”
“내가 준이 부모예요? 막말로 친형이라도 돼요? 왜 내가 후회를 해요?”
“넌 그런 애니까.”
루나는 제발 자기 말을 이해해달라는 듯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잘못 아셨어요. 나 그런 애 아니에요. 난 나밖에 몰라요.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생각하며 살 거예요.”
그때 달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에릭과 희상이 형이 들어왔다. 척 봐도 두 사람은 명실상부한 연인이었다. 희상이 형은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잘생겨졌다. 얼굴에 꽃이 핀다는 게 저런 건가 싶었다.
두 사람의 연애 이야기가 듣고 싶었지만 지금 내게는 준이 일이 급했다. 나와는 달리 그들을 보는 루나의 낯빛이 확 바뀌었다.
“아주 그냥 둘만 꽃밭이네.”
이때다 싶어 나는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얼른 가게를 나왔다.
부지런히 걸어 20분 만에 로저의 집에 도착했다. 대문 너머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문이 열렸다. 대문을 연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좀 전까지 우리 집 거실에 있었는데! 언제 데려왔어요?”
마당에 유니콘이 있었다. 유니콘의 등에 매달린 준이는 정신없이 웃어댔다. 자세히 보니 투명 끈으로 묶어놓은 것 같았다. 로저의 손에는 방금까지도 불고 있던 것처럼 보이는 피리가 들려있었다.
“왔냐?”
준이는 나를 보더니 웃음을 뚝 멈추고 새침하게 눈을 피했다. 자식이, 단단히 삐진 모양이었다.
“좌표를 열고 피리를 불었어.”
“우와!”
나는 용건도 잊고 유니콘의 모습에 넋을 잃었다. 유니콘은 썩 넓지 않은 로저네 집 마당을 지그재그로 뛰어다녔다. 저 녀석의 등에 날개가 솟아나면 얼마나 근사할지 생각하던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들어갈래?”
“아니에요. 그냥 여기서 말씀드릴게요. 준이, 조만간 보호시설로 가게 될 거예요.”
“보호시설?”
“이모네 부부가 초범이 아니래요. 게다가 도주했기 때문에 이모부는 형이 늘어날 가능성도 있대요. 그래서 엄청난 벌금을 물거나 최소 3년은 감방엘 가야 한 대요.”
“그래서, 저 아이를 보호시설에 보낸다고?”
“제가 듣기로 고아원도 나쁘진 않댔어요. 요즘은 지낼 만하대요.”
로저는 착잡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으악, 또 리딩이다! 나는 재빨리 두 손을 펼쳐 얼굴을 가렸다.
“하지 마세요.”
“이미 했다.”
“배신자!”
“네 말대로 습관성이야.”
나는 뒤로 다섯 걸음쯤 물러났다. 로저가 말했다.
“그 정도는 사정권이야.”
“진짜 이럴 거예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대단하구나.”
“뭘요!”
“뭐 네이밍이 되어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넌 좀 지나치게 조숙해.”
“뭐라는 거예요.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제대로 말씀하세요.”
“나에 대한 경쟁심은 그렇다 치고….”
스크류 드라이버 흉내를 내며 마당을 헤집고 있는 유니콘과 깔깔거리며 매달려있는 준이를 로저가 눈으로 가리켰다.
“저 꼬마까지 경계하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니니?”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아니긴 뭐가 아냐.”
“젠장.”
로저가 잘생긴 눈썹 한쪽을 가능한 곳까지 치켜 올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흉내 내며 험악한 투로 말했다.
“꼭 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비슷하기는 해요. 난 루나의 영역에 나 말고 딴 애가 들어오는 거 싫어요. 루나를 다른 애랑 나누기도 싫고요. 그게 잘못인가요?”
로저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루나가 고생하는 건 싫다.”
“쳇! 아저씨가 그런 걱정을 왜 해요?”
“내가 루나를 좋아하는 거 네가 제일 잘 알잖아.”
“드디어 이실직고하시네요.”
“난 숨긴 적 없다.”
나는 몹시 초조해졌다. 이게 뭐야! 키가 50cm나 큰 미남자랑 삼각관계라니!
내 마음을 또 읽은 로저가 싱긋 웃었다.
“귀엽네.”
“뭐, 뭐라고요?”
“형아.”
그때 준이가 나를 불렀다. 어느새 화가 풀린 얼굴이었다. 아이를 돌아보며 로저가 말했다.
“형아를 아주 좋아하더라. 형아, 형아, 잠꼬대까지 하던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그런 나를 내려다보더니 아까보다 더 노골적으로 웃었다. 그리고는 내 허락도 받지 않고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악! 뭐 하는 거예요!”
그는 나를 순식간에 유니콘의 등에 태웠다. 내 앞에 탄 준이가 나를 돌아보며 까르르 웃었다. 나는 부루퉁하게 말했다.
“웃지 마, 바보야.”
“형아. 무지 재미쪄.”
로저가 유니콘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녀석을 돌려보낼 방법을 알아냈다. 오늘 저녁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실컷 타고 놀아.”
로저가 유니콘의 엉덩이를 찰싹 때리자 유니콘이 마당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달리는 게 아니라 나는 것 같았다. 땅을 밟는 진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새 나도 준이처럼 까르르 웃었다.
빌어먹을. 솔직히, 근사했다. 유니콘도, 로저도.
로저 말대로 그날 밤 유니콘은 사라졌다. 준이는 밤새 유니콘을 찾으며 울었고 로저는 아이를 달래느라 밤잠을 설쳤다고 했다. 나는 울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섭섭했다. 나도 플럼버에 갈 수 있다면 날개가 달린 어른 유니콘도 볼 수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