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또 뭐가 큰일일까요? 오늘 밤에는 놀랄 일이 더 없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무지 피곤하거든요.
“아빠, 또 왜 그래요?”
“야옹! 빨릿!”
뭔가 요란한 소리가 났어요. 집이 부서지는 소리 같았죠. 고양이들이 싸우는 건가?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 조그만 고양이들이 싸워봤자 저런 소리는 나지 않지요.
“헉…!”
2층으로 올라온 우리는 얼어버렸어요. 피곤해서 그런지 오래 놀라지는 않았지만요.
“유니콘이네.”
안면이 있는 유니콘이 거실에 와 있었어요. 초대도 안 했는데 말이죠.
“야옹, 갑자기 뿅하고 나타나는 바람에 밟힐 뻔했다. 너 아는 애냐?”
“그게… 구면이기는 한데.”
“로저가 애스턴지 이스튼지로 불러낸 애예요.”
은별이의 말이었어요.
“은별아. 엄밀히 말해 로저가 불러낸 건 아니지. 아빠, 제주도에서 가져온 피리 있죠? 그걸 불었더니 애스터코드로 만든 리듬이 나오더래요.”
필립이 제 설명을 들으며 유니콘의 주위를 알짱거리자 고양이들도 뒤를 따르네요.
“야옹, 그래서 애스터코드 때문에 이 녀석이 튀어나왔다고?”
“네.”
“야옹, 그럼 도로 보낼 방법도 있겠네?”
“로저도 비슷한 말을 하기는 했는데, 다른 일이 생기는 바람에.”
“야옹, 이것보다 더 큰 일이야?”
“어떤 의미에서는요.”
저는 좀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 필립에게도 간단하게 설명해줬어요.
“야옹, 그니까 넌 납치범한테 엉뚱한 자비를 베푼 거네?”
저는 그 말에는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어요. 생각보다 간단하게 대답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았거든요.
“배고픈 납치범에게 빵을 준 것이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한다면, 엉뚱하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 납치범은 빵값을 냈어요. 그러니 전 자비를 베푼 게 아니라 빵을 판 거죠. 저한테 빵을 누구한테 팔고 누구한테 안 팔지를 결정할 자격이 있는 것은….”
“야옹, 됐고! 이 녀석 어쩔 거야?”
아닌 게 아니라, 유니콘은 아가이기는 해도 거실에 둘 사이즈는 아니었어요. 게다가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히힝거리며 거실을 뛰어다니고 있답니다. 고양이들은 재주껏 벽난로 위에 올라앉아 있네요.
“야옹! 뛰지 마! 뛰지 말라고!”
“집 다 부서진다!”
은별이가 꽥 소리를 질렀어요. 샹들리에가 끊어져 램프들이 와르르 쏟아졌어요. 낫을 걸지 않을 수가 없네요. 겨우 소동이 멈췄어요.
“낫은 언제까지 유효해요?”
“음, 최대 두 시간이야.”
“그럼 두 시간마다 계속 걸어요.”
“잘못하면 굶어 죽어.”
“그럼 로저네 집으로 데려가요. 순간 이동하면 되잖아요.”
은별이는 착한 아이지만 어쩐지 로저에게는 매번 좀 못되게 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은별아. 로저도 사람이야. 그렇게 다 떠넘기면 아무리 로저가 마음이 좋아도 기분 상하시지 않겠어? 이건 우리 모두의 일이니까 함께 해결해야 해.”
은별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어요.
“알겠어요. 그럼 오늘 밤만 낫을 걸어두면 안 돼요? 우리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그래. 그 말은 맞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해맑게 웃는 유니콘 동상을 거실에 놔두고 소파에 나란히 앉았어요. 깨진 샹들리에는 쓸어 담고, 목욕도 간단하게 했어요. 무지 피곤했거든요. TV를 켜 놨지만 화면 속의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는 않았어요.
“납치범이라니 도무지 이해가 안 가네요. 왜 그런 짓을 하는 걸까요?”
“야옹, 지구별에는 여러 종류의 인간이 산다.”
“인간은 그냥 인간이죠. 종류가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인데요.”
“야옹-. 그런 뜻이 아니라, 인격이 여러 종류라는 말이야.”
은별이가 때마침 절묘한 말을 던지네요.
“한국 속담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어요.”
“오! 그건 정말 오묘하고도 적확한 표현이구나. 요즘 내가 이곳에서 계속 느끼고 있는 부분을 콕 짚어 설명해주는 말이야.”
“좋은 말은 아니에요. 사람 속이 깊은 물보다 시커멓다는 뜻이니까.”
“야옹.”
“뭐가 야옹이에요?”
“그냥 야옹거린 거야. 난 고양이니까.”
“언제는 고양이라고 하면 할퀴려고 덤비시더니.”
“고양이가 차라리 나은 것 같아서 그런다. 어째 이 행성에는 모지리들이 이리 많으냐.”
“그러게요. 아이를 패지 않나, 아이를 납치하지 않나. 힘없는 애들한테 왜… 아, 내가 은별이 앞에서 쓸데없는 말을.”
“야옹, 은별이 잔다.”
곧 죽어도 대화에 끼어서 종알거리더니 어느새 은별이가 제 어깨에 기대어 잠들었네요.
은별이의 잠든 모습은 언제 봐도 측은해요. 똘똘한 아이지만 이렇게 냉소적인 성격이 되기까지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제 눈에는 아이의 불행했던 삶이 보이는 것 같아 그저 애잔하답니다.
“야옹, 너 때문이다.”
“네? 뭐가요?”
“로저한테 불퉁하게 구는 거 말이야. 너 때문이라고.”
“무슨 뜻인데요?”
“내숭 떨지 마.”
“아, 진짜 모르겠는데?”
“로저가 너한테 마음이 있는 것도 모른다고 할 거지?”
“네에?”
“야옹.”
“뭐가 또 야옹이에요?”
“내숭 백 단.”
“내숭 아니거든요! 정말 억울하네. 어쩜 아빠가 되어가지고 아들을 그런 재수 없는 인간으로 보는 거죠?”
“야옹, 은별이는 너랑은 달리 눈치가 빤한 녀석이라 진즉에 알아챘나 보더라. 그래서 로저한테 늘 날을 세우는 거라고.”
“설마, 이 조그만 녀석이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 말에 은별이가 몸을 뒤틀며 잠꼬대 비슷한 걸 했어요.
“우웅… 키 큰다….”
혹시 자는 척하는 건가 싶어서 아주 살짝 겉핥기식 리딩을 해봤어요. 잠든 건 맞네요.
“야옹, 속에 능구렁이 일백 마리가 들어있는 놈이다.”
“말도 안 돼요! 우리 귀요미한테 능구렁이라니!”
“깨물고 싶게 귀여운 은빛아가별 말이냐? 크크.”
저는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어요.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죠?”
“야옹?”
“한새 엄마, 아니. 납치범 말이에요.”
이때까지만 해도 저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전까지 저는 다른 사람들도 저와 별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왔으니까요. 그렇다고 저 자신이 단순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사실 저는 무척 단순한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그걸 인지한 순간부터 조금씩 생각이 복잡해지기 시작했어요. 솔방울 샘을 지키는 기사 란슬렛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요?
분명 저는, 아니. 제 란슬렛은 침범당한 거예요. 저 자신만의 세계에서 뜻대로 살던 때와는 달리 지구별의 꼬마를 받아들인 후로는 알게 모르게 외부의 것들로부터 공격당하고 있었어요. 그중에는 강요된 것도 있지만 저 스스로 선택한 것도 있어요. 예를 들어 드라마 같은 것 말이에요.
아무튼 저는 더 이상 이곳에서 이방인으로만 살 수는 없게 되었음을 깨달았어요. 특히 은별이를 책임지려면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예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봐야만 해요. 물론 이해한다고 해서 전부 공감한다는 뜻은 아니지만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아기엄마는 스무 살도 안 된 나이에 아이를 낳고 베이비박스에 버렸대요. 몇 년 후 그녀는 후회했지만, 그렇다고 아이를 되찾으려 하지는 않았대요. 대신 남의 아이를 탐내기 시작한 거예요. 특히 행복해 보이는 아이들을 말이에요. 자기가 버린 아이에게 한새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납치한 아기에게 투영한 모양이에요. 범행을 들킬까 봐 가끔 외출할 때면 납치한 아기는 집에 놔두고 인형을 안고 다녔대요. 과연 제가 이 아기 납치범을 이해할 날이 올까요?
그날 밤 저는 두 시간에 한 번씩 알람을 맞춰놓고 일어나 유니콘에 낫을 걸었답니다. 유니콘이 해맑게 웃으며 저를 마구 밟았어요. 꿈에서요.
*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식사를 하다말고 뉴스특보에 혼을 빼앗겼어요. 앵커가 목청을 돋우며 속보를 말해줬어요.
[긴급 속보입니다! 지난해 11월부터 서울 하늬동 주변에서 발생한 영아 납치사건의 진범이 경찰에 자수했습니다. 범인은 27세 미혼 여성으로, 9년 전 자신이 낳은 아이를 버린 후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납치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경찰은 이 여성이 정신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고….]
저는 즉시 로저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로저. 어떻게 한 거예요?”
- 아아, 한가한 시간에 들러서 말해주려고 했는데.
“뉴스에 나왔어요.”
- 애스터코드를 사용했네.
“헐! 그걸, 마음대로 사용할 줄 아시는 거예요?”
- 그 얘기를 하다가 어제…. 아무튼 지금, 으악! 안 돼, 이놈아! 그건 먹는 거 아니야!
수화기 너머는 굉장히 부산한 것 같았어요.
“유니콘은 우리 집에 있는데 거긴 왜 그렇게 시끄러워요?”
- 유니콘? 그 녀석이 거기에 간 거야?
“네.”
- 그럼 이따가 갈 테니 그때까지만 놔두게.
종료 버튼 누를 시간도 없는지, 내 팔자가 어쩌다 이렇게 꼬였냐는 둥 하는 로저의 혼잣말과 함께 준이 울음소리가 고막을 울렸어요. 귀청이 떨어질 것 같아서 먼저 전화를 끊었어요.
은별이가 물었어요.
“어떻게 한 거래요?”
“애스터코드를 사용했대.”
“그게 사람 뇌도 조종할 수 있는 건가요?”
“나도 잘 몰라. 이따 와서 설명해준대.”
은별이가 시금치 된장국에 밥을 말면서 혼잣말로 투덜거렸어요. 제 귀에는 훤히 들렸지만요.
“그냥 전화로 말씀하시지. 별걸 다 핑계 삼아 매일 드나들어, 매일.”
“아, 아무튼 잘 해결된 것 같지?”
“이제 형도 사람 함부로 믿지 마세요. 그런 여자한테 형의 아까운 자비를 베풀었다고 생각하니 속상해요.”
그 말을 듣고 있자니 저는 좀 심란했어요. 어제 은별이가 했던 말이 생각났거든요.
난 얼굴도 모르는 아기들 부모보다 형이 더 중요하거든요.
너 때문에 위험해졌다고! 그러니까 함부로 울지도 말고 떼쓰지도 말고 죽은 듯이 있어!
바르고 밝은 아이라서 마음의 병도 없을 거라 단정한 게 실수였을까요?
“은별아. 내가 그 여자한테 준 건 자비가 아니야.”
은별이는 깍두기를 아작거리며 나를 봤어요. 지금 할 말은 아니지만, 그 깍두기는 이틀 전에 제가 직접 담근 거랍니다. 처음 도전해본 김치인 만큼 맛있게 익은 걸 보니 무척 뿌듯하지 뭐예요. 톡 쏘는 맛이 일품이에요. 무엇보다도 은별이가 아주 잘 먹는답니다.
“자비가 아니면요?”
“응? 뭐가? 아아, 그래. 형은 만인에게 자비를 베풀 정도의 성인군자가 아니잖아. 나는 그냥 커피숍 주인이고, 그 여자는 그 순간 배가 고픈 손님일 뿐이었어.”
“그래서요?”
“저 사람이 도움을 받을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그런 걸 판단하는 건 내 몫이 아니라는 뜻이야.”
은별이는 시큰둥한 얼굴로 깍두기만 아작거렸어요.
“그런 건 모르겠고, 난 그냥 형이 아까워요. 형이 딴 사람한테 신경 쓰지 말고 나만 쳐다봤으면 좋겠어요.”
“뭐…?”
“야옹! 가뜩이나 입맛 없는데 닭살 돋는다.”
“조용히 아침이나 드세요. 엇, 거기 나나는 왜 안 먹고 뒹굴거리죠?”
“나나는 우유를 더 좋아해요. 잠깐만요. 내가 줄게요.”
은별이가 발딱 일어나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냈어요. 익숙하게 포트에 붓고 인덕션 온도를 60도로 맞춰놓네요. 고양이들 돌보는 거 보면 세상 다정한데 말이죠.
그나저나, 묘하게 기분 좋은 말이에요.
난 그냥 형이 아까워요. 나만 쳐다봤으면 좋겠어요.
혹시 지금 제가 웃고 있나요? 칫, 쬐끄만 게. 사람 마음 움직이는 법을 안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