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46화 (46/103)

<46화>

“하나만 약속해.”

제가 그렇게 말하자 은별이는 말간 눈으로 저를 쳐다봤어요.

“뭘요?”

“다시는, 어떤 경우가 닥치더라도, 절대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은별은 조금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어요.

“알겠어요.”

“제주도 때도 그렇고, 너 은근히 거짓말 잘해.”

제 말에 은별이가 화들짝 놀라 외쳤어요.

“아니에요! 나 거짓말 잘하는 편 아니에요.”

“우리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두 번이나 거짓말했잖아.”

“그건…!”

부러 싸늘한 표정을 해보이자 은별이가 얼굴까지 붉히며 변명을 늘어놓네요.

“그건, 평범한 거짓말과는 경우가 다르다고 생각해요.”

“아니, 난 거짓말은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하얀 거짓말이니 빨간 거짓말이니, 그런 건 일종의 핑계고 눈속임이야.”

단호하게 말하고 났는데, 은별이가 뭐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렸어요.

“뭐라고?”

“아니에요. 아무튼 알겠어요. 죄송해요.”

“다신 안 그럴 거지?”

“네….”

“대답이 뭐 그래?”

“네!”

저는 아이가 기죽지 않도록 이내 표정을 풀고 머리를 쓰담쓰담해주었어요. 역시나 애는 애네요. 금세 배시시 웃으며 해맑은 은별이로 돌아왔어요.

“플럼버에는 유니콘이 흔해요?”

“아니. 플럼버에서도 유니콘은 멸종 위기 동물 중 하나야. 암컷이 평생 새끼를 한두 마리밖에 낳지 않는데다, 수컷은 의외로 호전적이라 자기들끼리 붙으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경향이 있거든. 그래서 결투 중에 죽는 수컷이 상당히 많지.”

“우와! 유니콘의 결투라니, 완전 게임 속 얘기 같잖아요!”

“당연히 유니콘이 거리를 막 돌아다니는 건 아니야. 지구로 치면 국립공원 같은 곳에 살지.”

“아무튼 우리가 동물원에 가서 사자나 코끼리를 보듯이 볼 수는 있는 거죠?”

“그렇지. 플럼버의 동물원은 그냥 자연 생태계 그 자체거든. 특수 차량을 타고 자연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거야. 차량도 안전하고, 만약 위험해지면 대부분 순간이동이 가능하니까 지금까지 사고는 한 번도 없었어.”

“너무 재미있겠어요.”

모처럼 추억 돋네요. 저도 어릴 적에는 동물원을 좋아했답니다. 아빠와 제가 유일하게 싸우지 않고 취향을 공유한 부분이기도 하지요.

바움바우 무리와 사막을 달릴 때였어요. 바움바우는 지구의 코뿔소와 비슷한 동물이에요. 수백 마리가 무리 지어 다니기 때문에 홀로 사냥에 나선 라트라슈가 오히려 짓밟혀 죽을 때도 있지요. 아, 라트라슈는 사자의 다섯 배쯤 되는 몸집에 아주 난폭한 맹수랍니다.

우리는 사방이 특수 방탄유리로 만들어진 관광용 지프를 타고 바움바우 떼와 나란히 달리고 있었어요. 그때 저는 열 살이었고, 아빠는 근사한 금발을 휘날리며 환하게 웃고 있었죠.

“아빠! 라트라슈는 왜 바움바우를 잡아먹으려고 해?”

“그게 라트라슈와 바움바우의 운명이야.”

“잔인해.”

“운명을 거스르는 게 가장 잔인한 거야.”

아빠가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런 말을 한 건 아닐 거예요. 아마도 어린 아들에게 멋있어 보이려고 한 말이겠죠. 폼 잡는 데는 예나 지금이나 필립 블랑슈만 한 사람이 없으니까요.

어느새 루나커피에 도착했네요. 대문 앞에 미니밴이 멈춰 섰어요.

은별이는 위층으로, 저는 가게로 들어왔어요. 가게에는 세윤이가 와 있었어요. 세윤이 어깨가 축 처져 있는 게 아무래도 오디션 결과가 나온 모양이에요.

“이제 오세요?”

“응. 세윤 씨, 미안. 볼일이 좀 있어서 늦었어.”

“괜찮아요.”

“희상이는 언제 갔어?”

“정시에 퇴근했어요.”

“에릭이랑 같이 나가든?”

“네.”

위로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고 있는데 세윤이가 먼저 입을 열었어요.

“저 떨어졌어요.”

“어…? 정말?”

“네. 합격한 친구 보니까 굉장히 잘생겼더라고요.”

“설마, 세윤 씨보다 잘생긴 남자가 있다고?”

제 말에 세윤이 헤벌쭉 웃네요.

“에이, 사장님이 그런 말씀 하시면 되레 기분 나빠져요.”

“정말이야. 난 세윤 씨보다 잘생긴 남자를 본 적이 없어.”

물론 이건 하얀 거짓말이에요. 세윤이는 무척 잘생긴 아이지만 제가 본 남자 중에 가장 잘생긴 건 아니거든요. 하지만 잘은 몰라도 배우가 되는 데에 잘생긴 외모만 필요한 건 아닐 거예요.

“너무 실망하지 마. 이제 시작인데 이런 일로 일일이 실망하면 배우 어떻게 해?”

제 말이 위로가 되었나 봐요. 세윤이 얼굴이 환해졌네요.

“그렇죠? 이런 일에도 익숙해져야 하는데.”

“흠흠!”

이건 은별이의 헛기침 소리예요. 어느새 또 내려와서 어른들 틈에 끼려 하네요. 귀엽게.

“넌 공부나 하지 뭐 하러 또 내려와?”

“틈틈이 공부해요. 걱정 마세요.”

“공부란 틈틈이 하는 게 아니야. 본격적으로 하는 거지.”

“저 아직 초등학생이라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우리 형이 그랬는데.”

제, 제가, 그랬죠. 그랬습니다. 할 말이 없군요. 어쩔 수 없이 은별이가 하는 대로 놔두고 말았어요. 곧 손님들이 들이닥쳐 정신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세윤이가 퇴근한 후 은별이와 둘이 말 한마디 못 나누고 일했어요. 이런 날이 있답니다. 손님이 끊이지 않고 발길이 이어지는 날이요. 겨우 문 닫을 시간이네요.

마침맞게 로저가 가게로 들어왔어요. 저도 모르게 풉 웃고 말았어요. 테이블을 닦던 은별이도 풉 웃었어요. 꼭 로마의 신이 베이비 시터를 하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키가 큰 로저가 조그만 준이를 안고 있으니 고목에 매미라는 게 저런 거구나 실감도 났고 말이죠.

로저는 눈살을 찌푸렸어요.

“팔자에 없는 보모 노릇을 하고 있는데, 웃어?”

은별이가 얼른 웃음을 거두고 말했어요.

“죄송해요.”

로저는 끄응, 소리를 내며 빈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어요. 은별이가 눈웃음을 살살 치며 말했어요.

“준이가 아저씨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끔찍한 소리 마라.”

“운동화 예쁘네요. 아저씨가 골라줬어요?”

“아니, 판매원이.”

준이는 빨간색 운동화를 신고 있었어요. 아닌 게 아니라 인형 발처럼 예쁘네요.

“야옹. 아들 이름이 뭐야?”

종일 안 보인다 했더니 필립이 나타났어요. 로저가 성을 버럭 냈어요.

“누가 아들이라는 거야! 얘는 은별이 동생이야. 사촌 동생.”

“그래? 혹시 자네 아들인데 쑥스러워서 은별이랑 짜고 구라 치는 거 아니고?”

“어우, 어우.”

저는 준이에게 물었어요.

“준이는 뭘 좋아하니?”

아이는 어색한지 로저의 목에 매달린 채 눈만 깜빡였어요. 로저가 대신 대답했어요.

“탕수육은 무척 좋아하더군. 낮에 중국 음식을 시켜줬는데 잘 먹더라고.”

“세상에, 이 조그만 아이한테 중국 음식을 줬다고요?”

“잘만 먹더라니까.”

“애한테 그런 음식을 주면 어떡해요?”

“잘만 먹….”

“그럼 저녁에는 건강식을 준비해야겠어요. 은별아, 된장국이나 끓일까?”

“좋아요.”

“야옹, 된장국이래.”

“루나. 나는 남은 빵 있으면 주게.”

“남은 빵이 어디 있어요? 루나커피는 매일 모든 빵과 디저트가 매진이랍니다. 어른답지 못하게 애들 앞에서 반찬 투정하지 말고 올라오세요.”

그날 저녁은 시금치 된장국에 고등어를 구웠어요. 된장국이라면 딱 질색이라던 로저도 아주 잘 먹었어요. 은별이랑 준이도 잘 먹네요.

준이는 은별이가 생선 가시를 발라 밥에 놓아주면 야무지게 떠서 조그만 입을 잘도 오물거렸어요. 아이가 아이를 돌보다니, 그 모습을 보니 안쓰러웠어요.

그나저나 저녁을 다 먹을 때까지도 에릭은 나타나지 않았어요.

“에릭은 안 올 건가 봐요.”

“영화 티켓 예매하는 걸 봤는데.”

“저는 에릭이 희상이를 만나는 것도, 한국으로 오는 것도 반대예요.”

“야옹, 또 시작이다. 네게 반대할 권리가 없다니까.”

그때 로저가 말했어요.

“루나. 지금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네.”

“아, 그렇지. 애스터코드 말인가요?”

“그래. 대체 누가 애스터코드를 알아내 실험까지 한 건지 생각해봤네.”

“애스터코드가 뭐예요?”

은별이의 질문이었어요. 로저가 대답해줬어요.

“지구에서는 흔히 이진법이라 불리는 코드 체계를 쓰지? 그것처럼 플럼버에서는 애스터코드를 쓴단다. 0의 반값과 1의 반값 정도에 해당하지. 도합 네 개의 숫자를 조합해 암호를 만드는 건데, 지구에서 쓰는 체계보다 적어도 백만 배는 정교하다고 보면 돼.”

“그 남자가 이걸 이용한 피리를 썼다니, 확실히 우린 들킨 걸까요?”

제 질문에 로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쩌면 플럼버에서 우리를 찾으러 온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그 교신을 저들이 잡아낸 거고 말이야.”

“그건 정말 희소식이네요!”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네. 지금 이 상황을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가 플럼버에 교신을 보낼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오! 그렇군요.”

그때였어요. 눈앞에 좌표가 열리고 워튼 씨가 나타났어요. 지금 이 좌표는 일종의 휴대폰 같은 거예요. 영상통화 정도라고 보면 되는 거죠.

“워튼 씨! 웬일이세요?”

- 큰일 났네, 루나. 조르주가 사라졌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실은…. 내가 지금 프랑스에 와 있거든.

“그 할머니 때문에요?”

나도 모르게 대뜸 말이 나와 버렸어요.

- 그…보다, 조르주가 사라졌다고.

“야옹, 자살했나?”

- 아니야, 필립. 엊그제 나랑 통화할 때만 해도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어. 나를 위해 아주 좋은 와인을 남겨두겠다고 했단 말이야. 내가 방문하는 날짜에 맞춰 굳이 가출까지 해가며 자살할 리는 없잖아.

맞는 말이에요.

“신고해야 할까요?”

제 말에 로저가 말했어요.

“신고라니, 그보다 좌표를 이용해 우리가 찾아보는 편이 빠를 거야.”

- 그건 로저 말이 맞네. 아무튼 나는 여기서 조르주를 찾아볼 테니 자네들도 좌표를 좀 봐주게.

로저가 대답했어요.

“알겠습니다, 워튼 씨. 조심하세요.”

이번에도 그 할머니 얘기는 듣지 못했네요. 지금 그게 문제는 아니지만.

로저는 좌표 탐색을 해보겠다며 서둘러 돌아갔어요.

나중에 듣고 보니 에릭은 그날 외박을 했대요. 설마 제가 하는 이 저속한 생각이 들어맞지 않기를 바랄 뿐이에요.

로저가 돌아간 후 식탁을 치우며 은별이가 물었어요.

“위험한 일이 생길까요?”

걱정스러운 그 얼굴을 보니 괜스레 미안해졌어요.

“아니야. 그럴 리 없어.”

“형.”

“응?”

“형도 나한테 거짓말하지 마요. 하얀 거짓말도요.”

지금 저 한 방 먹은 거죠? 씁쓸하지만 인정. 하얀 거짓말은 필요하네요. 우리는 서로의 생각을 읽으며 웃었어요.

“저들이 정말 나쁜 짓을 할 생각이었으면 벌써 일을 저질렀을 거야.”

“그럴까요? 그럼 조르주 아저씨는요?”

“음…. 조르주는 원래 우울증이 있어서, 어쩌면 혼자 있고 싶어서 여행 중일지도 몰라.”

별로 확신은 없지만 그렇게 믿고 싶었어요.

“아무튼 로저가 찾아낼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자.”

“알겠어요.”

그때 테이블 위에 앉아있던 필립이 꼬리로 어딘가를 가리켰어요.

“야옹, 저 여자 뭐냐?”

그쪽을 돌아본 은별이가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어린이처럼 비명을 질렀어요.

“으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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