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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커피 2호점-45화 (45/103)

<45화>

“그리고 나는 함부로 누굴 막 비웃고, 그러는 사람 아니거든!”

그동안 파악한 바로, 루나는 자신의 기준을 벗어나는 일이 생기면 참지 못한다. 나를 가족으로 받아들인 이상 어떤 이유에서든 내가 자신을 속이는 일은 금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렇게 흥분한 모습은 처음이라 생소하기도 하고 좀 신기하기도 했다.

융통성이 좀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루나가 꽉 막힌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솔직하게 상황을 설명하면 단번에 이해해줄 것이다. 그래서 유치하다고 비웃음을 살지언정 말해버리기로 했다.

뭣보다 그가 속상해하는 모습을 잠시라도 참고 보기가 힘들었다. 내가 뭐라고 어여쁜 루나를 속상하게 한단 말인가.

“아직은, 나만 받을래요.”

내 말에 루나가 입을 더 내밀었다. 아까부터 루나의 입은 평소보다 훨씬 나와 있었는데 거기서 더 내미니까 약간 화난 오리처럼 보여서 그 와중에도 웃을 뻔했다.

“그러니까, 형이 베풀어주는 은총 말이에요. 아직은 나만 받고 싶다고요.”

그러자 이제 루나는 입을 조금 오므린 채 큼지막한 눈동자를 살살 굴렸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열심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애써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렴 이 판국에 웃으면 망하는 거였다.

“아무리 내 사촌 동생이라도 나누고 싶지 않았어요. 나도 이제 막 형의 가족이 된 거잖아요. 얼마나 됐다고 그 소중한 걸 나눠요? 준이가 아무리 불쌍해도 그러기 싫었어요.”

전혀 짐작도 못 한 대답이었는지 루나는 어벙한 얼굴로 더듬거렸다.

“어… 너랑 나누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내 마음은 그렇단 말이에요. 잠깐 로저한테 신세 좀 지고 욕먹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로저한테 너무 폐를 끼치는 거잖아. 로저는 어린애라면 질색한다고.”

“둘이 벌써 친해졌어요.”

“절대 아닐세!”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 로저가 바로 옆에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무래도 거실에서 엿듣고 있다가 무심코 순간 이동한 것 같았다.

“아저씨! 아무튼 고질병이네요. 엿듣고 리딩하고!”

로저는 몹시 억울하다는 듯이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루나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루나! 이 녀석 버르장머리 좀 보게. 어른을 갖고 논단 말이야. 아주 발칙하기가 이를 데 없다네.”

루나는 시큰둥한 얼굴로 로저를 흘긋 보았다.

“은별이는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예의 바른 아이예요.”

“뭐, 뭐라고? 루나! 지금 이 녀석 하는 꼴을 보고도 편드는 건가?”

“사실을 말하는 거예요.”

“자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어제도 나를 몹시 섭섭하게 하더니…. 나는 그래도 자네를 가족처럼 생각했는데!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닐세.”

그 말에는 루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로저를 보았다.

“제가요? 로저를, 섭섭하게 했다고요?”

“그래. 저 아이가 내 아들이라는 필립의 쉰소리를 아주 그냥 찰떡같이 믿던데!”

“아- 그거요. 난 또 뭐라고. 그럴듯한 말이잖아요.”

“뭐가 그럴듯하다는 거야?”

“그, 그게….”

그제야 뭔가 실례를 범했나 싶었는지 루나가 공허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아저씨는 워낙 미남이잖아요.”

내가 얼른 얘기하자 무채색으로 변해가던 루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로저의 미간에는 아직 주름 두 개가 선연했다. 나는 계속 떠들었다.

“여자들한테 인기 만점일 것 같아서, 아마 그래서 형도 숨겨둔 아들이 나타났나보다 하고 생각했던 거겠죠. 그죠, 형?”

“그래그래! 맞아맞아! 바로 그거였어.”

로저는 나와 루나를 번갈아 꼬나보더니 흥! 하고 팔짱을 끼었다.

“나는 726년 인생에 미남이라는 소리를 수백만 번 들었네. 그런 소리로 얼버무리려 들지 마.”

나는 새삼 궁금해져서 손가락을 꼽아보았다.

“그럼 아저씨는 지구 나이로 서른여섯 정도 되는 거예요?”

“셈은 빠르구나.”

“젊어 보이시네요. 삼십 대 초반으로 보여요.”

루나가 반가운 듯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 어떨 땐 내 또래 같다니까.”

“그게 칭찬인가, 루나?”

“그럼요.”

그때 집안에서 준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깜짝 놀라 뛰어 들어가다가 현관에서 엉망으로 엉겨 넘어질 뻔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진짜로 놀라 자빠질 뻔했다.

“저게 뭐죠?”

루나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로저가 뛰어가 소파 뒤에 숨어있는 준이를 안아 들었다. 준이는 자지러질 것처럼 울어 젖히며 로저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정신을 차린 루나가 낫을 걸었다. 물론 거실 한복판에 앞발을 들고 서 있는 하얀 망아지에게만 건 것이었다.

“오오, 괜찮아. 위험한 동물은 아니야.”

로저가 달래자 준이는 이내 울음을 그치고 훌쩍거렸다. 그리고는 눈물을 잔뜩 머금은 눈으로 굳어있는 망아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준이도 준이지만 나 역시 망아지에게 시선을 빼앗긴 참이었다.

그 망아지는 놀이공원의 회전목마처럼 보였다. 크기도 그 정도였다. 하얀 플라스틱으로 만든 것처럼 온몸이 반질거렸고 은가루를 뿌린 것처럼 반짝거렸다. 얼굴도 상당히 예쁘게 생겼는데, 그보다 더 놀라운 게 있었다.

“와! 유니콘이에요?”

이마 정중앙에 날씬한 아이스크림콘만 한 뿔이 달려 있었던 것이다.

루나가 망아지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맞아. 플럼버의 유니콘이야. 그런데 이게 왜 여기에 있는 거죠, 로저?”

“그게….”

로저는 짐작 가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가 책상 앞의 유리창을 가리켰다. 그 창에는 복잡한 숫자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좌표가 떠 있었다.

“알다시피 나는 좌표와 코드를 연구 중이잖아. 간밤에 제주도에서 가져온 그 피리를 분석하면서 애스터코드를 조합해보았네.”

“애스터코드라니, 그거랑 피리랑 무슨 상관이 있죠?”

“나도 아직은 확실히 몰라. 다만 우연인지 아닌지 피리 소리에 애스터코드가 숨겨져 있다는 건 분명해.”

“네에?”

루나의 어여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나는 두 사람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그저 귀만 쫑긋 세웠다.

“그럼 피리 소리가 이 유니콘을 불러들였단 말인가요?”

“확실히는 모르지만 그런 것 같네.”

두 사람의 대화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이건, 정말, 굉장히 멋졌다. 유니콘이라니! 준이도 언제 겁을 집어먹고 울었냐는 듯 유니콘의 다리를 쓰다듬으며 해실거렸다.

루나와 로저는 여전히 심각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 말은, 피리를 가지고 있던 남자가 애스터코드를 안다는 얘기일까요?”

“심지어 코드를 조합해 뇌 신경을 자극하는 리듬을 만들 수도 있다는 뜻이지.”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듯해서 나는 대화에 끼지 않고 살금살금 유니콘의 등에 기어올랐다. 준이가 부러운지 옹알거렸다.

“형아. 나두.”

“넌 아직 못 타.”

“왜?”

“너무 어려서.”

준이는 굉장히 화난 얼굴로 나를 째려보았다.

“형아, 미버!”

준이가 소리를 삑 지르자 그제야 대화에 심취해있던 두 사람이 우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로저가 손을 내저었다.

“아아, 그렇게 막 올라타면 곤란해.”

“그런데 왜 날개가 없어요? 유니콘은 날개가 있지 않아요?”

“은별아. 어서 내려와.”

루나가 나를 만류하며 손을 흔들었다.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로저가 해주었다.

“날개는 성인이 되면 돋아난단다.”

“진짜요? 멋지네요!”

루나가 재촉했다.

“일단 어서 내려와. 갑자기 낫이 풀리면 위험할 수도 있어.”

“네!”

아쉽지만 루나의 말엔 무조건 복종! 훌쩍 뛰어내렸다.

“이 녀석을 어떡하지?”

로저가 턱을 만지작거리자 루나도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게요. 여기 놔두면 집도 망가질 거고, 금방 들킬 것 같은데.”

“우리가 키우면 안 돼요?”

내 말에 루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에는 이 아이 덩치가 너무 크잖아. 앞으로 더 커질 텐데.”

“계속 낫을 걸어둘 수도 없고…. 정말 걱정이군.”

“우선 커다란 새장에 넣어둘까요?”

“가만 보면 자네는 새장을 참 좋아하는 것 같아.”

“제가요?”

“아무튼 우선 돌아가게. 해결책을 찾아보고 저녁 때 루나커피로 가지. 애스터코드에 관해 자세히 설명해줄게.”

루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잡았다.

“알겠어요. 그럼 준이는 계속 데리고 계실 건가요?”

그 말에 로저가 발끈했다.

“계속이라니, 하루 이틀이라고 했잖아.”

내가 얼른 대답했다.

“그 말이 그 말이에요.”

“그 말이 어떻게 그 말이야? 심장 쫄깃하게 하지 좀 마.”

루나가 말했다.

“준이 일은 우리 입장이 제일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애 부모가 어떻게 될지에 달렸으니까요. 만약 계속 돌보게 되면 로저한테 부탁하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그러자 준이가 울먹거렸다. 나는 서둘러 준이를 향해 말했다.

“괜찮아. 너 보호하려고 그러시는 거야.”

루나가 서둘러 동조했다.

“은별이 형 말이 맞아. 우린 너를 보호하려는 거란다. 넌 아무 걱정 안 해도 돼.”

준이는 눈을 깜빡이며 루나와 로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로저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로저가 ‘신이시여.’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한 바퀴 굴렸다.

그 사이 루나가 집안을 둘러보았다.

“에릭은 계속 여기 있을 거래요?”

“에릭도 할 말이 있다고 했네. 지금 루나커피에 있나?”

“네에- 접착제로 붙여놓은 것처럼 희상이한테 착 달라붙어 계세요.”

“둘이 잘 어울리더군.”

그 말에 루나가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진심이세요? 로저까지 그렇게 말할 줄 몰랐는데. 좋아요. 저도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요. 다 같이 저녁 먹으면 어때요?”

“좋지.”

“가자, 은별아.”

나는 아쉬운 마음에 유니콘의 커다란 눈동자와 눈을 맞추고는 손을 흔들었다.

“안녕.”

그리고 준이에게도 손을 흔들었다.

“이따 보자, 준아.”

그런데 준이 이 녀석이 진짜 삐졌는지 눈곱만한 입을 쏙 내밀고는 로저의 허벅지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로저의 미간이 바짝 좁아졌다. 그가 입속으로 중얼거리는 말을 나는 똑똑히 들었다.

“젠장, 얘가 왜 자꾸 나를 따르는 느낌이지?”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참으며 루나의 손을 잡았다. 아까와는 달리 나를 보는 루나의 눈빛은 평상시대로 다정함이 묻어있었다. 그 눈을 보는 순간 내 입가에 절로 웃음이 번졌다.

“가자.”

“가요.”

잠시 후 우리는 미니밴에 올랐다. 핸들 위에 놓인 루나의 손가락에는 내 손가락과 마찬가지로 아직도 젤리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우리, 엮였다! 그저 이름만 엮인 게 아니라 마음도 엮이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지금 그의 마음은 보호자로서의 마음과 비슷하겠지만 그게 평생 가란 법은 없으니까.

루나가 차를 출발시키며 나를 불렀다.

“정은별.”

“네?”

“하나만 약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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