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세상에서 가장 깊은 샘이 뭔지 아세요?
바로 솔방울 샘이랍니다. 일명 영혼의 샘이라고 불리지요. 이 샘에는 란슬렛이라는 멋진 기사가 살고 있어요. 이 기사의 임무는 솔방울 샘을 정화하는 거예요.
이해하셨을지 모르겠지만, 솔방울 샘은 척추동물의 뇌에 있는 내분비기관이에요. 세로토닌과 멜라토닌을 생성해 적절한 생체리듬을 유지하게 해주지요. 란슬렛은 이 솔방울 샘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이랍니다.
다만 란슬렛은 지구인의 뇌에는 없어요. 플럼버인의 뇌에서만 분비되지요. 란슬렛이라는 호르몬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평온한 감정을 유지하게 만들어줘요. 이 때문에 플럼버인이 악한 성향을 지니지 않는 거랍니다.
그러니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플럼버인의 뇌에도 악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 거예요. 란슬렛이라는 수면제 덕에 잠들어있을 뿐이죠. 아직 사례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만약 솔방울 샘이 고장 나 란슬렛이 제 역할을 못 하게 되면 어떨까요?
왜 이런 말을 하냐고요? 요즘 저는 제 안에 잠재된 악을 느낄 때가 있답니다. 혼자 있을 때, 특히 욕조나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을 때면 눈동자가 저절로 이마 위를 향하곤 해요. 꼭대기 그 안, 솔방울 샘에 루나 블랑슈의 험악한 영혼이 들어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 분노 영혼의 이름은 ‘불타는 드래곤’이에요. 루나 블랑슈의 얼굴을 하고 있고요, 다리 대신 해마 같은 꼬리가 달려있는데 그 꼬리에서 쉴 새 없이 불이 뿜어져 나와요. 제 불길에 못 이겨 늘 팔팔 뛰고 있지만 뭘 더 어쩔 수가 없지요. 지금은 란슬렛이라는 훌륭한 기사가 솔방울 샘을 지키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만약 이 용이 어느 날 탈출에 성공한다면? 솔방울 샘을 빠져나와 란슬렛을 불태워버리고 루나 블랑슈의 뇌 속을 헤집고 다닌다면 어떨까요? 하루아침에 루나 블랑슈는 불타는 드래곤 그 자체가 되는 거예요. 완전히 먹히는 거죠.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냐고요?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끝내 모르고 산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아, 궁금해!”
솔직히 저는 제 인격에 자부심이 있었답니다. 할머니의 가르침 덕분이랄까요. 고상하고 자애로운 할머니를 존경해서랄까요. 늘 닮고 싶었기에 노력했고, 어느 정도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흉내만 냈던 걸까요?
“궁금해 미치겠어!”
저는 정말이지 고상함하고는 거리가 멀었나 봐요. 아주 몹시 세속적인 인간이었어요.
사실 이게 다 지구의, 특히 이 한국의 드라마 때문이랍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애증을 다룬 드라마는 플럼버에서는 본 적도 없고 상상도 해본 적 없었거든요. 참고로, 플럼버에서는 연기하는 로봇이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개인의 취향에 딱 맞춘 드라마를 ‘생성’해 서비스해준답니다. 그것도 꽤 재미있지만 솔직히 한국 드라마와는 비교도 할 수 없어요.
[배속의 그 아이 누구 앱니까!]
“대체 누구 앨까요?”
“야옹, 저 드라마 처음 보냐? 저 남자 애 아니고 그 남자 애잖아.”
“아니, 와삭와삭. 로저가 데려온 아이 말이에요.”
“콜록콜록!”
“엇! 은별아. 우유 마셔.”
우리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로저와 아이를 보낸 후, 늘 그렇듯 나란히 앉아 드라마를 시청 중이었어요. 은별이가 좋아하는 쿠키맨 과자와 제가 좋아하는 새우 과자를 씹으면서 말이죠.
그런데 저는 드라마를 보면서도 로저의 이야기가 너무 궁금한 거예요. 거듭 말하지만, 이 저속한 취향은 오로지 한국의 드라마 때문에 발굴된 면모랍니다. 맹세코 플럼버에서는 이렇게까지 남의 연애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어요.
“야옹. 그게 아니라, 때가 되어서 그래.”
“무슨 때요?”
“네 짝을 만났으니 연애 세포가 깨어난 거라고.”
“콜록콜록!”
이번 기침은 제 것이에요.
“아빠, 제발! 제발요.”
“야옹, 네 배우자는 내 말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뭘.”
그런데 왜 은별이가 저를 보며 실실 쪼개는 거죠? 볼까지 발갛게 물들이고.
가끔 요 녀석이 우리의 대화를 알아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 있죠. 당연히 그럴 리는 없는데도 말이에요.
“은별아. 이제 그만 자자.”
“오늘 형이랑 같이 자면 안 돼요?”
“안 돼!”
“칫. 알겠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투덜거리면서도 말은 잘 들어요.
“잘 자.”
“필립도 안녕히 주무세요.”
“야옹.”
“야오옹!”
마지막 야오옹은 새장 안의 미오가 내지른 비명이었어요.
“왜 그래?”
“야옹, 불면증이래.”
“눈곱만한 게 연애질이나 하고 다니니까 불면증이 오지.”
“야옹, 이제 그만 풀어줘라.”
좀 고민이 됐어요. 솔직히 저렇게 가둬놓고 있는 제 마음도 좋지는 않았으니까요.
“좋아요. 풀어줄게요. 삭발 얘기는 잊지 마세요.”
“야옹, 싸가지 없는 놈! 이 애비의 가장 큰 장점은 미모인데 그걸 꼭 흠집 내려고 한단 말이야.”
저는 새장을 열고 미오를 품에 안았어요.
“오늘 밤은 형이랑 자자.”
“야옹….”
그래도 고분고분 안겨 오니까 사랑스러운 마음이 들어요. 핏줄이 뭔지.
그날 밤 저는 잠들기 전까지 미오를 데리고 한동안 주절거렸어요.
“그 아줌마가 왜 좋아?”
“야옹.”
미오는 라라가 너그럽고 상냥해서 좋대요.
우리 애들은 엄마가 누군지 모르거든요. 필립은 아느냐고요? 필립이 사귀고 다닌 고양이가 백 마리쯤 되는데 그걸 알 리가 있겠어요? 어느 날 눈 떠보니 집 앞에 새끼고양이가 꼬물거리곤 했지요. 아마 그래서 미오는 엄마 같고 누나 같은 여자가 좋은 모양이에요. 비슷한 이유로 저랑 여자 친구 취향까지 닮아서 영 씁쓸하네요.
*
다음날 오후였어요.
시무룩한 얼굴로 세윤이가 카페로 들어왔어요. 그 얼굴을 보니 오디션 결과가 별로 좋지 않나보다 하는 짐작이 갔죠.
“안녕하세요….”
“세윤 씨. 얼굴이 왜 그래?”
“아무래도 오디션 떨어질 것 같아요.”
“왜, 망쳤어?”
“네. 제 귀에도 목소리 완전 이상하고 얼굴에 경련도 일어나고, 한마디로 발연기였어요.”
“저런! 그래도 아직 확실히 결과가 나온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죠.”
“그럼 기다려봐. 그리고 이번에 안 되더라도 기회는 또 있겠지. 세윤 씨 이제 시작인데 고작 실패 한 번에 기죽으면 안 되는 거 아냐?”
그 말에 세윤이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당연하지.”
“사장님은, 이럴 때 보면 정말 천사 같으세요.”
“응…?”
“늘 천사 같지만 특히요.”
그때 엄청난 목소리가 들렸어요.
“형!”
“깜짝이야!”
놀라자빠지는 줄 알았지 뭐예요. 은별이네요. 외계인, 아니 악당 외계인이 쳐들어왔다고 말할 것 같은 얼굴로 은별이가 저를 쏘아보며 말했어요.
“저 손님께서 바나나 크림 케이크 찾으세요!”
“그래?”
바나나 크림 케이크는 바나나 모양의 틀에 바나나를 넣어 구운 케이크로, 위에 바나나 크림이 살포시 올라가 있답니다. 손이 좀 가지만 아주 맛있죠.
저는 흐뭇한 마음으로 바나나 크림 케이크를 접시에 담고 초콜릿 시럽과 시나몬 가루를 뿌렸어요. 특별한 케이크를 주문하셨으니 직접 가져다드리려고 테이블로 향했어요.
“실례합니다. 바나나 크림 케이크 나왔습니다.”
예의 박수 세례가 쏟아지네요.
“어머! 사장님이 직접 가져다주시다니. 케이크 너무 예쁘네요.”
“감사합니다.”
“혹시 레시피는 비밀인가요?”
“케이크 굽는 법이요? 꼭 알고 싶으시면 알려드릴게요.”
“정말요? 부탁합니다!”
저는 간략하게 케이크 굽는 법을 말씀드렸어요. 두 분은 열심히 휴대폰을 두들기며 받아 적었어요.
“꼭 구워보고 사진 올릴게요. 루나 사장님이 직접 알려준 레시피라고 태그도 달고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실은 제가 구독자 15만 명의 요리 채널을 운영하고 있거든요.”
“아, 네에.”
“루나커피를 촬영해서 제 채널에 올리면 안 될까요?”
“네에? 아뇨. 저희는 손님이 더 늘면 소화할 수가 없어서요.”
두 분은 아쉬운 얼굴이었지만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런데 사장님, 여자 친구 있으세요?”
“네에? 아뇨.”
“혹시 연상 좋아하세요?”
“어떻게 아셨어요?”
그러자 엄청난 탄성과 함께 두 여자분의 입에서 동시에 질문이 터져 나왔어요.
“저는 어때요?”
순간 제가 실언을 했음을 뒤늦게 깨달았어요.
“아, 그, 저-”
그때 은별이가 쪼르르 달려왔어요.
“형! 빵이 타요! 불날 것 같아요!”
“어? 그래? 큰일이네! 그럼 실례합니다!”
재빨리 카운터로 돌아오면서 은별이만 보이게 엄지를 들어 보였어요. 은별이도 싱긋 웃네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연상녀가 제 애인 취향은 아닌 것 같아요.
그때 느닷없이 다른 생각이 났어요. 로저가 주웠다는 그 아이를 어디에서 봤는지 기억난 거예요. 그러자 은별이와 로저의 행동이 모두 이해가 갔어요.
저는 조금 성급하게 은별이를 불렀어요.
“은별아!”
은별이가 우유 거품기의 정지 버튼을 누르고 돌아보았어요.
“네?”
카운터 앞에는 손님들이 줄을 서 있었어요. 제대로 얘기를 나눌 상황이 아니네요.
“아, 아냐. 세윤이 형 왔으니까 넌 이제 올라가서 공부해.”
은별이가 얼굴을 찡그렸어요. 변명거리를 찾는 얼굴이었죠.
“공부는 좀 있다가 해도 돼요….”
“너 성적 별로잖아.”
좀 야비했나? 제 싸늘한 말투와 표정에 은별이는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는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렸어요.
“알겠어요….”
은별이가 2층으로 올라간 후, 저는 계속 생각해봤어요.
사촌 동생을 찾았으면 우리 집에 데려오면 되지, 왜 로저와 짜고 그런 일을 벌였을까요? 저는 좀 섭섭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했어요.
평소 로저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더니 그새 정이라도 들었나? 왜 제가 아닌 로저한테 그런 일을 부탁한 걸까요? 그리고 로저는 또 뭐야? 은별이를 못내 탐탁지 않아 했던 것 같은데 무슨 변덕이람.
아무튼 그날 남은 시간은 괜스레 심술이 나서 손님들한테 별로 웃어주지 못한 것 같아요. 급기야 세윤이가 물었어요.
“사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응? 아니. 왜?”
“아까부터 기분이 안 좋아 보이세요.”
“그래? 아무 일 없는데.”
“그럼 다행이지만요.”
그쯤에서 눈치 빠른 세윤이가 화제를 돌렸어요.
“그런데 저분들, 좀 이상하지 않아요? 계속 우리를 감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세윤이가 가리킨 곳에는 남자 손님 두 분이 마주 앉아 있었어요. 저와 눈이 마주치자 두 남자는 서로 눈길을 주고받고는 카운터로 다가왔어요. 한 분은 덩치가 크고 한 분은 작은 편이네요.
덩치 큰 분이 바지 뒷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보이며 말했어요.
“경찰입니다. 이 카페 사장님 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