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험담을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만약 내 다리가 그만큼 길다면 그것보다는 그럴듯한 거짓말을 했을 거라고 장담한다. 물론 다리 길이와 거짓말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논리적인 대답은 할 수 없지만.
“길에서 주웠네.”
당연히 루나는 특유의 그 벽 같은 얼굴을 했다. 그 순간 루나가 한 생각을 나도 읽었다고 자신한다. 나도 일종의 리딩을 했다는 뜻이다.
루나 생각: 내가 은별이를 주운 지 얼마나 됐다고 로저까지 애를 길에서 주워?
다행히 로저의 등에 업힌 준이는 지쳤는지 곯아떨어져 있었다. 깨어 있으면 단번에 나를 형아, 형아 불렀을 테니 금방 들켰을 거였다.
그나저나 그새 준이는 굉장히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아무리 패션을 잘 모르는 내가 봐도 과할 정도였다. 게다가 이 컬러감 뭐지? 무지 패셔너블한 사람들이나 소화할만한 파란 셔츠에 주홍색 바지? 아직 때도 덜 빠진 애한테는 영 어울리지 않았지만, 아무튼 마음은 고마웠다.
“애를, 길에서, 주웠다고요? 로저가?”
“음. 그런데 얘가 은별… 아니, 자기 형을 미친 듯이 찾기에 달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
“그럼 여기로 올 게 아니라 파출소로 가야죠.”
로저의 고개가 45도쯤 기울어지자 루나가 실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우리는 마음대로 길에서 애를 주우면 곤란하잖아요. 그건 로저가 늘 당부하던 일 아닌가요? 가급적 나서지 말고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말라고요.”
“그, 그랬지. 그런데 우리 지금 뒷문이 국경이라도 된다는 듯 문지방에 서 있는데 언제까지 여기에 서서 대화를 나눠야 하는 건가?”
“아, 내 정신 좀 봐. 들어오세요.”
루나가 옆으로 비켜섰다. 로저가 약간 처량 맞은 얼굴로 나를 흘긋 보았다. 나는 끝까지 비밀을 유지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살살 저었다.
“자기 형이랑 길이 엇갈려서 서로 헤매고 있는 것 아닐까요? 아무래도 파출소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우리가 위험할까 봐 아이 형을 찾아주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잖아요. 지금 제가 미니밴으로….”
“아, 아니, 루나. 내가 리딩을 해봤는데, 그건 아니더라고.”
“로저.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함부로 리딩하고 그러면 안 돼요. 제발 자제 좀 해주세요. 어디 불안해서 얼굴 보고 얘기하겠나.”
“파출소에 신고 안 하고 집을 찾아주려면 별 수 있나?”
“그래서, 집이 어딘데요?”
“시골인데, 엄마가…. 음, 애 엄마가 버렸어.”
“네에?”
그때 준이가 깨어났다.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침 루나는 내게서 등을 보이고 있었으므로 나는 두 팔을 번쩍 들어 준이를 향해 X자를 그렸다.
“형아…?”
준이의 시선을 따라 루나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기지개를 켜는 척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둘러댔다.
“내가 자기 형아랑 닮았나 봐요.”
내 말에 루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로저를 향해 돌아섰다.
“밥은 안 먹여도 돼요?”
“죽을 먹였는데.”
“죽? 로저가 종종 먹는 즉석 죽 말이에요?”
뭐야, 마법이라도 써서 직접 만든 줄 알았더니 겨우 즉석 죽이었어?
“홈쇼핑에서 산 걸세. 일반 마트에는 팔지도 않는 고급 레토르트 식품이지.”
루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복도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올라오세요. 애 밥은 제대로 먹여야죠.”
“형아….”
준이가 또 나를 불렀기에 나는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검지를 입술에 댔다. 다행히 루나는 음식 준비를 할 생각에 마음이 바쁜지 서둘러 계단을 오르는 중이었다.
“우리 저녁에 김치찌개 먹었거든요. 꽤 맛있었어요. 그걸 해줄까요? 아니지! 애한테 너무 맵겠네요. 그럼 빨리 할 수 있는 걸로, 음…. 오므라이스나 할까요?”
“그럼 하는 김에 내 것도 좀 주게.”
“네에-”
목소리만 남기고 루나가 사라지자 나는 즉시 핀잔을 주었다.
“지금 여기서 오므라이스 먹을 때예요?”
“허! 요 녀석 보게. 필립 말대로 배은망덕한 녀석일세.”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도와주실 거면 확실히 해달라는 뜻이에요.”
“점점.”
“형아…. 요고가 오데야?”
준이가 칭얼거리자 로저가 미간을 좁히며 내게 말했다.
“갑자기 애를 보다 보니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지만 제일 불편한 건 이거야.”
“뭐요?”
“무슨 말인지 알아먹을 수가 없다. 뭐라는 거냐?”
“여기가 어디냐고요.”
나는 준이를 돌아보았다.
“준아. 형이 지내는 곳이야. 이제 여기가 형 집이야.”
“와… 우레우레해.”
로저가 내게 물었다.
“뭐라는 거냐?”
“으리으리하대요.”
“초마카 에푼 엉이 누나야?”
“누나?”
“좀 아까 예쁜 형이 루나냐고요. 맞아, 준아. 그런데 우리가 사촌 형제 사이라는 건 아직 그 형한테 말하면 안 돼, 알겠지?”
“왜…?”
“형이 폐를 너무 많이 끼쳤거든. 너까지 보살펴달라고는 못 해.”
로저가 혼잣말처럼 투덜거렸다.
“녀석, 어린 동생한테 매정하게도 말하네.”
“사실을 숨김없이 말하는 거예요. 준이도 팔자 편하기는 글렀으니 될수록 응석은 빨리 떼는 게 좋아요.”
로저는 못마땅한 듯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너무 조숙해. 눈곱만한 게.”
그때 루나의 목소리가 가게에 울렸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같았다. 종종 사용하는 목소리 분리법이라는 마법이었다.
- 로저, 은별아. 식사 준비 다 됐어요. 아가 데리고 올라와요.
나는 준이를 향해 한껏 엄중한 표정으로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해보였다. 촉촉한 눈망울로 나를 보던 준이가 입을 삐죽이며 로저의 목덜미 뒤로 숨었다.
주방으로 올라가니 식탁에는 먹음직스러운 오므라이스 세 접시가 놓여있었다.
“앉으세요.”
“왜 세 접시예요?”
내 물음에 루나가 잔에 주스를 따르며 말했다.
“응. 우린 저녁 먹었으니까 반씩 나눠 먹자고.”
“난 배부른데.”
“이렇게 맛난 거 보면 또 먹고 싶어지잖아. 자, 형이랑 반씩 먹자. 케첩 지그재그로 뿌릴까?”
루나와 나는 나란히 앉았고 로저가 맞은편에 앉아 무릎 위에 준이를 앉혔다. 준이는 야무지게 숟가락을 집어 오므라이스를 공략했다. 아무튼 먹을 때만큼은 굉장히 씩씩한 애였다.
“오, 잘 먹는구나! 기특해라.”
그러면서 루나도 아주 잘 먹었다. 필립이 어슬렁거리며 들어왔다.
“야옹, 루나. 이제 밤참까지 먹는 거냐? 로저, 루나가 요즘 엄청 먹어대는데 키가 안 커.”
“밤늦게 미안하네. 그나저나 아주 맛있군. 루나 요리 솜씨는 언제나 일품이야.”
“야옹, 근데 그 아이는 누구야?”
“우물우물. 길에서 주웠대요, 아빠.”
“야옹, 인심도 좋네.”
“아빠도 드실래요?”
“밤 아홉 시에 뭘 먹는 인간은 털을 밀어버려야 해.”
“별꼴이야. 아빠만 안 드시면 되지 왜 악담이에요? 은별아, 왜 안 먹어?”
나는 심란해서 뭘 먹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로저는 오래 아이를 봐줄 만한 사람이 아니고, 그렇다고 경찰서에 가자니 내가 지금 여기서 지내는 이야기를 다 해야 할 것 같고, 그렇게 되면 루나한테 좋지 않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신경도 쓰였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경찰서에 갈 일이 자꾸 생기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접시를 말끔히 비운 준이가 주스까지 벌컥벌컥 마셨다. 밥을 우물거리며 준이를 빤히 보던 루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낯이 익네. 어디서 봤지?”
어떻게 된 걸까. 루나가 준이를 어디서 봤다는 거지?
‘아….’
그러고 보니 이모네 집에 와서 타임 낫을 걸었을 때 봤겠구나. 어쩌지?
준이가 내 사촌 동생인 걸 알면 루나는 준이까지 돌보겠다고 할 것이다. 내가 부탁하지 않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준이가 불쌍하기는 하지만, 내게 소중한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루나였다. 그러니 준이는 루나에게 신세 지지 않고 내 힘으로 돌봐야 한다. 이모에게 연락이 닿을 때까지만이라도 말이다.
그런 생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필립이 로저의 옆 의자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야옹. 이실직고해, 로저.”
“응…? 뭘?”
“자네 아들이지?”
“뭐어?”
엉뚱한 말에 나도 놀라 소리치고 말았다.
“네에?”
쨍그렁!
이 요란한 소리는 루나의 손에서 접시로 숟가락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루나의 눈이 당구공만 해졌다. 나는 그 얼굴을 아주 잘 알았다. 드라마에서 자극적인 내용이 나올 때 루나가 ‘초집중’하는 표정이었다.
“아들? 진짜 로저 아들이에요? 오 마이 갓!”
“야옹, 루나 또 좋아 죽네.”
“내, 내가 뭘 좋아 죽어요….”
로저가 미간을 잔뜩 좁히며 필립을 쏘아보았다.
“필립. 제발 정신 사납게 말장난 좀 치지 말게.”
로저의 무릎에 앉아있던 준이가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형아….”
“아기가 졸린가 봐요. 아저씨. 얼른 가보세요.”
조마조마해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는데 루나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로저에게 말을 건넸다.
“로저. 저는 로저를 믿지만, 혹시라도 속에 담아둔 말이 있으면 언제든 하세요. 뭐든 들어드릴게요. 그리고 무덤까지 가져갈게요. 전 로저의 둘도 없는 친구라는 거 잊지 마세요.”
“야옹, 루나 궁금해 죽는다.”
“아빠. 그래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저는 그저 로저와 아이가 걱정돼서….”
셋이서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준이만 주시하고 있었다. 준이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더니 급기야 감겨버렸다. 로저의 품에 고개를 폭 떨어뜨리자 로저가 그새 꽤 능숙해진 태도로 아이를 안아 들었다.
“이만 가봐야겠네. 아이 얘기는 기회가 닿는 대로 말해주겠네. 루나, 은별아. 잘 자라.”
“엇, 그냥 가시게요? 비밀을 너무 오래 간직하면 병 돼요!”
그러나 로저는 이미 주방을 나간 후였다. 루나는 무척 실망한 듯 한숨을 푹 쉬었다. 마침 나도 한숨을 푹 쉬었는데 그걸 오해한 루나가 나에게서 동지애를 확인하려 했다.
“너도 궁금했지? 사실 난 로저가 언제쯤 연애를 할지 꽤 궁금했거든. 솔직히 로저가 좀 잘 생겼니? 저렇게 미남인 주제에 사귀는 아가씨가 하나도 없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이제 제대로 된 연애담을 들어보나 했는데.”
“그렇게 자꾸 지구인과 사귀고 다니면 위험하다면서요?”
“사람들이 어디 나 같아야 말이지. 미오처럼 새장에 가둬둘 수도 없고, 이왕 일어난 일이면 서로 터놓고 얘기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안 그래?”
“안 그래요.”
“야옹, 그러게. 어째 은별이보다도 철이 없냐? 남의 연애담은 왜 그렇게 들으려고 껄떡거려? 누가 사적인 얘기를 미주알고주알 떠벌리고 싶겠냐?”
“쳇, 야박하긴.”
“형. 드라마 할 시간 돼가요.”
“헉! 그러네! 얼른 치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