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시간이란 상대적이라 했는데 그게 이런 뜻인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이모네 집에서 나온 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는데도, 그게 1년도 더 전인 것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그동안 이모네 집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준이한테서 정보를 얻기는 힘들었다. 원래도 말을 잘하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놀라서 그런지 더 어눌해진 것 같았다.
“아이 이름이 뭐지?”
“준이요. 김준.”
우리는 택시 뒷자리에 나란히 타고 있었다. 준이가 창가에, 내가 가운데, 로저가 조수석 뒷자리에. 로저가 나름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쭉 빼고 준이를 향해 말했다.
“안녕. 아저씨는 로저야. 준이는 몇 살?”
로저를 본 준이가 울먹거리는가 싶더니 빽빽 울어댔다. 운전사 아저씨가 놀랐는지 택시가 살짝 비틀거렸다. 내가 안아주자 준이는 훌쩍거리며 울음을 멈췄다.
“제 생각에도 아저씨는 웃는 거 안 어울려요.”
내 말에 로저는 떫은 얼굴을 창밖으로 돌리며 투덜거렸다.
“흠. 난 원래 애들이랑 별로 안 친해.”
그동안 택시는 목적지에 다다랐다. 택시가 멈춰선 곳은 야트막하게 경사진 주택가 골목이었다. 루나커피에서 택시로 불과 10분 거리에 있는 동네였다.
로저의 집은 이 근처 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식 스타일의 집이었다. 담장 위로 새빨간 장미 넝쿨이 보였다. 로저가 대문을 열어주었다.
“와! 집 예쁘네요.”
고동색 기와를 올린 2층집은 오래된 집 특유의 정감이 있었다. 집 장미가 흐드러진 마당도 예뻤다. 반석 다섯 개를 올라가면 테라스였고, 곧바로 현관문이었다.
문을 열자 실내는 겉에서 보는 것처럼 평범하지는 않았다. 루나커피 2층에 있는 것과 비슷한 벽난로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고, 왼쪽의 넓은 창문에는 예의 그 보름달이 떠 있었다. 허공에는 커다란 좌표가 떠 있었는데, 루나커피에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현란한 숫자들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널찍한 거실은 주인을 닮아 깔끔하고 세련되었다. 거실 한쪽을 작업실로 쓰는지 엄청나게 큰 책상이 공간의 절반을 차지했다. 그 외에 가구라고는 벽난로 앞에 놓아둔 소파 세트뿐이었다.
“우선 씻겨야 할 것 같아요. 욕실 좀 써도 돼요?”
“저쪽. 그런데 루나한테 데려가면 왜 안 되는 거냐? 네 동생이라며.”
“그렇게 속 깊은 얘기를 아저씨한테 해줄 것 같아요?”
“난 지금 너한테 도움을 주고 있는데.”
그때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 아저씨 재산, 절반 가질게요.”
“뭐?”
“그 절반으로 아저씨한테 비용을 지불하면 되겠어요.”
“누가 너한테 돈 내래?”
“폐 끼치는 건 사실이잖아요.”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돈으로 때우겠다는 거야?”
어라, 이제 정말로 리딩은 안 하려나? 아니면 다 읽고서 시치미?
“시치미 아니야.”
“어엇!”
“이크.”
“진짜 못됐어.”
“나도 모르게 무심코. 조심할게.”
“그런데 그것밖에 못 읽었어요?”
“음. 지금 네 마음이 복잡하구나. 잘 읽히지 않을 정도로.”
“또!”
“아, 아니. 지금 말고 좀 전에 무심코 읽은 바로는 그렇단 말이야.”
“아무튼, 얘 좀 씻기고 나와서 설명해드릴게요.”
욕실은 평범하지만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나는 준이를 욕조에 앉힌 다음 옷을 벗겼다. 아이가 그간 얼마나 굶주렸는지 예전보다 훨씬 더 가벼웠다. 따뜻한 물을 틀어 주자 기분이 좋은지 이내 방긋거렸다.
“기분 좋아?”
“흐응….”
“눈 꼭 감아.”
머리를 감기고 몸도 말끔히 씻겼다. 욕실 선반을 뒤져 새 칫솔을 꺼내 치약을 묻혀주었다.
“혼자 이 닦을 수 있어?”
칫솔을 건네자 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치를 하면서도 내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그러는지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 걸 보니 가슴이 뭉클했다.
준이가 양치를 하는 동안 나는 세면대에서 옷을 빨았다. 아이는 그동안 물장난을 치며 놀았다.
“준아. 바닥에 물 튀지 않게 해.”
“으응….”
“그러고 보니 너한테 빚이 있기는 하네.”
이모 지갑에서 훔친 5만 원. 그걸로 휘핑크림 두 통과 젤리 커플링 두 개를 샀다. 남은 돈은 별 생각 없이 학교 매점에서 바나나 우유며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남았던가? 잘 모르겠다. 루나는 매주 용돈을 준다. 다 쓰지도 못하고 서랍에 쌓인 돈만 벌써 십만 원이 넘었다.
“그러고 보니 형 부자다. 너 옷도 사줄 수 있겠어.”
준이가 배시시 웃었다. 그 천진한 얼굴에 눈물이 나올 뻔했다. 불쌍한 놈.
양치까지 끝내자 내 기분이 다 말끔해졌다. 큰 수건으로 감싸준 다음 욕실에서 나오니 로저는 좌표 앞에 서 있었다.
“어차피 루나가 좌표를 볼 거야.”
“아…!”
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루나가 못 보게 할 수는 없어요?”
“일단 그렇게 해놓기는 했어.”
“어떻게요?”
“일종의 교란작전이지. 좌표가 떠 있는데 이쪽이 근거리 좌표야. 다른 쪽 좌표를 겹쳐놨어. 종이를 겹쳐놓은 것처럼 말이야.”
“저도 보고 있어요.”
로저가 잘생긴 미간을 잔뜩 좁히고는 나와 준이를 번갈아 보았다. 로저와 눈이 마주치자 준이는 슬금슬금 내 뒤로 숨었다. 로저가 뒤늦게 상냥한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차라리 안 웃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아가야. 네 눈에도 저기 저 좌표가 보이니?”
“준이가 좌표가 뭔지 알 게 뭐예요.”
“혹시 어린이들은 다 보이나 싶어서 그래.”
“아닐걸요. 우선 저는 어린이가 아니라고요. 준이랑 날 대충 묶지 마세요.”
“알았으니까, 네가 좀 물어봐.”
“준아. 저기 봐봐.”
준이는 내가 가리키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기 뭐가 보여?”
“으응…?”
“투명한 유리판에 하얀 줄이랑 숫자 같은 거 보여? 막 움직이는 거.”
준이는 허공을 응시하더니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로저가 말했다.
“이걸 보는 지구인은 너뿐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것 같구나.”
“그런가 봐요.”
“아이가 배고프대?”
“그렇겠죠.”
로저는 주방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뭘 좋아하니?”
“준이는 나만큼이나 못 얻어먹었어요. 식성 같은 건 자기도 잘 모를걸요.”
“그나마 다행이네. 먹을 게 별로 없는데.”
마법을 쓴 모양인지 5분도 안 되어 로저가 쟁반을 들고 나왔다. 오렌지 주스와 물, 죽이 담긴 공기가 테이블에 놓였다.
음식을 보자 준이가 달려들었다. 나는 얼른 그릇을 빼앗고 주스 잔을 집어주었다.
“뜨거워. 형이 먹여줄게. 우선 주스부터 마셔.”
준이는 큼지막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숨도 안 쉬고 주스 한잔을 다 마신 아이는 입을 아, 벌렸다. 나는 죽을 떠먹이며 옆에 앉은 로저에게 말했다.
“루나에겐 아직 나도 어린애, 얘도 어린애잖아요.”
“나한테도 그런데.”
“나 혼자 폐 끼치는 것만 해도 미안한데 준이까지 데려갈 수는 없잖아요.”
“흠.”
“아저씨는 애들 별로 안 좋아하시는 것 같지만, 그래도 준이는 생각보다 얌전한 아이예요. 밥만 잘 주면 강아지처럼 순해요.”
“나한테 얘를 키우라는 거냐?”
“당분간만요. 이모한테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보고 데려가게 할게요. 하루 이틀이면 될 거예요. 도와주실 거죠?”
“할 수 없지. 어린애가 형이랍시고 보호자 노릇을 하는데 어른이 돼서 안 된다고 할 수도 없고.”
“어우 씨. 말을 해도 꼭….”
로저가 냉정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준이를 건너다보았다. 다행히 준이는 먹느라고 그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저런!”
“네?”
그제야 나는 로저가 준이 머릿속을 리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보니 리딩할 때마다 저런 눈빛이었다. 솔직히 지금은 좀 반가웠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았어요?”
“아이 엄마가 경찰에 잡혀갔어.”
“네에? 왜요?”
“그것까지는 모르지. 아이의 기억을 통해서만 보이는 정보니까.”
“이모부는요?”
“음…. 이모부를 아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꽤 오래전 같구나. 네 이모부처럼 보이는 남자가 남자 둘을 패고 있어.”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아무튼 둘 다 물난리 때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원래 나쁜 놈이라며.”
“그래도 밖에서 남이랑 싸운 적은 없었어요.”
“너만 팬 거야?”
“말하자면 그렇죠.”
“쓰레기보다도 못한 놈!”
“제 편들어주시는 거예요?”
“이건 편 먹기와는 별개 문제야.”
“…아무튼, 전 일단 가서 애 옷을 좀 마련해올게요.”
로저가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그런 건 내게 맡겨.”
“네?”
“내가 알아서 챙겨주겠다고.”
“정말이에요?”
“속고만 살았나. 어서 가봐. 루나 걱정하겠다.”
“그럼 가볼게요. 내일 올게요.”
“일부러 올 건 없다. 내가 방법을 생각해보마. 그리고 루나커피로 가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났다. 그동안 눈치를 보고 있던 준이가 뎅그란 눈을 굴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형아….”
“준아. 형 가봐야 해.”
준이는 겁에 질린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싫어…. 나도 가….”
“걱정 마. 이 아저씨 보기보다 착해.”
로저가 투덜거렸다.
“보기보다라니, 건방진 놈.”
준이는 잔뜩 겁먹은 눈으로 로저를 보더니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덧붙였다.
“진짜야. 형이 거짓말하는 거 봤어?”
이번에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웅!”
지켜보던 로저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형이 언제 거짓말했어? 아무튼, 아저씨 말씀 잘 듣고 여기서 하룻밤만 자. 알겠지?”
내가 인상을 쓰며 으름장을 놓자 준이는 눈물을 잔뜩 머금은 눈으로 로저를 훔쳐보았다. 그리고는 꼭 다문 입술을 바들바들 떨면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준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로저를 돌아보았다.
“아저씨.”
“왜.”
“고맙습니다.”
“쳇.”
현관에서 신발을 신던 나는 문득 생각난 것을 물었다.
“그 뿔테안경은 어떻게 됐어요?”
“오토바이 타고 달아났어.”
“뿔테안경이 오토바이도 타요?”
“분명 뿔테안경은 위장일 거다.”
“호! 흥미진진.”
“철없는 소리 마. 누가 루나 짝 아니랄까 봐.”
그 말은 내 기분을 무척 들뜨게 했다. 방실거리는 나를 그가 싸늘하게 흘겨보았다.
“안 데려다줘도 되겠니?”
“에이. 제가 어린앤가요? 준이나 잘 부탁드려요.”
“최선을 다하마.”
그러면서 로저가 준이의 조그만 머리를 그 커다란 손으로 턱 잡아 흔들었다. 제 딴에는 머리를 쓰다듬으려 한 모양인데 화들짝 놀란 준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사실 그다지 아프지는 않았다. 내일 또 볼 테니까. 아무튼 서둘러 로저의 집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