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33화 (33/103)

<33화>

‘뭐 때문에 우리 고양이를 납치한 건가?’

에릭이 그 배달부의 멱살을 잡고 그렇게 윽박질렀을 때 로저가 한 말이 내 뇌리를 스쳤다. 누군가 플럼버 회원들을 감시하고 있다던 말.

그 배달부가 루나에게 덤벼들 때 나는 앞뒤 생각할 새도 없이 뛰었다. 내 작은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배달부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것뿐이었다. 오히려 루나가 처맞을 뻔한 나를 지켰다.

피부에 와 닿는 실감이란 게 그런 거였다. 루나가 정말 위험해질 수 있다는 실감 말이다. 한 번도 내 것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뭔가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렇게 무서운 것인 줄 꿈에도 몰랐다.

나는 여전히 꼬마고, 이변이 없는 한 최소 3년간은 더 꼬마일 것이다. 그 사이 루나의 신변에 아무런 일이 없기만을 바라는 건 무리였다. 더욱이 3년 후라 해봤자 겨우 중학생인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제주도에 내려와 뜬금없이 낯선 동네의 치킨집에서 드라마를 시청했다. 여주와 남주는 여전히 이별한 상태였다. 잠깐이기는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루나는 드라마의 장면에 넋을 잃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결국 해피엔딩일 텐데, 그렇지?”

“형.”

“응?”

“둘은 꼭 다시 만날 거예요.”

루나는 나를 보더니 이내 웃었다.

“그래. 원래 저런 드라마는 그게 정석이라더라.”

그날 밤 우리는 다락방에 나란히 누워 비스듬한 채광창 위로 휘영하게 떠오른 달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루나는 나를 꼭 끌어안은 채 잠이 들었다. 그리운 체향을 실컷 맡으며 나는 그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부드러운 달빛이 우리를 감쌌다.

꼭 다시 만날 거야.

산산조각이 나더라도, 별이 되어서라도.

⌜모눈종이 같은 좌표를 통과하느라 치킨 무 모양으로 조각났던 몸이 디디디딩 도로 붙어서 어여쁜 루나로 돌아왔다.

나 역시 모눈종이를 통과했는데 치킨 무처럼 조각난 내 몸은 도로 붙지 않았다. 내 치킨 무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직전 겨우 몇 초밖에 남지 않은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눈이 있는 치킨 무에서 짠물이 흘렀다.

‘루나, 난 조각났어.’

‘그러니까 어쩌자고 따라왔어?’

‘괜찮아. 난 죽어도 루나 곁에 있을 테니까. 날 잊지 마, 루나.’

‘은별, 진짜 이건….’

루나가 폭풍 눈물을 쏟았다. 내 치킨 무들이 우주의 텅 빈 공간으로 흩어지기 일보 직전 그가 울부짖었다.

‘완전 찢었어!’⌟

루나의 품에 안겨 그런 꿈을 꾸면서 아마 훌쩍거렸던 모양이다. 자고 났더니 눈이 팅팅 부어있었다.

*

다음날, 일행은 일찌감치 오두막으로 ‘출근’했다.

“어이, 루나! 간밤에 별일 없었지?”

“네, 조르주.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아침거리를 사 왔네.”

에릭이 바게트와 딸기잼이 든 ‘조랑말 빵집’의 비닐봉투를 들어 보였다.

“커피는 있겠지?”

“당연하죠. 금방 끓일게요.”

우리는 테라스 식탁에 둘러앉아 아침을 먹었다. 어제 같은 불상사가 또 생기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불안해서 아기고양이들은 오두막 안에서 식사하게 했다.

“오늘 낮에는 해변에 나가보려고요.”

“난 수영은 질색이야.”

“나도.”

로저와 에릭은 수영은 하지 않겠지만 수영복은 입겠다고 했다.

루나는 여행 준비를 할 때부터 내게 수영을 가르쳐준다고 했었다. 그래서 해변에 간다는 말에는 내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그러나 그건 말 그대로 고작 순간일 뿐이었다. 오늘이 루나와의 마지막, 어쩌면 내 생의 마지막 날일지도 모르는데 기분이 좋아지다니, 현실을 깨닫는 순간 더 괴로워졌다.

아침을 다 먹었을 무렵 엘리아와 아치볼트가 도착했다. 그들은 좌표로 이동했는데 한라산 근처에 도킹했다고 한다.

“올레 길을 종일 걸었지 뭐예요. 살만 빠졌어요.”

엘리아가 투덜거렸다. 그녀는 엄청난 미인이었다. 아치볼트도 훈남이었는데 어딘지 진지하지 못한 면이 엿보였다.

“로저, 워튼 씨는요?”

“아, 루나. 워튼 씨는 조금 늦는다고 아까 전화 왔어.”

그렇게 해서 7.5명의 사람과 4.5마리의 고양이는 간단한 도시락을 준비해 해변으로 향했다.

야자수와 바위 방파제가 있는 해수욕장은 제법 붐볐다. 루나와 나는 옷을 훌훌 벗었다. 우리는 서로의 수영복을 보며 웃어댔다. 집 근처 스포츠용품점에서 고른 것인데 나는 ‘으른 취향’으로 올블랙을, 루나는 ‘초딩 취향’으로 노란 심슨 캐릭터가 프린트된 수영복을 골랐기 때문이다.

“오….”

루나의 몸매는 환상 그 자체였다. 남자다운 몸매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어딘지 인어 같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나는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나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루나의 어깨 뒤에 커다란 반창고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형.”

“응? 왜?”

보여 달라고 조르려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부질없는 짓 같았다. 내일이면 나는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아냐.”

“싱겁긴. 어서 가자!”

섭섭했지만 잘한 것 같았다. 청승 떨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기적을 믿고 있었다. 루나가 가진 내 이름은 플럼버에서 다시 만나면 당당하게 보여달래야지.

로저와 에릭은 해변에 길게 누웠다. 둘 다 끝까지 바닷물에는 발도 담그지 않았다. 둘 다 몸매 자랑을 하려는 의도가 눈에 보였기에 나는 심사가 뒤틀렸다. 조르주는 모래가 뜨겁다며 파라솔 아래에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엘리아와 아치볼트, 루나와 나는 모래를 딛는 맨발이 너무 뜨거워서 꽥꽥거리며 바다로 뛰어들었다.

엘리아도 수준급이지만 루나의 수영 솜씨는 환상적이었다. 물이 깊어지자 그가 내 손을 잡고 잠수했다. 물고기가 보일 때까지 들어갔는데 그가 갑자기 내 손을 놓았다.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허우적거리다 보니 어느새 물 위에 머리를 내놓고 있었다.

“어엇! 아푸, 루나…!”

“크크. 형 여기 있어.”

“빠져 죽는 줄 알았잖아요.”

“형 잡아봐라-”

“아푸푸. 안 돼….”

루나는 내 손을 잡고 해변을 향해 인어처럼 헤엄쳤다. 물거품이 우리 사이로 사라지고 우리는 어느새 모래 위를 걷고 있었다. 그의 젖은 머리카락이 은실처럼 반짝였다. 하얀 목덜미에 태양이 빛을 뿌렸다.

루나.

나는 입속으로 그를 불렀다. 당연히 그는 듣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가 돌아보았다. 눈부신 얼굴이 나를 향했다. 손을 잡고 있는데도 그가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가지 않아도 된다면 좋겠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이렇게 루나 손을 잡아봤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세상 최고로 행복한 애니까.

나는 그의 손에 깍지를 끼어 꽉 쥐었다. 루나도 내 손을 꽉 잡아주었다. 우리 손에는 커플링이 끼워져 있었다. 내 몸이 산산조각이 나더라도 이 젤리 반지만은 온전히 남아주면 좋겠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남겨진 연인이 이런 징표 하나 정도는 간직하고 있던데, 루나가 나중에 바닷가에서 손가락에 젤리 반지 두 개를 끼고 ‘정은별’을 추억한다면? 무지 폼 날 것 같았다.

발에 밟히는 모래가 너무 뜨거워서 우리는 소리를 지르며 뛰었다. 이게 마지막 추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슬퍼졌지만, 그 순간의 웃음은 이상하게 쉬 멈추지 않았다.

*

이별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아니, 느닷없이는 아니었다. 그날 월식이 있을 거라는 건 한 달 전부터 알았으니까. 마음의 준비는 하고도 남았다. 그런데 그게, 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생각해보면 한 달은 물론 몇 년이 지난대도 마음의 준비 같은 건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저녁 식사 전에 프레데릭 워튼 씨가 도착했다. 워튼 씨는 지구 나이로 76세 정도라고 했다. 그런데 반백인 머리카락 말고는 전혀 노인 같지 않았다. 큰 키에 건장한 체격, 영민해 보이는 갈색 눈이 유난히 돋보이는 분이었다. 캐나다에 사시는데, 플럼버인으로서는 용감하게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여행 작가를 직업으로 선택했단다.

시끌벅적한 저녁 식사 후에 로저가 감귤밭으로 나를 불렀다. 나는 부루퉁한 얼굴로 다가가 낡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그가 나를 힐긋 보고는 어색한 듯 양 손바닥을 비볐다.

“내가 말한 서류들은 네 배낭에 넣어뒀다. 전산 자료는 메일로 보내뒀으니 서울 가면 한번 체크해 봐.”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도킹 실패하면 도로 가져가세요.”

“한번 준 것을 도로 가져갈 수는 없지.”

“전 재산이라면서요?”

로저는 조금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공평하게 반만 가져갈게.”

“좋아요. 딴소리 하시면 안 돼요.”

“걱정 마라. 그보다, 고맙다.”

나는 시큰둥한 얼굴로 다리만 흔들었다.

“아저씨한테 그런 말 들으려고 하는 일 아니에요. 루나가 위험해질까 봐 결심한 거지.”

“알아. 넌 아주 좋은 애야. 그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로저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 바람에 나는 인상을 팍 구기면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오두막을 향해 걸었다. 짙은 나뭇잎 사이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귤이 보였다. 그런데 그게 다 루나의 얼굴로 보였다! 게다가 고향에 가게 되어 좋다는 듯이 죄다 생글거리는 얼굴로 말이다.

“젠장….”

어느새 로저가 내 옆을 걷고 있었다.

“나도 같이 있어도 되죠?”

“도킹하는 순간에 말이냐?”

“그냥 거기에 있겠다는 말이에요.”

“음. 상관없겠지. 차원을 건너는 순간 너는 원래 자리에 남아있게 될 거야.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벽장 같은 데에 들어가 있도록 해.”

*

루나가 샤워하고 있을 때였다. 회원들이 하나둘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발소리를 죽이고 올라간 회원들은 의자가 모자랐기에 아예 의자 두 개를 치우고 카펫 위에 둘러앉았다.

아기고양이들은 케이지 두 개에 들여놓았다. 마지막으로 로저가 필립을 안아 들고 올라갔다.

“야옹, 왜들 여기에 모여 있지?”

“필립.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듣게.”

로저가 필립을 설득하는 동안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루나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그가 잠옷 대신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나왔다. 잠옷을 입고 나오면 갈아입으라고 말해줄 참이었다. 잠옷 차림으로 고향에 도착하지 않도록 말이다.

“은별아. 너도 씻어.”

“조금 있다가요. 그보다 드라마 시작해요. 얼른 올라가요.”

“내가 간식 좀 챙겨갈게. 먼저 올라가.”

“아니! 배, 배불러요. 오늘은 간식 먹지 마요.”

“응? 난 먹고 싶은데. 간단하게 과자랑 파인애플 주스라도….”

“형 요즘 살쪘어요!”

루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어서 그 예쁜 미간에 주름이 네 개나 잡혔다. 그가 아랫배를 내려다보며 슬슬 문질렀다. 그리고는 처량 맞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진짜…?”

“네? 네! 그렇다니까요!”

“알았어…. 굶을게….”

시무룩한 얼굴로 루나가 계단을 올랐다. 가뜩이나 가냘픈 어깨가 축 처졌다. 다락방 천정의 형광등 불빛이 깜빡였다. 그것이 좌표를 연 탓에 생기는 현상임을 나는 눈치로 때려잡았다. 달이 그림자에 먹히는 시간, 이제 코앞이었다.

0